"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이겨내기 - 3

by 잔나비 posted Nov 16, 2012 Likes 0 Replies 3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이겨내기 - 3




3. 진리와 빛은 우리 밖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는 실망, 그리고 희망.






 이번 안식일 대예배 시간에 유명한 강사 목사님이 저희 교회 오셨는데,

설교를 끝 맺으시면서 예언의 신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나누는 기준이된다고...

심지어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까지 한다고.... 강변하시는 것을 묵묵히 들어야만 했더랬습니다.

선교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지식인 층, 지도층을 전도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정작 바뀌어야 할 패러다임이 무엇인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진리 체험, 혹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을 세 번정도 한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사춘기 시절에 방황할 때, 성경과 예언의 신이 제 삶의 키를 잡아 주었던 경험입니다.

그 때 정말 사람들과 관계도 별로 안 좋고, 공부도 잘 못하고, 삶의 의욕도 별로 없었을 때,

저는 찬양하는 것과 말씀 묵상하는 데 푹 빠져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실존적 상황은 매우 암울했지만, 절대적 존재와의 직접적 관계 설정을 통해서

주변의 인간적 상황들이 주변부화 되자 오히려 자신감이 회복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기존 친구들과의 관계는 깨질 정도로 저의 삶의 패턴은 180 도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게 되었고 규칙적으로 공부를 하게 됫고 성적도 올랐습니다.

그리고 늘 예언의 신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탐독했고, 희망과 확신이 날로 높아져갔습니다.

삼육학교 선생님들과 주변 신앙 선배님들이 저를 칭찬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특별한 배경이나 특출난 능력이 없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길이다. 라고 말이죠.

이 때 만났던 예수는 방황하던 시절 저의 존재론적 가치를 회복시켜주는 복음으로 기억합니다.




 두번째 경험은 대학생이 되기 직전에 있었던 죄사함의 경험입니다.

예수님 만남, 십자가의 체험 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하루 아침에 뚝딱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당시 김신섭 목사님이 강조셨던 Q.T를 꾸준히 실천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주일 강사로 오신 신계훈 목사님의 '듣는 기도'라는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바로 그 다음 날 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에 1시간을 기도하고 1시간을 말씀 묵상을 하는 삶을

거의 1년정도 지속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이 제 몸을 감싸는 것이 점점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경건주의적 삶을 1년을 지속하던 어느 안식일 저녁이었습니다.




금요일 안식일 저녁이 되어서 기도의 동산에 올라 조용히 찬양을 하면서 묵상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제가 지난날의 저지른 죄들이 태산처럼 쌓여갔고, 그것들이 제 심장을 짖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죄책감을 몇 번 크게 느껴 본적이 있었지만, 태어나서 그렇게 답답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 처럼 고꾸라져서 가슴을 쥐어짜면서 통곡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죄에 눌려서 죽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그러다가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야 산다. 예수님을 부르자, 십자가의 예수를!

그리고 온갖 무거운 생각들을 버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때, 저를 내리 누르던 죄책감이 마치 커다란 스크린에 비취는  영상이 되어 제 눈 앞에서 빠르지만 정확하게 지나가더군요.

어린 시절 남의 집 유리창 깨고 도망간 일, 사춘기 시절 친구랑 싸우다가 팔을 부러뜨린 일, 도둑질 한 일 등등이 펼쳐졌습니다.

그 뒤에 거대한 스크린 너머에는 나무에 걸린 어린양 한 마리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린양은 바로 예수님이셧지요. 너의 그런 죄를 위해 내가 희생 당했노라...하시면서 저를 두 팔로 안아 주셨습니다.



갑자기 펼쳐졌던 지난 날의 죄들의 기억은 용서와 은혜의 기억으로 화하여 사라지고

주변의 촉촉한 저녁 이슬들은 마치 빛 가루처럼 제 피부에 부딪혔고,

하늘의 별들은 천사들이 하늘 백성이 된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 밝히는 촛불같아 보였습니다.

풀도 잎도 나무도 저를 보고 노래하며, 세계가 새로운 저의 탄생을 기뻐해 주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때 화잇부인이 경험했던 것과 유사한 거듭남, 중생의 경험을 했던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student님께서 조사심판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던 것과 비슷한 경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때 만났던 예수님은 저를 죄의 짐에서 해방해 주시고 천국의 소망을 주신 복음 그 자체이셨습니다.

저는 이 경험 이후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전하는 목사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을 했었습니다.

물론, 삼육대학에 와서 그러한 경험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곤, 약간의 자신감과 교만 사이의 어떤 지점에 제가 조금씩 다가가게 되었지요.



제가 세번째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은 군대에서 간접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안식일에 외부 교회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렵사리 부대 내에서 홀로 안식일을 보냈는데,

군종장교의 배려로 일요일에 개신교 집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먹을 것도 많이 주고 불교와 천주교보다는 가까운 개신교 집회 참여해서 예배라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저를 안식교 신학생이라고 눈치를 많이 주다가 나중에는 함께 찬양인도도 하게 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깜짝 놀라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집회 때 말씀을 듣다가, 혹은 호소창 시간, 설교 전 회개와 자복의 기도시간에

많은 젊은 군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 뒹굴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들의 삶이 변화하는 모습들도 뒤따르는 것을 보고

저의 생각은 점점 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이 눅 15장의 경험이 일어나는 현장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자신은 사회에서 오입질과 마약에,, 정말 말할 수도 없이 더러운 인생을 살았는데,

군대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죄씻김을 받고 이제 부모님과 주변 사람 앞에서 떳떳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자신있게 간증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놀라지않을 수가 없었지요.

