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씀
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평화교류협의회는 2005년부터 민족 분단의 상징 북위38°선 너머 북한 내 동족을 찾아가 농사에 필요한 우물, 농지작업을 매년 두서너 번씩 도우며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기도하며 실천하여 왔습니다. 2012년을 맞이하여 이 시대의 소망과 이 땅의 백성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작은 실천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합니다.
남북을 화평하게 하는 사업계획과 자원하는 심령을 가진 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를 확인하시고, 여러분의 총의를 모아 다시 한 번 (사)평화교류협의회의 나아갈 길을 여러분께 제시하며 함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평화교류협의회에서는 특별히 이번 총회에서 평화교류상을 마련하였습니다. 제1회 수상자는 고 이석진 장로입니다. 일찌기 이석진 장로는 생활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실천한 분으로 칭송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이석진 장로는 예수님의 눈으로 북한을 바라보았으며, 교회 단위로 북한선교를 위하여 헌금을 하고 새벽마다 북한을 위하여 기도한 분으로서 평화교류협의회는 이석진 장로가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의 정신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보아 이에 제1회 평화교류상을 수상합니다.
평화의 정신이 우리 회원들 삶 속에 실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공동체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위의 인사말씀은 평화교류협의회 2012년 총회 순서지에 올린 말씀입니다. 평화교류협의회는 이후 내부 회의를 거쳐서 제1회 평화교류협의회 평화교류상 수상자를 고 이석진 장로와 정동희 사모의 공동 수상으로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고 이석진 장로의 삶 속에서 정동희 사모의 지지와 성원은 절대적이었고, 새벽을 울리는 기도의 목소리는 두 분이 서로 지지하는 신앙과 성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교류협의회가 지향하는 평화의 개념은 모든 차별, 즉 인종과 성과 문화와 권력 등 그 어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차별을 지양하는 것이기에, 정동희 사모의 헌신과 수고는 칭송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평화교류협의회는 고 이석진 장로가 선구적으로 실천한 교회와 자신의 삶에서의 '1% 헌신'의 정신을 받들고, 그 정신이 우리 모든 교회에 퍼져나가 남북 분단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종의 백성들의 구각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대에,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에 적극 부응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래의 말씀은 고 이석진 장로의 제1회 평화교류상 수상에 대한 축사입니다.
박문수 목사
고인이 되신 이석진 장로님의 제1회 평화교류상 수상과 관련하여 축사를 맡게 되어 감사합니다.
31년전입니다. 강원도 봉평교회에 사경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단독 건물이 없었고, 가정 예배소였는데 이석진 장로님의 댁이었습니다. 그 댁의 방 하나를 잘 정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숙소 바로 너머는 두 분의 안방이었습니다. 첫날 저녁에 가서 집회를 하고 잠을 잤는데, 이른 새벽에 자꾸 소리가 들렸습니다. 장로님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새벽 2시인데, 새벽 4, 5시가 넘도록 간절하게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자세히 들을 수는 없지만, 간절히 울면서 기도하셔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의 전 시간을, 5, 6시간을 계속 기도하시고, 등잔불 켜고 말씀을 보고, 불을 끄고 기도하고, 날마다 쉬지 않고 기도하신 분이 나의 어머니이신데, 봉평교회 사경회를 가셨다가 이렇게 우리 어머니처럼 기도하는 분이 여기계시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하러 교우님이 준비한 음식을 먹으러 봉평면 시내를 이석진 장로님과 걸어갔는데, 봉평시내 가게들이 대문을 열고 어슬렁거리고, 길거리를 쓸고도 하는데, “지도자님 안녕하셨습니다.” “잘 주무셨습니까” 등의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이게 뭐냐 했더니 “제가 새마을지도자입니다.”라고 쑥스러워하시더라고요. 지도자로서 그 동네를 샅샅이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자님, 지도자님” 하는데, 보통 인사나 인사치레가 아니라, 엄청난 복을 받고, 정보를 받고 그래서 우리가 복 받았습니다라는 그런 뜻으로 드리는 인사였습니다. 이 분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하는 말씀처럼 사는 분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새벽에 간절한 기도소리를 들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님은 동포를 진심을 사랑하는 분이였습니다. 일요일에 시작하여 안식일까지 밤낮으로 드렸습니다. 안식일에 투자헌금을 드리는데, 북녘 동포를 위해 투자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턴전도사였을 때였는데, “전도사님, 제가 한국에서 시작하지 않은 일을 하는데, 괜찮습니까. 북측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언젠가는 통일이 될 텐데, 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농사꾼이지만, 벌써 몇 년이 되었는데, 괜찮겠습니까. 몇 년이 됐습니다. 그래서 몇 년째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하”시라고, “너무 기쁘”다고 이야기한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때가 1981년이고, 20여 년이 지난 후, 2001년인가 2년인가 또 봉평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왜 가게 되었냐면, 지금 **에 사는, 탈북해서 와서 사시는 *** 할머니가 두만강 건너 중국 거쳐서 한국에서 거주하는데, 이석진 장로님이 투자하여 모은 돈이 거기로 가서 그 할머니가 혜택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정착하는데 소중하게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를 위해서 오게 한 그 장로님이 보고싶다고 해서 영동교회 담임할 때 교우님들 몇 분하고 같이 갔습니다. 20여 년 만에 만났는데, 교회당도 크게 짓고, 일곱 번 예배드릴 장소를 옮기면서 크게 지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마태복음 27:40~47처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유를 잃고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애절한 마음이 있었습다.
