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 하나로 절망을 쓸어내다
필라델피아 흑인 빈민들의 이웃 이태후 목사
![]() |
▲ 2006년 첫 여름캠프 당시 노스 센트럴의 아이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한 이태후 목사(앞줄 가운데). |
2003년 9월 미국 동부의 필라델피아 북쪽에 있는 흑인 동네 노스 센트럴(North Central).
‘필라델피아의 할렘’으로 통하는 노스 필리(North Philly) 구역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이 흑인 빈민가에
한 동양인이 나타났다. 166㎝의 키에 짧게 깎은 머리, 금테 안경을 낀 이 사내는 골목마다 진을 친 마약상들의
의혹 어린 시선을 받으며 텅 비다시피한 건물의 2층 셋방으로 들어갔다.
몇 권의 책과 노트북 컴퓨터가 든 가방 하나가 이삿짐의 전부였다.
다음날부터 이 동양인은 거리에 나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그리곤 동네 사람들에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흑인들은 이 수상쩍은 동양인의 출현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동양인이 말을 붙이면 흑인들은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동네에 가게가 있느냐.”
이 동양인이 “아니다”라고 답하면 “그럼 템플대(필라델피아의 종합대학) 학생이냐”는 질문을 또 했다.
그래도 “아니다”라고 말하면 “그럼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목사”라고 답하면 흑인들은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스 센트럴에는 흑인 교회들이 몇 곳 있었지만 정작 동네에 사는 흑인 목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
‘평화롭고 안전한’ 외부 동네에 살면서 교회에 출근해 복음만 전파하는 게 흑인 목사들의 일이었다.
이들 흑인 교회 신자들 중에는 돈을 벌어 동네를 탈출한 ‘외지인’들도 많았다. 더 좋은 바깥 동네에 살면서
주말에만 좋은 차를 타고 옛 동네 교회를 찾아와 복을 빌었다. 이런 현실에서 목사가, 그것도 동양인 목사가
‘막장’ 같은 곳에서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이유를 노스 센트럴 주민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美 대도시 동네 중 살인사건 최다
이 동양인은 한국인 이태후(47) 목사다. 서울대 미학과와 서울 성경신학대학원대학과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이 목사는 뉴욕 한인교회에서 7년간 사역을 하다 2003년 노스 센트럴의 주민이 됐다.
그로부터 8년. ‘이 목사(Reverend Lee)’는 노스 센트럴 흑인들 사이에서 “좋은 이웃”이자 “좋은 선생님”으로 불린다.
이 목사가 온 후, 절망이 가득하던 동네에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동네 주민들의 말이다.
이 목사가 지난 8년간 교회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함께 사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여름마다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길거리에서 ‘서머캠프’를 열어줬을 뿐이다.
그런데 마약과 살인으로 황폐해져 있던 동네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지역의 유력 일간지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2007년 8월 9일자 지역 뉴스 섹션 톱기사로 노스 센트럴의 유일한 동양인 주민인
이 목사 스토리를 다루기도 했다. 당시 기사 제목은 ‘거리에서 관용을 가르치다(Teaching tolerance in the street)’였고,
‘일일 캠프가 필라델피아 북쪽 동네 아이들에게 안식처를 만들어냈다(Day camp creates safe haven for North Phila. Children)’
라는 부제가 달렸다.
노스 센트럴은 우범 지역으로 미국에서도 악명이 높다. 주민의 93.8%가 흑인인 이 동네는 빈집이 절반에 가까운 42.9%이고
주민 중 44%가 절대빈곤층 이하 빈민이다. 25세 이하 성인 중 고등학교 졸업자는 불과 32.5%.
을씨년스러운 동네 골목마다 불량스러운 흑인 청년들이 마약을 팔기 위해 진을 치고 있다.
당연히 마약 관련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2003년부터 4년간 미국 대도시 동네 중 살인이 가장 많이
벌어졌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인근의 템플대학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 동네에 들어가지 말라”고 가르친다.
최근 비자 문제 때문에 잠시 서울에 온 이 목사는 주간조선과 만나 “대낮에도 총소리가 들려오고
경찰 헬기의 서치라이트가 동네를 비추는 일이 일상적이었던 곳”이라며 “2006년 필라델피아에서
406명이 살인 사건으로 숨졌는데 그해 8월 이후에만 내가 알던 노스 센트럴 동네 사람 3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제가 사는 동네는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도 딴 세계입니다. 심지어 몇 년 전 필라델피아의 기독교 대학인
메시아칼리지 학생들 50여명을 상대로 제 사역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우리 동네에 와 본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없다더군요. 목회자가 되겠다는 미국 학생들도 ‘거기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는 실정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제 대답은 항상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신변의 위험, 총기 사고, 나를 향한 차별·적개심,
혹은 가난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동네에 들어왔을 때 나름대로 낮아지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웃들과 친해지면서 가끔 불쑥 고개를 내미는 우월감,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등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 속으로
이 목사는 왜 이런 끔찍한 동네에서 살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삶이 성직자로서의 오랜 고민 끝에 결정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무신자인 기자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듯 비교적 평이한 말로 지금의 삶을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죄라고 얘기합니다. 탐욕과 이기심, 무관심, 증오로부터 오는 죄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와 생태계 모두에 고통을 줍니다. 구원은 이런 잘못되고 왜곡된 삶이 조화롭고 평화로운 곳으로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성직자로서 죄의 영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구원이 절실한 곳으로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당초에는 한국에 돌아와 목회활동을 할 생각이었으나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던 곳 바로 옆이
죄가 넘쳐나는 곳이고 가장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현실을 보고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런 선택은 성직자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목사처럼 흑인 빈민가에 들어가 활동하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더욱이 흑인 빈민가에서
흑인들과 함께 사는 한인 목사는 “내가 알기론 없다”는 게 이 목사의 말이다.
