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3
(나성에서 수술을 한 후 모든 자녀들이 “아버지, 뭐 간단하게라도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서 남기시죠!”해서 자녀들에게라도
회고담을 남겨 주려고 몇 자 정리하던 것을 가정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서 제쳐놓았었다가 지금 글을 쓰기가 힘이 드니
녹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연재 #32 끝 부분)
5. 가지 많은 나무- 제 2 부
1983년 3월 말.
어머니가 누워 계시면서도 정신이 들면 가끔 우리가 돌보아 주던
태국이네 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태국이네
온 가족이 레딩에 들려 며칠을 지났다. 며칠 후에 뉴욕
제후 집에 들렀다가 나성으로 간다고 하며 떠났다.
태국이네가 떠난 지 이 삼일 후인 4월 9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다른 때 같으면 전화를 끊고 나서
“누구한테서 온 전화였습니다.”라고 묻지를 않아도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편지나 전화가 와도 “누구에게서 온 것이냐?”하고
묻는 사람이 아닌지라 가만히 있었다. 한참 뜸을 들이더니
자부되는 인숙이가 말을 했다.
“아버지, 근도가 사고가 생겼대요.”
“응, 그래?”
나는 속으로 “자동차 사고인가? 차 사고라면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이 되어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 같다.
족히 몇 분은 지난 것 같다. 인숙이가 다시 말을 했다.
“아버지, 그게 아니라, 근도가 죽었답니다.”
“!!..................”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안았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한참을 있다가 속으로 “뭐, 근도가 죽어?”하는 생각만 하며
멍하니 있었다. 갑자기 “나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다 미국으로 와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태경이 문제에다
어머니까지 정신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뼈까지 부러져
이 고생을 하기도 힘이 드는데 이제는 장손 되는 근도가
죽다니?!! 근도가 이제 나이 40을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갑자기 가족들을 미국으로 인도한 것에 대한 통탄과 후회가
밀려오면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받은 은혜와
축복은 생각나지 않고 그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고개만
점점 숙여지고 말았다. 마음속에는 그저 “가봐야 할 터인데!
내가 가봐야 할 터인데!”라는 생각만 떠오르다가, 조금 지나자
“지금은 어머니 오줌똥을 받아 내야 하는 형편인데 어디
갈 수가 있겠나?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만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누가 가야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뉴욕으로 떠난 태국이 삼촌한테 전화해서 나성으로
가도록 했다.”고 한다. 내 아내가 움직일 수가 없으니
나성으로 갈 수가 없어 마음에 얼마나 유감스러웠는지
지금도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제 와서 후회한 들 아무 소용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근도의 사고 소식을 들이니 마치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왜냐하면 내가 매번 운동 삼아 아침에 걸으면서 큰 아들네
집에 들르면, 언제나 밤늦게 일하고 돌아온 근도의 여동생에게
“근숙아, 너 지금 비록 병원 가까이에서 살고 있지만
밤늦게 집에 올 때는 혼자 오지 말고 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도록 해라!”하고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면 근숙이는 늘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전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근도는 동네도 꽤 안전한 곳에 살고 있기에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는데 이 화잇부인기념병원 근처,
자기 아버지의 집 가까이에서 좋지 않은 불량배들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나니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아 죽은 것 같은 생각이 들고 후회가 될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이 점점 악해가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 가고 있는지를 꼭 말해 주었어야 하는 것인데!!!
장손인 근도가 이렇게 어이없이 40대에 가는 것을 보니 우리
집안 기둥이 뽑혀지고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생각만 든다.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여기다 두고 갈 수가 없으니 “근도의
장례식은 어찌 되는가?”하고 걱정만 될 뿐이었다.
근도의 아비나 에미, 근도의 아내 귀자, 근도의 어린 자녀
광호와 광은이를 누가 어떻게 수습을 해 나가고 있는지
마음이 아프고 갑갑할 뿐이다. 아무도 소식조차 전해 주지를
아니하니 너무 힘들기만 하다.
“아마 내가 소식을 들으면 너무 힘 들것이라 생각들을 하는
것이겠지,”하면서도 너무 답답했다. 모두들 하나님의 자녀답게
수습들을 하고 뒷일들을 감당하기 바라는 기도만 드렸다.
4월 15일인가,
글렌데일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선억 목사가
내게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근도의 소식은 알고 계시지요?”