그분이 사 주는 봉평막국수를 먹고, 장로님이 일하시는 장소, 현장을 갔는데, 조립식으로 양철로 덮고 하는 곳이었는데, 옥수수 뻥튀기를 하고 계셨다. 옥수수 포대가 쌓였는데, 많아서 물어보니 150포 정도. 뻥튀기는 기계가 2대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대 튀기지만, 두 대로 튀긴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둘을 돌리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양손으로. 옥수수 좋은 것을 잘 말려서, 구매해서 튀기는데, 1년에 근 1,000 포대를 튀긴다고 했습니다. 1,000 포대면 한 포대가 40킬로그램. 오늘 전화를 드려서 이석진 장로 사모께 전화를 드리니 800포대, 900포대의 양을 가지고 튀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어떤 때는 졸면서 튀겼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들어가는데 한 됫박이니 얼마나 많은 양이겠습니까. 사모님은 운전하여 전국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다니면서 납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평생 살면서 40, 50년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마도 보통 사람들 50, 60년 할 일의 양을 10여 년 간 한 것이 아닌가, 그 양에 해당할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청년 예수님께서 목공소에서 성실하게 일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장로님의 그 모습이 연상이 되어서 떠오르고, 주님의 심정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북녘을 위해 헌신했던 장로님을 소개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일주일간 만났고, 20여 년 후에 만났지만 정말 기분 좋은 기억들입니다.
김동원 목사
동문교회 김동원 목사입니다. 제가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것은 마달피에 북한 선교 모임이 있다고 해서 궁금해서 갔었던 것이 기회가 되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문이 열려질 가망성이 없는데, 어떤 주제를 가지고 그들은 말하는가 궁금해서 참석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석진 장로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일주일동안 사경회를 하신 박 목사님, 일주일 동안은 무슨(모두 웃음^^) 저는 2년 동안을 그분과 함께하였습니다(모두 웃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북한선교에 대한 열망이 있는 이석진 장로님의 봉평교회에 초대목사로 갔는데, 저까지 하나님이 북한선교의 길로 인도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1993, 1994년도에 목회자가 없었던 봉평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예배소같이 인도를 하셨는데, 그 전에 교회로서는 조직이 되어 있었고, 거의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때 장로님 내외분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이 없던 상태에서 평신도 사역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계속 목회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는데, 제가 갔을 때에 3일 전부터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3일만에 제가 부임을 했으니까, 교회를 위해, 저를 위해 얼마나 금식기도를 하시고, 금식기도를 하며 목회자를 받은 교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면(모두 웃음^^) 어떤 분이 있을까요? 너무 감사하고 부담도 되었지요. 그런 인상 속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참석하신 이석진 장로님의 자녀분들, 그때 지혜 양과 현철 군이 아마 초등학생이었을거예요. 지혜 양과 현철 씨가요. 지금 19년, 18년 전 일이니까요.
지금 돌이켜볼 때, 장로님은 이 시대의 노아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강원도 길은 굽이굽이 많이 고불고불하죠. 저는 그 길을 운전하고 갈 때는 예외 없이 중앙선을 넘어서 그 길을 넓게 중간에서 잘 이용해서 갑니다. 그래야 봉고차가 꺾어지지 않고 잘 갑니다. 장로님이 더블캡, 화물차 같은 것을 운전하고 오시는데 한 번도 중앙선을 넘지 않으세요. 그런 분이셨습니다.
야, 원칙으로 가시는 분이시다. 기도를 하실 때는 우리는 쉽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고 쉽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이석진 장로님은 “하하하늘에 계신 이렇게 나오십니다”(모두 웃음^^). 아멘을 할 때도, 다른 이들이 “아멘” 하고 끝난 후에 뒤에서 “아멘”을 하시는 데, 여유가 있어서 그러신지, 성격상 그러신지.^^ 예배 때가 되면 거의 제가 기억하기로는 시골에서 아주 바쁜데, 농번기 때가 되어 일을 하시게 되면 얼마나 피곤한지. 예배 시간에 거의 시간이 늦어도 얼마 안 늦게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장로님은 말씀과 기도로 사셨습니다.
제가 봉평교회에 부임하여 있은 2년 동안에는 박문수 목사님이 말씀하신 뻥튀기 일을 하시기 전이었습니다. 당시 농약가게를 하셨는데,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다 아시지만, 농약을 가져다가 추수하고 추곡 수매가 끝난 다음에 농민들이 돈을 좀 만지게 되잖아요. 농사가 잘 안 되니까 농민들이 농약대금을 못 갚는겁니다. 당시에 “올해 넘으면 빚이 2억이 넘는다”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이 빚지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사업을 접어야겠다”고 말씀하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스도인 양심에 입각해서, 그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빚진 농민들에게 내용증명도 보내고 하셨는데, 이석진 장로님 성격에 빚 안 갚는 분들에게 매몰차게 갚으라고도 못할 성격이셨습니다.