그가 흑인 빈민가에 인생을 던지기로 한 것은 미국 흑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와 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흑인들은 많은 인권신장을 이뤘지만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구조적 질곡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기여해온 교회조차 개인주의적인 기복신앙으로 흐르면서
흑인 공동체에 들어가 함께 고민하고 생활하는 목회자가 많이 줄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흑인 동네에는
‘빈민가 허무주의(Ghetto Nihilism)’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 목사는 “미국의 한인들은 이민 초기 상당수가 흑인 동네에 들어가 돈을 벌어 나왔다”며 “흑인들에 대해
한인들도 빚진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 숨어서 지켜봐
이 목사가 노스 센트럴에서 그동안 행한 활동은 어찌보면 평범하다. 이 목사 스스로 노스 센트럴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역이 아닌 단지 좋은 이웃이 되자”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이는 최근의 선교학 이론인 ‘성육신적사역
(incarnation ministry)’을 직접 실천하는 차원이기도 했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선교사는 선교지의 사람과 동일화돼 인간적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스 센트럴에서 이 목사의 지난 삶은 동네 주민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이었다. 그가 동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길거리를 청소하는 것을 흑인들은 관심 없는 척하며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동네 사람들은 조금씩 이 목사에 대해 신뢰를 쌓아갔다. 이 목사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게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내게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지나가면서, 문틈으로, 이삼 층의 창문 뒤에서,
이웃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골목에 널린 쓰레기를 치우거나 눈을 치우면 그 다음날 누군가가 치사를 하곤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사실인즉 누군가가 창 너머로 내다보았고, 그 사람을 통해 입소문이 퍼졌다.
’이 목사는 자신에게 처음 마음의 문을 연 동네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사온 지 3개월쯤 된 2003년 12월 31일
알코올중독에 빠진 아내와 헤어진 제임스가 한밤 골목에서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고해성사 하듯이 30분 넘게 털어놓았다.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얘기를 다 털어놓고는 후련한 표정으로 나를 껴안는 제임스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되겠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40대 중반이 지난 그의 지친 어깨를 감싸안고
그의 버거운 신세를 함께 아파하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이 목사 일기)
이 목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은 물질적 빈곤 못지 않게 대부분 아픈 과거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며
“아이들 대부분은 아버지가 없고, 아이들마다 아버지가 다 다른 경우도 많다.
네 형제의 아버지가 다 다른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차량통행 금지시키고 아이들 뛰어놀게

그가 노스 센트럴 주민들과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계기는 거리에 방치돼 있다시피하던 동네 아이들을 돌보면서부터였다.
여름방학 때 아이들을 돌봐주는 ‘서머캠프’를 차렸다. 돈이 없어 골목길 양쪽을 가로막고 거리에 만든 캠프였지만
노스 센트럴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불어넣어준 이벤트였다. “내가 살던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유버 스트리트
(Uber Street)에서 우리의 동네 반장(block captain) 격인 마이클과 사귀었는데, 그가 여름에 ‘플레이 스트리트(Play Street)’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소개해 주더군요. 방학을 하면 딱히 갈 데가 없는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길거리 차량통행을 금지시킨 후 아이들을 뛰어놀게 한다는 겁니다.
시에다 요청하면 점심도 공짜로 주고요. 뭔가 일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목사는 마이클과 함께 구체적인 ‘서머캠프’ 프로그램을 짜며 돈과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인교회를 돌며 모금을 했고, 자원봉사자를 불러모았다. 첫 ‘서머캠프’를 몇 개월 앞둔 2006년 3월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쳤다. 함께 서머캠프를 준비하던 마이클이 세상을 뜬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54세였던 마이클은 온갖 병을 달고 살면서도 한번도 병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의료보험이 없는 미국 흑인 빈민들에게
아직도 병원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란 걸 절감했다. 장례식장에서 이 목사는 흑인 조문객들 앞에서
“마이클은 내 가족이었다”며 그와 함께 준비하던 서머캠프를 성공적으로 치르겠다는 약속을 했다.