“김 목사, 알고는 있는데 아무도 그 후에 전화가 없어서
답답해 못 견딜 지경이오.”
“목사님, 저도 미리 전화를 드릴까 했는데 너무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서 지금껏 기다리다가 이제야 전화를 드립니다.
소식을 들으셨다니 조금 안심은 됩니다, 힘내십시오.”
“그러지 안아도 근도가 그리되고 나서 장례식은 어찌되었고,
어려운 일을 당한 가족에게 누가 용기를 주고 보살펴 주는지
마음에 걱정뿐인데 김 목사가 이렇게 전화를 주시니 너무 고맙소,
김 목사가 좀 앞장서서 모든 일을 잘 도와주시기 바라오!”
“예, 목사님, 교우 여러분과 하나님께서 잘 도와주시고 있으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전화라도 받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후에 들려오는 소식은 여러 가지 사정상 장례식은 일주일 후에나
하게 되었는데 여러분의 도움으로 잘 치렀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또 근도의 처되는 귀자가 도리어 용기를 내어 장례식 동안에
시부모를 위로하며 자신은 눈물을 자제했다하니 기특하다는
생각과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근도의 아들 광호와 딸 광은이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면 어머니까지 울게 되니
울지 말라”고 했다니 내심 감사했다. 이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에게 용기와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교우들과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드렸다. 이번 일을 통해
이런 일들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잠깐 기도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칠십 여 년 전에 그 산중에서
불러주시고 오늘날까지 우리 모든 가족들을 보호하사
믿음 안에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함을 드립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있어 우리 많은 가족들이 이 나라에 와서
고락을 같이 하면서 살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함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시고 인도하셨지만 내가 가족을
잘 인도하지 못함인지 우리 근도가 이런 불의의 참변을
당했습니다. 우리 모든 가족이 다 애통하는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뒤처리를 잘하고, 지금은 용기를 얻어
서로 위로하며 지날 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함을 드립니다.
특히 근도의 부모 되는 큰아들 태혁이와 명신이, 근도의 가족
귀자와 광호, 광은이가 이 어려움 속에서도 다 믿음 안에서
용기를 얻어 잘 지난다하니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이제 간절히 기도 하는 바는 우리가 주의 은혜 속에서 더욱
잘 믿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에 더 가까이 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더욱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하사 이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며 지나다가 주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다 구원을
받도록 준비하게 하옵소서. 그 중에도 우리 귀자, 광호,
광은이에게 더욱 하나님께서 지켜 주사 남편과 아버지를
잃었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더욱 주님을 굳세게 붙잡고
나가게 하사 힘을 얻어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든 식구가 어디에 있든지 서로 권면하여
모두 하나님의 자녀 된 책임을 다하도록 서로 돕고 힘쓰는
우리들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주께 맡기고 최후의 승리하는 가족들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인도하여 주심을 바라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나의 자녀들아,
진리의 교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란다.
내가 1910년경에 이 교회에 들어온 후에 80여 년간
참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 교회 안에서 생활하며 받은
축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처음 이 교회에 들어와서
얼마 지나고 나서는 내가 진정 참 교회를 선택했는가를
알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다. 심지어는 장
감리교회에서 만드는 기독신문도 십여 년 이상
구독을 하며 우리 교회와 비교를 해 보았으며 또 개신교
가운데 성결교회가 순수하다고 해서 성결교회가 만드는
공식적인 출판물들을 오랫동안 진지하게 연구도 해 보았다.
그러나 성경대로 말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과 지식과
주장들을 말하는 것을 보고 내가 찾은 이 교회가 성경,
오직 성경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내 평생을 살아왔다.
지금도 내가 찾은 이 교회,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성경대로 따르는 진리의 교회라고 너희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가족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진리를 따라
순종하기만 하면 신명기 28장에 있는 대로 “너희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으며 우리 자손도 다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진리를 받고 겉으로만 믿는 것처럼 보이나 그 진리에
순종하지 않아 수 천 년 간 유리방황하던 유대인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주님의 말씀, 성경에 가까이 하며
기도를 계속하여 하나님과 가까이 알고 지내기를 바란다.
지금 내 나이 90을 바라보고 내아내의 나이 80을
바라보고 있다. 나로서 우리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이라면
잘 순종하고 우리 늙은 부모 대접해 주기를 각근히 해 주는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를 한다. 이제는 주안에서 잠들었다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겠다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보면 “우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했고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우리가 그러한 희망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겠다.”는
말씀도 있다. 우리 모든 가족들은 참 도리 안에서 말씀을 보고,
믿고, 기다리며 살아가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 한 대로 가족들
사이에 지금까지 살아 온 것처럼 평화를 간직하며 살기를 바란다.
