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억지 폭력은 안녕 - 논리야 놀자! (나비)

by 아기자기 posted Apr 30, 2012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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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억지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이버 네티켓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인터넷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구요.

그래서 이런 글 하나 올립니다.

 

흔히 웹상에서 논쟁을 하다보면 여기뿐 아니라 여러 사이트들에서 발견되곤 하는데,

자신의 의견과 다른 글에 대해선 종종 비판적 댓글을 다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다.

당연히 그 글에 대해 비판을 할 수는 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비판은 논쟁에 있어 생산적 기능을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지점은 전혀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구체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상대를 비난하는 폭력으로 나올 때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전혀 예외이진 않다.

종파가 다르고 교단이 다르고 신학적 입장이 다르고 성경 해석이 다르고 그럴 때에 상대를 곧잘 비난한다.

이때 그 비난에 대한 근거가 전혀 부당한 논거에 기반 해 있거나 오해나 착각에 비롯된 경우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구 비난할 경우,

이는 분명하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본다.

특히 사이버상의 경우는 그러한 언어의 폭력성을 매우 둔감하게 느낀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흔히 부당한 논거나 구체적 근거도 없이 다음과 같이 리플을 남기는 유형들이 있다.

 

1. 댓글에 도배를 하는 경우

물론 그럴 수 있다. 혹시 상대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을 경우 계속 반복적으로 얘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구체적 근거도 없이 반복적으로 왕왕거리는 것은 이미 게시판 자체를 흐려놓겠다는 의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하겠다.

 

2. 논의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인신공격을 하는 경우

즉, 자신은 이미 그러한 내용들을 죄다 알고 있는 듯 이미 시시하다고 평가해버림으로써 본문의 논의 자체를 봉쇄하려는 경우다.

만일 정말로 그 자신이 대단히 박식해서 본문의 내용이 시시한 것으로 여겨졌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최신의 정보들을 소개해주면 될 것인데,

그것도 아니면서 글 내용 자체를 폄하해버린다면 이는 매우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작태일 뿐이다.

알고 보면 이런 사람들 역시 별 것 없는 속 빈 강정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은 누워서 침뱉기이다. 자신의 교양 없음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한다.

이런 이들과는 대응을 자제하는 편이 좋다. 토론에 진정성이 없어지고 감정만 상한다.

 

3. 성경절을 남을 저주하는데 인용하는 경우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 믿는다면

성경 말씀을 남을 저주하는데 사용하지 말라.

성령께서는 당신의 저주를 수행하는 악령이 아니다.

오히려그 저주가 당신에게 돌아감이다.

신성모독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사랑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다.

타인을 축복하고 위로할 때 만 성령의 능력이 같이 하여 그와 당신에게 새생명을 줄 것이다.

 

4. 그냥 욕을 하거나 비하해 버리는 경우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라도 입이 험하도록 욕도 한다.

물론 만일 그 근거가 있고 주장이 타당하다면 간혹 욕이 나올 수 있다.

나 자신은 여기까지도 충분히 이해해 줄 수도 있다고 본다.

누구말대로 욕이란 타이밍의 예술이니까! ^^

예컨대 우리는 히틀러나 전두환 같은 이를 욕하기도 하잖은가.

 

성경에서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쏘아 붙일 때는 거기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도 함께 녹아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 자신이 여기서 문제 삼는 지점은 정작 아무런 근거도 없고,

논리도 없이 그냥 마구 욕만 해버리는 경우,

이런 경우는 분명 상대방에게 엄청난 폭력이 된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한테 정당하지 못하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상처를 주어선 곤란하지 않은가!

 

신앙과 합리성을 별개로 놓고 보지 말라!

그렇다고 논쟁 자체를 그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논쟁은 생산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모든 글에는 기본적으로 감정이 안 들어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방법은 가능한 이성적으로 상대방을 대할 것을 부탁드린다.

논리적 정합성으로서 글을 쓸 것을 권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앙은 논리를 넘어서지 않느냐고 말이다.

맞다. 궁극적으로 신앙은 논리를 넘어선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신앙은 논리적 합리성을 배제하면서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포하면서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감성'만 주신 게 아니라 '이성'도 주시긴 주셨잖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철저히 논리적 합리성을 지향하는 태도는 궁극적으로 신앙을 지향하는 것과도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 관건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항상 열어두면서 논리적 합리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자신이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자신의 한계 역시 전제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는 논리적 합리성이란 언제나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논리적 합리성을 의미한다.

어차피 모든 이론들 간의 경쟁은 세계 안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그 <정합적인 설명력>의 차이에서 결판이 날 뿐이다.

 

그 옛날의 초라한 <지동설>이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위세를 떨쳤던 <천동설>을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바로 <설득적 합리성> 때문이다.