등록 학생 20명과 20명의 자원봉사자로 출발한 서머캠프는 난관도 있었다. 자원봉사자들 상당수가
한인 대학생으로 꾸려지자 동네 사람들 중 일부가 반감을 드러냈다. “한인들이 ‘서머캠프’를 빌미로
동네를 접수해 뭔가 일을 꾸미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품더군요. 우리 동네 리더 격인 한 아줌마는
‘니네들이 뭔데 동네에 들어와서 이런 일을 하냐’며 거칠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믿던
동네 사람들이 설득하고 자기 아이들이 좋아하기 시작하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캠프 거듭될수록 아이들 꿈 다양해져
이 목사에 따르면, 노스 센트럴 아이들의 학력은 상상 이하라고 한다. 고등학교를 나와도 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이 목사는 “방학 때 마냥 놀다가 다시 학교에 나오면 그나마 알고 있던 것들도
다 까먹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며 “그런데 서머캠프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공부를 시키고 먹을 것을 주니
부모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거리에 버려져 있다시피합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거나 교도소에 가 있고,
어머니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는 경우가 많죠. 아버지와 아들이 교도소에서 상봉하고 3대가 함께 교도소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정도 공동체도 파괴된 것만 보고 자라서 자신의 미래도, 인생도 설계할 줄 모릅니다.
아이들이 공부라도 할라치면 ‘공부는 해서 뭐하게? 니가 백인인지 착각하니? 너는 흑인이야(N-word)!’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친구들에게서, 심한 경우는 가족에게서 들어야 합니다. 13살 때 첫 아이를 낳는 여자 아이들도 있고
30살만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공부도 공부지만, 모든 인간은 똑같이 만들어졌다는
자존감과 희망을 심어주는 게 캠프의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캠프가 거듭될수록 아이들의 꿈이 다양해지더군요.
장래 희망을 물으면 힙합가수, 농구선수, 갱스터만 되뇌던 아이들이 소아과의사, 변호사,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아이들이 가장 먼저 꼽는 희망이 대학생이 돼 자기 동네 캠프에 자원봉사하러 오겠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달라지니 부모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술에 찌들어 있던 엄마가 아이들의 숙제를 챙기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던 ‘원군’도 생겼다. “캠프 첫해 동네 마약 두목이 좀 보자고 하더군요.
당연히 시비를 거나 싶었는데, 이 친구가 ‘조카들이 캠프를 너무 좋아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 놀랐습니다.
다음날에는 이 친구가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 아이들 먹이라고 빙과 80개를 비닐백 두 개에 담아 직접 갖고 오더군요.”
동네 갱들의 남모르는 지원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음식을 갖다주거나 돈을 주려는 갱들도 나타났다.
물론 갱들의 돈은 받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2009년에는 ‘폴’이라고 불리는 갱 두목이
캠프를 앞두고 이 목사를 찾았다. 폴은 “걱정 말고 캠프를 열어라. 캠프 동안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호기를 부리더니 한참 뜸을 들이다 “우리 아들을 캠프에 보내도 되겠느냐”고 수줍게 부탁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폴의 아들은 흰색 벤츠에서 내려 캠프에 합류했다. 5주간의 캠프 기간에는 갱들도 자제해서 그런지
동네에서 사건·사고도 줄어든다고 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레버런드 리’를 찾아라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 열린 노스 센트럴의 서머캠프는 지역사회에서 유명해지면서
등록 학생들도 부쩍 늘었다. 20명에서 출발한 등록 학생이 작년 5회 캠프에는 200명까지 늘어났다.
자원봉사자들도 한인 대학생뿐 아니라 백인·흑인 대학생들이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여전히 거리에서 열리지만 프로그램도 다양해져 공작교실이나 버스를 대절해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가는
야외학습도 포함시켰다. 이 목사는 “5주짜리 캠프를 알차게 운영하려면 5만달러 정도가 드는데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면서 꾸려나가고 있다”며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지만 캠프에서는 최고로 대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도시 빈민이나 노숙자들을 위한 사역이라고 하면 끼니를 해결해 주는 무상급식 정도를 떠올리지만
빈민 사역은 자선이 아니다”라며 “가난하다고 값싼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먹는 것, 입는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게 사역의 진정한 의미”라고 강조했다.
독신인 이 목사는 노스 센트럴의 단칸방에서 혼자 밥을 해먹고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의 어두운 과거와 고단한 현실이 주는 아픔,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의 삶과 뒤엉키고 있다.
이제 노스 센트럴의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레버런드 리’를 찾고 기도를 부탁한다.
이 목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 동네 이웃들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골목에서 그들과 얘기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웃들의 아들, 딸, 손자, 손녀 얘기도 듣고, 그들의 꿈과 좌절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가끔 내 이웃들이 내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보살펴 드릴게요.”’
이 목사는 “내가 어디에 머무느냐가 아니라 내가 머문 곳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내가 사는 공동체에 희망을 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