내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가운데 참 교회를 찾아 살면서
우리 식구들이 다 교회에 들어와 있게 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헤아릴 수가 없다.
내 고향에 교회가 선지 한 6년 후에 내가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작은 교회에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교역자가
아홉 사람이나 나왔다. 내 집안에서 나 정동심, 정동성 씨, 정동석 씨,
정OO 씨, 박지순 씨, 박원철 씨, 박원철 씨의 사촌동생 박영세 씨,
정희창씨, 이렇게 아홉 명의 교역자가 나왔는데 그 모두가 다
잘되었다. 내가 제일 늦게 교회에 나간 후, 순안의명학교에 가서
제 5회로 졸업했는데 졸업생으로써 교회직분 중에 대회장과
원동 지회 부회장까지 되어보았으니 거듭 감사하다.
자랑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너희가 들을 때에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한 생활을 하며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해 주었구나!” 하는 감사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떠나지 않고 끝까지 축복받는 생애를 하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다.
너희들은, 먼저 잘 믿고 성경을 계속 읽기 바란다. 언제든지
기도생활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 모든 가족들이 성경연구하고 믿고 기도드리면서 화평 속에서
모두 승리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나의 소원일 뿐이다.
모쪼록 깊이 생각해서 이 늙으신 부모가 어려서부터 믿어 내려온
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이 교회 안에서 잘 준비해서 디모데후서
4장 7-8절 말씀대로 “나의 믿음을 잘 지키고 잘 달려왔으니
이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는 상급을 모든 가족들이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한 세상 살아가기를 바란다.
근도의 사고를 보면서 할말이 많지만 다 그만두고 “가정에
대들보 되는 근도의 일이 화가 아니라 도리어 복이 되는 일로
삼아서 모두 자기를 돌아보며 살기를 바란다. 세상나라보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모든 의무를 감당하고 화평 속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칭찬을 받고 살게 되기를 바란다.
“이 녹음테이프를 카피해서 가족들에게 주면 좋겠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들은 태목이의 작은 아들 앤디가 교회에서 쓰는
카피머신을 얻어서 이렇게 카피해서 가족들에게 전하게 되어
감사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촬리, 앤디가 병중에 계신 할머니를
위로하려고 알지도 못하던 한국말을 배워서 학교에 갈 때
“우리 학교에 갑니다.”, 학교 갔다 오면 “우리 학교 갔다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영어가 섞인 발음으로 “할머니, 앙뇽(안녕)
하셨습니까?”, 잘 때는 “앙뇽히 주무십시오.”해 놓고는
“할머니 재미있죠?”등 여러 가지로 할머니를 위로 하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했던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만들어진 이 테이프가 너희들의 믿음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부록-(이 부분은 편집자에 의하여 기록 된 것입니다.)
1. 그 후의 이야기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 간단한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과 병원에서 한 이틀 밤낮을
지내면서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아버님의 회고록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을 저에게 다시
실감나도록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저희 집에 다시
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옛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습니다. 병원에서의 그 이틀 밤 동안의 말씀들과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말씀들은 회고록을 쓰게 하는 동기와
이유와 힘이 되었고, 실제적으로도 회고록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회고록 육성 테이프는 우리 집안의 장손인 근도의
죽음을 겪으면서 끝을 내셨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여니 할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이 아버님도 사랑하던 장손을