진정한 권위는 학력이나 재력이 아닌 궁극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합리성>에서 나오며,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굴복되는 것이다.

논리의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 안에 예증되는 그 합리성은 실상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다.

 

흔히 신앙을 부르짖는 사람들 중에 논리나 철학은 신앙이 아니라면서 이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볼 때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웃기는 얘기다.

신앙은 우리 삶의 모든 제반적인 합리성들을 꿰뚫고서 궁극적으로 신비에까지 이르는 것이지,

그것과 별개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말은 자신의 논리적 부실함과 무지를 정당화시켜주기 위해 고안한 용어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이었고, 전혀 비논리적이었단 얘긴가? 아니잖은가!

그것은 이미 논리마저 꿰뚫고서 넘어서는 것이지 논리와 충돌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적인 것일수록 논리적이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기초다.

이때 아무리 논리적 정합성을 유지하더라도 그래도 거기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소진함이 있을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요구된다.

이성적 논리의 끝에 신앙적 믿음이 있고, 진정한 믿음의 시작에는 이성적 논리가 있다.

그 지점부터는 머리 뿐 아니라 뜨거운 마음까지 담아보라.

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신앙으로서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기독교의 문화적 기제들 가운데는 이성적 장치보다 정서를 흥분시키는 감성적 장치들이 더욱 많다.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고픈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성에 기반하지 않은 감성이란 한낱 감상주의나 열광주의에 빠질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광적인 방언이나 기적을 강조하는 그런 집회라면 차라리 독서토론이나 세미나가 낫다고 하겠다.

 

가장 좋은 것은 이성에 기반한 감성적 장치로서의 문화적 기제가 가급적 좋다고 본다.

물론 누구 말대로 진리는 소박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함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다.

말뜻 그대로의 <단순함>과 <복잡함을 거쳐서 나온 단순함>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우리가 추구할 진리로서의 단순함이란 바로 후자에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거기에 <깊은 우러나옴>이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진리는 복잡한 이 우주에 대한 합리적 통찰을 연마하고 거쳐서 영롱하게 솟구쳐 나온 단순함이지,

무턱대고 튀어나온 그런 단순함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깊고도 오묘한 것이리라!

 

다음은 논쟁(혹은 토론)의 기술에 대해서이다.

 

우리나라(한국)는 토론 문화가 잘 발달치 않아서인지

학문적 논쟁에 있어서도 매우 미숙함을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학문이 발달한 나라들을 보면 토론과 논쟁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을 만큼 많이 발달되어 있고 열려 있다.

 

특히 한국은 <논리적 차원>과 <인격적 차원>을 잘 구분하지 못하여

상대방에 대한 논리적 공격을 일종의 인격적 침해로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종종 감정싸움으로 까지 번져나가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로 공식적으로는 조심해하며 몸을 사리는 경향도 없잖아 있다.

 

물론 동양사회에서는 인지상정의 관행들이 더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서로의 입장과 견해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웬만해서는 서로에 대해

논쟁적 토론을 잘 안하려 들거나 아니면 그냥 회피 또는 뒤에 숨은 채로 곧잘 무시하는 편이 많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대학이나 학문이 발달한 나라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논리적 차원>과 <인격적 차원>은 철저히 구분되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 나라의 논쟁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만큼이나 열기 있고 활발하다.

그리고 가까운 동료 교수나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토론 논쟁은 매우 치열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곤 하지 않는다.

 

물론 서구학계라 해서 감정싸움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동양사회보다는 그러하다는 얘기다.

토론(논쟁)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해두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그것은 평행선이나 독단의 망조로 나가기 쉽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기부정>까지도 받아들일 줄 알면서 끊임없이 자기검증을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구하려는 진정한 자세가 아닐는지.

그럼으로써 점점 더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비판에도 단련되어 있는

굳건한 진리를 향해 점근선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오류와 반성이야말로 그 자신을 성장시키는 가장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나 자신조차도 오류가 날 수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종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MT 16)라고.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 자신들은 모두가 진정 열려 있는 사람인가.

하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감정과 정서다.

이를 위해선 감정처리 문제도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할뿐더러

토론의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 역시 필요할 것으로 본다.

물론 논리를 연마하는 내공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지진 않을 것이다.

꾸준한 실력 배양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토론의 즐거움과 재미를 새삼 발견하고 이를 즐겨보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토론의 실력은 더욱 빠르게 늘 수 있다.

 

이때 무엇보다 잊어선 안 될 지점은,

자기 오류를 발견했을 때는 즉각적으로 겸허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지적해 준 상대에 대해선 충분히 이를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자신이 독단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을뿐더러

그럼으로써 더욱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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