정말 믿어서 의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긴 하더군요.(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재림교회 교리하고 전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경험이 있었던 저는 자신감을 가지고 제 이야기를 하면서 군대에서 전도를 하게 되었고,

몇명의 영혼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재림교회의 교리를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삼육대학 신학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왜 자기에게 안식일교 교리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 때 저는 아직 너희들이 수준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들에게 재림교회 교리를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죄씻김 받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데, 구태여 그들을 안식일 교인을 만들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지요.

솔직히 제대하고 교인으로만 남아도 나는 성공이다. 라고 생각했고, 저는 지금도 그때 그렇게 한 것 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제대하고 재림교히 예배로 다시 복귀했을 때에 가장 크게 아쉽게 느껴졌던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재림교회에서 종종 하는 말은 "교리"가 우선이 아니라 "복음"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지내다 보면은 '복음의 경험'과 '빛과 진리와 사랑의 경험'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르치기는 복음을 경험하면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하는데,

사실, 복음을 경험한 뒤에 추가적으로 안식일, 음식, 예언 몰라도 신앙 생활 잘 하거든요.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을 추가적을 가르치면, 예수에 대한 집중이 흐뜨러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과 복학한 뒤로 이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꽤 어지러웠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통한 구원을 얘기하는 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는 재림교회 뿐 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풀리는 문제였던 거죠.

정직하게 말해서, 예수님을 만나는데 현재 재림교회 교리들이 방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사실을 수용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책을 읽게 됩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이 책에서 주인공이 천주교 신자로써 경험하게 되는 영적인 각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은 민족주의나 종교에 심취했다가 자유로운 진리의 세계인 '미학-예술'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거든요.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주인공의 경험은 천주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제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잇의 경험과도 매우 흡사한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범기독교적 영적 체험이었던 것이지요.

재림교회가 적그리스도 집단이라고 보았던 천주교인들 중에서도 그러한 경험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스스로 추론해 보게 되었습니다.



1. 만약, 제가 한 경험(중생체험)이 만약 모든 인류가 구원을 이루기 위한 거쳐야 할 필수 조건이라면,

나는 구원을 받은게 확실하다.

하지만 이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아직 구원이 없다.

그렇다면, 이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확인해본 결과, 이 경험은 재림교인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재림교인이 아니라고 못하는 것도 아니다.

고로, 구원은 재림교회라는 정체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재림교회를 전하거나 그 교리를 가르칠 필요성가 없다. 

예수만 전하고 그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면 그 뿐 이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체험을 인정하면 재림교회의 특수진리는 의미가 없는게 됩니다.



2. 만약, 내가 한 경험이 그저 설명하기 힘은 어떤 체험이라면,

구원하고 상관없는 어떤 경험일 뿐이다.

그렇다면, 화잇부인의 경험도 구원하고 상관없는 특정한 경건주의적 경험일 뿐이고,

천주교인이엇던 제임스 조이스도 그러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화잇은 스스로를 구원받은 것으로 확신하고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지속한 것이고,

조이스는 그러한 경험도 하나의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미학-예술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화잇의 길과 조이스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경험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저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구원의 체험이 아니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이 낫다.




이 문제는 당시 제게, 특히 그 경험을 구원의 증표로 생각하던 제게는 너무나 큰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 경험이 구원의 증표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종파가 구원파 계열인데, 그들이 구원받은 년도와 시간과 날짜와 장소를 외우고,

그것을 자랑하면서, 그런 경험이 없는 자들을 무시하는 작태를 보니, 거기에는 오히려 진리성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만약에 저도, 그 경험에 사로잡혀 그 경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집착하고 있었다면,

그 경험을 우상 삼아 제 스스로의 자랑거리로만 삼으려고 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오면서 처음에 저는 큰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내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것 같은 상실감과 나만 누리고 있던 은밀한 기쁨이 누수되는 듯한 배신감 등이 들었죠.

사실, 성공과 구원의 쾌감은 다른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멸망받는 다는 생각이 가미되면 더 증폭되는 특징이 있는 거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한다면,

그러한 경험을 구원의 기준으로 두어 사람을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차라리 그러한 경험으로 구원을 나누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사랑의 품성과 더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실망은 사실 저 자신의 편협성을 깨뜨려주시는 희망의 빛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그러한 체험을 잘 얘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 구원과 연관지어서는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체험은 그저 개인적인 은총으로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그리고 불교나 다른 종교는 구원의 체험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같은 기독교인들 끼리는 교리문제로 구원을 다투는 일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신앙을 할 것이라면 예술적(미학적)으로 신앙을 하자.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가장 첫 특징은 사소한 것으로 문제 삼지 않는 것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눈으로 재림교회를 돌아보니,,,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더라구요.







(다음에 계속)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