잃으시고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을 잊으실 만큼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어머님은 펜실바니아주 레딩 근교에 사시는 네 째
형님 댁에서 1986년 11월 4일 향년 80 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의 연세 90세가 되신 때였습니다. 어머님의 시신은
캘리포니아 주로 옮겨왔습니다. 글렌데일 한인교회 오성훈
목사의 도움으로 글레데일 Vallejo Drive Church에서 어머님의
추모예배를 드리고 어머님은 캘리포니아주
Hollywood Hills Forest Lawn에 있는 장지에 모셨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몇 몇 가족의 집에서 거하시다가
마지막에는 다섯째 아들인 저희 집에서 계셨습니다. 저는
뉴스타트의 일을 맡아 북 가주에 위치한 위마라는 곳에 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기뻤던 이야기는 물론,
슬펐던 일과 보람되었던 일들과 마음 아팠던 일들 까지,
그간 하지 않으셨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섯째 며느리와
나누시며 행복해 하셨습니다. 제가 주말에 나성에 내려오면
아버님은 “내가 문자와 매일 댄스를 하고 있다”라고 웃으시며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밤일을 하던 며느리가 와서
아침식사를 하시라고 하면 다리에 힘이 별로 없어서
며느리의 두 손을 잡고 식탁까지 오시는 일이 춤을 추는 듯
즐겁다고 말씀 하시곤 하셨습니다. 밥을 드실 때는
숟가락 보다 젓가락을 더 많이 사용하는 시아버님께
“숟갈로 드시지요!”라고 말씀드리면 “나에겐 먹는
자유가 있다!”라고 며느리에게 말씀을 하시며 그렇게도
자유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되도록이면 많은 자유를
허락하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생각이 나실 때마다 아버님은
“문자야! 고생이 많지? 내가 너를 고생시키지 않고 죽어야
하는데.”라고 말씀을 하시곤 해서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다섯째 며느리에게 먼저가신 어머님이 “나를 자꾸 오라고
부르신다.”하며 모든 자녀들을 모이도록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거의 모든 자녀들이 다 모였고 모인 자녀들을
일일이 다 만나 보셨습니다.
아버님은 1992년 2월 22일,
거의 모든 자녀들이 다 모인 그 주일, 안식일 아침 7시경에
향년 96세로, 수를 다 하시고 너무도 평안함 속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내가 너를 고생시키지 않아야 하는데”라는 소원의
말씀을 하신대로 너무도 평안함 가운데 수를 다 하셨습니다.
화잇부인 기념병원(White Memorial Hospital) 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렸고 아버님도 6300 Forest Lawn Drive,
Los Angeles, California 90068에 있는 Hollywood Hills
Forest Lawn에서 발인 예배를 드리고 그 곳에 있는
어머님의 묘지에 합장을 하였습니다.
몇 년 후, 막내 동생 태경이는 뉴욕 주립 공원 깊은 산 속에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아 볼 수가 없는 몸으로 사망한지 꽤
오랜 후에 경찰에 발견 되었습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나마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죽은 것은 아버님께 다행한 일이라
생각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동생의 죽음은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그 전부터 있었던 우울증의 증세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더 심했었다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재판소(裁判所) 판결문(判決文)
(원본 번역)
(아래의 조선총독부재판소(朝鮮總督府裁判所)판결 번역문은
아버님이 작고하시고 나서 오랜 후에, 어떤 분을 통하여
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어로 된 판결원본 과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받아서 우리말로 된 것만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判決原本)
朝鮮總督府裁判所(조선총독부재판소)
昭和十六年刑控第十七號(소화십육년형공제십칠호)
判決(판결)
本籍 平安南道江西郡水山面雲北里三百八十六番地
住居 京城府回基町八十九番地
牧師 鄭東沈改오? 國 本 秀 松
當年 四十六年
위 사람에 대한 보안법위반피고사건에 관련 소화16년
(1941) 8월 30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청에서 언도한
유죄판결에 대해 피고인에 의한 공소제기에 따라
본 재판소는 조선총독부검사 少磯省吾 관련심리를 통해
아래와 같이 판결한다.