이석진 장로님이 어떤 분인지가 잘 드러나는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는데,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993, 1994년에 당시 무이리 예배소와 봉평교회가 통합을 했습니다. 예배소와 교회가 합친 것이지요. 무이리에는 두 예배소장이 계셨는데, 봉평교회에 이석진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두 예배소장님이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됐는데, 당시 통합할 때 이석진 장로님은 “나는 집사도 못해 보고 그동안 장로 역할을 그동안 했으니 집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마음을 비우신 것이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서번트 리더십이라고 해서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장로님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일이었습니다.
정동희 사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정동희 사모님의 시어머니께서 아마 90세 전후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모시고 계신데, 삶의 무게가 이만저만이 아니실텐데, 연로하신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제 오늘 눈이 많이 와서 오실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큰데요, 오늘 이석진 장로님의 따님인 지혜 양과 아드님이 현철 군이 참석을 하셨는데, 당시 지혜 양에게 그리스도인 교육을 시킨다고 안흥전원학교에 입학을 시켰지요. 당시 안흥전원학교를 열어 자리를 잡아가는 초기였는데, 당시 우리 교회의 소중한 가치를 자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뜻있는 분들이 모여 세운 학교로서 얼마나 귀한 학교인지요. 가까운 봉평에 있는 학교를 입학시킬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교회의 신앙적 가치를 자녀에게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아버지께서 소중히 여긴 삶의 가치가 자녀들의 삶의 여정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두 자녀 분은 아버지의 삶과 기억에 있어서 존경과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리라 확신을 합니다.
이석진 장로님의 삶을 다시 돌아볼 때, 오직 믿음으로 사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시는 것이 넉넉지 않으셨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누구에게 구차한 소리도 않고, 오히려 더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하실 정도로, 제가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습니다. 미리 저에게 이런 시간을 말씀하셨다면, 밤 새워 더 많은 소중한 추억담을 준비했을텐데......
어제 포털싸이트에서 보니 평화교류상을 이석진 장로님이 수상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상은 노벨 평화상보다 나은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지명도가 있는 그런 곳, 발제자가 있고 하는 그런 곳에 매일 간 적이 있는데, 그런 곳에는 2, 30여 분 밖에 없습니다,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참여한 모임 치고는 여러분들이 적지 않은 분들이 오셨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이석진 장로님께서 못하신 일들이 믿음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라 확신하고요, 장로님이 뿌린 씨앗이 있어서, 목사님들이 너댓분 지나가셨을텐데, 그 씨앗이 저에게도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부담을 갖고 열심히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겠습니다.
최창규 장로
2004년 겨울 첫 38선을 넘은 때, 우물 파는 시추기를 가지고 북녘땅 북한주민들을 위해 물을 제공하기 위해 떠날 때, 사람이며 기계며 다 준비 됐는데 출발 경비가 부족했습니다. 십 여 년 전부터 북한 동족과의 ‘1% 나눔’을 교회차원에서 준비하여 왔던 이석진 장로님의 적극적인 지원이 38선을 뚫고 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동족과 ‘1%의 나눔’의 정신이 화평을 이루는 우물물이 되었습니다. 1% 나눔은 사랑의 물로 변신하여 꽁꽁 얼어붙은 금강산 아랫마을 사람들의 목을 적셔주고 있을 것입니다. 우물 판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멀리 남쪽에서 왔다는 사실만 전해 들으며, ‘1% 사랑’의 생명수를 농작물과 같이 마시며 먼 훗날 우물물이 마를 때까지 우물 판 이야기는 전설이 된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 우리는 찾아가서 전설의 주인공이 된 고 이석진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전설은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내고, ‘1% 사랑’은 다시 따뜻한 바람과 같이 북녘 땅 전역으로 실어 나를 것입니다.
전설의 주인공이 된 고 이석진 장로의 하나님과 함께 살다간 아름다운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다시 고인을 추억하며 하나님과 화목했던 ‘1% 나눔’의 사랑도 함께 기립니다.
시간: 2012년 3월 24일(토) 오후 5:00~6:30
장소: 여성행복센터(삼육대학교 정문)
1부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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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김한영 장로 | |
묵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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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
찬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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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2 장 |
기 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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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신 장로 |
설 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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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목사 |
기 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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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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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총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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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명지원 교수 | |
내빈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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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
축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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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원장 |
평화교류협의회 제1회 평화교류상 시상식 | ||
사업보고·비전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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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규 회장 |
사업 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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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고성 농업지원” 김선만 목사 | ||
“IT기술을 통한 북한선교사업구상” |
이종운 박사 | |
“영어를 통한 북한선교사업 구상” |
남주철 부원장 | |
재무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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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도 장로 |
회의 진행 및 임원 조직 |
김한영 장로 | |
총회 동의 | ||
마치는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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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회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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