主文
피고인을 징역 6월에 처함
理由
피고인은 15세 무렵부터 기독교를 신봉하여 대정11년(1922)
3월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에 있는 기독교계통의 중등학교인
사립 의명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대정12년 이후로
기독교전도사 그리고 목사로서 황해도 황주군, 평안남도 평원군,
북간도, 청진, 원산 등을 거쳐 소화 14년(1939) 5월
경성부 회기동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로
취임하여 동 교파인 중ㅁ(선)대회장을 겸직하고 있던 중
소화 16년(1941) 4월 동 교회에 속한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에 있는 예수재림교회 화강리 예배당
신축낙성 예배로 앞서 기술한 중ㅁ(선)대회 주최로 동월
8일부터 동월 12일까지 동 예배당에서 낙성기념을 겸한
동 교파 충청남도 지방회를 개최하면서 피고인은
동 교회 전도사 평강영섭 외 4명의 사역자와 함께
이곳에 모여, 앞서 기술한 지방회의 마지막 날인
12일 밤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교회 신자 오원대식 외
남녀 신도 및 비신도 약 50명에게 설교를 하던 중
“여러분은 우리 조선이 30년 전 멸망한 이유를 알고
있는가? 우리 조선인은 한일 합방 이후 30년의
오랜 기간 일본의 통치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해 왔고,
조선은 그동안 이질적인 문화가 만연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을 우리들이 라디오를 통해 제외국에
방송한다면 외국에서 속속 자금이 들어오고
가까운 장래에 우리들은 다시 30년 전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함부로 함으로서
한일합방 이래 총독부의 통치를 비방하고 조선의 독립을
시사하는 등의 정치에 관한 불온적인 언동을 하여
치안을 어지럽힌 자로서 증거에 의해 위법사실은
설교내용 뿐 아니라 피고인의 본 법정심의에 의한
위법사실에 대한 공술과 증인 오원대식, 충본정남,
김산병두, 송원종훤, 산전형이 에 대한 검사의
각 신문조사과정에서 제각기 그날 그 장소에서의
피고인으로부터 위법사실에 대한 내용의 설교를
들었다는 요지의 각 공술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에 의해
피고인의 위법사실은 보안법 제7조에 해당됨으로
조선형사령 42조에 의거 그 형명(刑名)을 변경하여
소정기간 중 징역형을 선택하여 그 형기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6월에 처하기로 한다.
이로서 主文과 같이 判決함
피고인의 공소이유 기각
소화 16년 11월 10일
경성복심법원형사제1부
재판장조선총독부판사______
조선총독부판사____________
조선총독부판사____________
3. 조사(弔詞)
정동심 목사의 영전에 드립니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살기에 급급해서 목사님이 마지막 드셨던 입원실과
아드님 댁의 병석에 한번 찾아가 뵙지도 못하고
목사님을 여의게 되었습니다. 이 무정하고 무례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생시 같으면 “괜찮아, 괜찮아!” 하시며 등을 두드려 주시겠지만,
어른을 어른답게 한번도 모시지 못한 저희를 저희 자신들이
용서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목사님!
9순의 나이에도 꼿꼿하시던 모습, 젊은 아이들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하시던 그 맑은 총기로 언제나 우리 곁에
원로 목사님으로, 자애 깊은 아버님으로 계실 것 만 같았는데,
불과 몇 주간의 병석에서 이처럼 떠나시니 인간의 수한을
짐짓 모른체한 저희들의 무성의와 무정이 한층 뼈저린
후회로 남습니다. 모셔다가 즐기시는 음식 골라서 한번 대접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오늘 목사님을 보내드려야 합니까?
목사님!
흔히 사람들은 연로하신 어른들의 돌아가심을 두고
“호상”이라고 합니다.”만은 목사님을 보내는 저희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는 목사님이 한 인간으로 살아오신 세월과,
한 목회자로 살아오신 세월, 그리고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서 살아오신 세월의 그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 한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므로 차마 목사님이 가시는
이 시간을 마음의 눈물 없이 넘길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살아오신 한 세기의 세월은 혼란과 고통과
갈등의 시대였습니다. 전쟁에 시달리고, 가난으로 고통당하고,
인간에게 배반당하며 살아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험난한 시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살기가 힘든 시대를
당신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그 사회의 양심으로 사셔야 했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한국 재림교단에서 50여 년간의
목회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목장에서도 목양이란 고달픈 것인데 하물며 피폐한
한국교회의 50년 목양이란 얼마나 험한 갈바리의 길이었겠습니까?
무엇보다 가난한 남편으로서 여섯 아들, 다섯 딸을 부양하고
교육시켜 길러 내야했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수고와
괴로움을 어찌 저희들이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처럼, 그 많은
자녀를 기르시며 겪으신 사연을 설사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한들,
그 한스러우심을 어찌 속속들이 이해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님!
목사님은 그 모든 고통, 그 괴로움, 그 고독, 그 한을,
믿음으로 극복 하셨습니다. 마치 고통을 고통으로 즐기시듯,
목사님은 목사답게 초연히 한 생애를 넘기셨습니다.
늘.........즐겁게 일하셨고, 감사해 하셨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마치 믿음이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기쁨과 감사로 바꾸는
요술 지팡이처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희들도 이제는 나이가 50을 넘어 섰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눈이 한결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사님의 그 주름진
얼굴에 담고 계시던 그 미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수월한 것 같던 당신의 생애, 믿음, 목회들이, 실은
얼마나 힘든 것이었고, 고통스런 것이었던 가를 말입니다.
목사님!
믿음이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것임을 나이가 들면서 저희는 알게 되었고, 그리고 당신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얼마나 짙은 슬픔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 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한 생애”를 끝내시고 잠드신 목사님!
아니, 우리들의 아버님!
당신이 무언으로 보여주신 마지막 미국 생활은 저희들에게
진정한 설교요, 믿음의 모본이었습니다. 파란 많은 한 생애를
이렇게 복스럽게 마감하셨으니 후진인 저희들에게 큰 빛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완전한 자유에 드셨으니
이제야 또한 지정한 기쁨에 드셨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주님 오실 때, 그 때는 눈물 없이 뵙겠습니다.
1992년 2월 25일
자식 같은 후진,
송순태 弔哭.
-------------------------------------------
*아래의 글은 아버님의 회고록을 책으로 낼 준비가 완료된 당시
서문을 써 주신 유 형환 전 한국 연합회장님의 글입니다.
제가 아버님의 회고록을 올리면서 제일 처음에 올려야 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제 실수로 이제 마지막이 되어 올립니다.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그 당시 고문경 목사님께서도 서문에 올릴 글을 써 주셨는데
제가 그만 컴퓨터로 실수를 하여 그 귀한 글이 날라가 버리고
말아서 올리지를 못합니다.
고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
정동심 목사의 회고록을 읽고.
먼저 존경하는 목사님의 회고록이 나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않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끼고 깨달은 바가 많으나
그 중 세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목사님께서 1896년 3월 30일, 유복자로 태어나
1992년 2월 22일, 96세로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근 1 세기를
사시면서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잠시도 쉼이 없이 고난이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낙담하여 인생을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용기와 욥과 같은 인내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많은 친척들과
자녀 손들을 주안에 있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께서는 우리 교단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가 되시고 또 최고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성공의 비결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하시고,
책제목도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이라 하시고 평생 하나님과
동행 하셨음을 간증하셨습니다.
둘째로, 목사님께서 태어나신 때는 우리나라가 점점 쇠하여져서
일제의 탄압이 기다리고, 우리교회적으로는 1904년 세 천사의 기별이
들어오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때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탄압과 6.25동란의 고통을 이겨내고 드디어
중진국이 되고, 우리교회도 모든 고난을 이기고 크게 발전하여
중흥기에 접어들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은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의 산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셋째로, 흔히 역사나 회고록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신의 주관에 따라 쓰게 마련입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의 장점은 과장하고
남의 장점은 과소평가하거나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남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남의 약점을 말하기를 조심하고
자기의 장점을 말하는 것도 쑥스러워 하여 결국 아무
특색도 없고 참고할 만한 것도 별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끝으로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장단점과 남의 장단점도
적당히 언급하기도 합니다.
아마 목사님은 이 마지막 형태에 속하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실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교회와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으나 꼭 필요할 때는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에 확고하셨으나 이 세상의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시고 지혜롭게 살기위해
고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으시는 분마다
영육 간에 큰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끝으로 목사님께서는 청년들을 몹시 사랑하시고 또 청년들을
양성하시는 일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목사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목사님 생전에 사적으로 선물이나 식사대접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 합니다.
2002년 4월
목사 유형환 (전 한국 연합회장-편집자 주)
3. 정 동심 목사의 약력
(*아버님의 약력은 아버님께서 손수 작성하신 것입니다.
아버님의 일기장과 기억력에 의존하셨을 것이라고 추축이 됩니다. )
* 1896. 3. 30. 본적지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386번지에서
부친 정 석문, 모친 이 섭련 씨의 3남, 유복동으로 출생
(음력 2월17일)
* 1907. 4 - 1911. 8출생지 소재 한문 서당에서 한문 공부 수료
* 1910. 6. 안식일 교회 출석 시작
* 1913. 3. 21 .출생지 소재 안식일 교회 소속 진명 학교 제 1회 졸업
* 1913. 8. 15 노설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음
* 1913. 11. 20. 곽치겸 양과 결혼
* 1917. 3. 21. 순안 의명 학교 제 5회 졸업
* 1917. 7. - 1918. 3. 문서 전도에 종사
* 1918. 4. - 1921. 3. 평남 강서군 성태면 대마리 소재 희명 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근무
* 1919. 4. - 1921. 3. 조도전 대학교 교외생 법과 수료
* 1922. 3. 21. 순안 의명 학교 신학과 수료
* 1922. 4. - 1923. 3.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철도리 홍명 학교 교사로 근무
* 1923. 4. - 1924. 4. 평북 의주군 옥산면 좌동, 평남 영유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
* 1924. 5. - 1929. 5. 북간도 삼도구, 투도구, 북간도 용정에서 선교함
* 1929. 6. - 1931. 3 함경남도 원산, 함경북도 청진에서 사역
* 1931. 3. 조선 합회 행정 위원으로 피임됨
* 1933. 2. 10. 목사 안수 받음
* 1934. 6. 북선 대회장으로 피임됨
* 1934. 10. 11 아내 곽치겸 여사 장질부사로 별세함
* 1935. 2. 25. 김병애 여사와 재혼함
* 1939. 6. 중선대회장으로 피임되어 서울로 전임
* 1941. 4. 11. 충남 화강리 교회에서 검거되어 청양경찰서와
홍성경찰서에 수감됨
* 1941. 9. 홍성 재판소 선고에 항고하여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 1942. 2. 19 6개월 징역 선고받음, 항고 기각 당함
* 1942. 8. 19 화강리 교회에서 검거 된지 16개월 8일 만에 출감
* 1943. 4. -1944. 7 서울 위생병원 총무로 재직
* 1944. 8. - 1945. 8. 서울 동대문구 여관 조합 총무로 근무
* 1945. 8. - 1945. 10. 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재건위원으로 종사
* 1945. 10 - 1946. 3 시조사 및 서울 위생 병원 총무로 재직
* 1946. 4. - 1952. 6 원동 지회 부회장으로 피임됨
* 1946. 4. - 1947. 8. 중선 대회장과 한국 연합회장 대리로 근무
* 1947. 9. - 1953. 8 남선 대회장으로 재직
* 1950. 6. 미국 상항에서 열린 안식일 교회 46회
세계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
* 1951. 1. 한국 교회 대표로 원동 지회 총회 참석(싱가폴)
* 1953. 9. 삼육 신학 원장에 취임
* 1954. 4. 한국 삼육 고등학교 교장에 취임
* 1955. 4. -1956. 6. 삼육 신학원 남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
* 1956. 6. 중한 대회장에 취임
* 1957. 12. 영남 대회장에 취임, 원동 지회 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 1960. 1. 한국 교회 대표로 원동 지회 총회 참석-홍콩
* 1961. 6 한국 연합회 재단 이사장에 취임
* 1964. 4. 정년퇴직
* 1964. 5. - 1965. 4 면목동 모의 보육원 교회 예식 담당 목사로 취임
* 1965. 11. 21 자녀들의 초청으로 도미
* 1966. 7. - 1967. 6. 나성 중앙 교회 제 2대 담임 목사로 재직
(본인의 요청으로 자급 사역자로 재직함)
* 1986. 11. 4. 아내 김병애 여사 별세
* 1992. 2. 22 정동심 목사, 안식일 아침 96세로 주안에서 수를 다 하심.
슬하에,
장 남태혁자부임 명신장 녀진실사위김 성래
차 남태영김 기련차 녀충실명 윤수
3 남태중김 학경3 녀제후최 석범
4 남태목김 인숙4 녀정실
5 남태국정 문자5 녀경실
6 남태경
외에 수십 명의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를 두셨습니다.
(*아버님의 글과 녹음해 주신 육성 테잎의 말씀 위에 제 말을 더
첨부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막상 글을 편집하여 올리면서 상당히
예민한 부분들은 삭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아름답지도 못한 투박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동안
칼리포니아에 계신 저희 막내 누님댁에 한동안 거하셨습니다.
2011년 제가 수술을 받은후에 저를 방문하신 막내 누님께서
아버님의 유품을 몇 점 가지고 오셔서 전해 주셨습니다.
그 속에 아버님의 노트북이 한권 있었는데 원래 미주 시조사에
원고를 보내시고 나서 그 원고에 첨부할 글을 더 쓰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녹음 테이프의 내용과 중복되는 글도 있지만 새로운 사실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몸이 회복되면 편집하여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50회에 걸쳐 연재되도록 편집을 했었지만 좀 일직 끝내고 싶어
좀 길게 올려서 33회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께는 매회의 분량이 좀 길었다고 느끼셨으리라 사려 됩니다.
그 점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읍니다.
즐감하였읍니다.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