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나잇의 불 같은 정열의 생애

by OH posted Nov 29, 201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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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같이 열령했던 간호원 안나 나이트의 생애( 술장사꾼둘도 이기다)

 

새벽별호

 

1898년 미쉬시피 주에서 재림교의 사역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 빅스버그에서 배의 선장인 에드슨 화잇과 그의 모친 엘렌은 새별별( Morning Star )이라는 와륜선을 가지고 자유의 몸이 된 노예와 소작농에게 봉사를 베풀었다.

선상에서 강연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인쇄기가 있어 에드슨 화잇의 책 오시는 왕( Coming King )”

75,000부를 인쇄해 팔아 남부 사역에 기금을 보태기도 하고, 작물에 대해서도 가르쳤으니,

목화 농장의 흑인 농부들에게 땅콩, 딸기, 도마도, 양배추를 키워 토질을 좋게 하고 닭을 키우고 양봉을 하여 자급 자족을 하도록 인도하였다

새벽별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역은 미시시피 전역과 남부 전역으로 펴져 나갔다

 

 

안나 나이트

 

새벽별호의 봉사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 흑인 노예의 딸인 안나 나이트가 있었다

 

( : Anna Knight 의 사진을 여기 실리지 못하나 그가 간호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E. G. White 부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얼굴이 그다지 검지 않아서라기 보다 재림 신앙인이면 다 예수님을 닮아서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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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독학으로 글을 익혔고, 어느날 재림교회에서 배포한 소책자를 받아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읽는데 그치지 않고, 즉시 그 책자를 보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 받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진리를 다 배우게 되자, 마침내 그들은 그녀에게 침례 받고 입교하라고 권하였다

수침 후 그들은 안나가 미쉬간주 베틀크릭에 있는 삼육 학교에 다니도록 주선해 주었다

 

거기서 그녀는 공부를 아주 잘하여 산업 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898년 의료선교사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었다

 

그 대학 학장인 죤 하비 켈록은 안나가 미시시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선교사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하고 있하는 것으로 여기고  미시시피로 돌아가는 차비와 간호사 제복을 주고 자기가 지은 생리학 과목 책 중 안나가 필요로 하는 모든 책을 다 주어 보냈다

 

안나는 고향 미시시피로 돌아가자 자기 삼촌의 농장에 있는 통나무 집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올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는 학교였다

 

몇달도 채 되지 않아 인원이 많아져서 학교를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겼는데 그 건물의 건축 감독은 그녀가 직접 하였다. 8개 학년으로 나누어 학생 24명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일요일 학교를 찾아다녔다

 

거기서 베틀크릭에서 성경 골부반을 했던 경험과 전인적 복음 봉사라는 선교 철학을 바탕으로

성인들에게 글씨 쓰기, 읽기, 산수, 요리를 가르쳤다

그녀는 특히 운동과 절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나중에 그 때의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 사람들에게 도표를 보여주며 술을 마시면 심장과 간, 콩팥 및 기타 다른 장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면 사람들이 겁을 먹고 밀주를 사지 않았다."

 

그 일이 확산되자 백인 밀주업자들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 금주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학교를 열지 못하게 하갰다."

 

그것은 단순히 학교를 열지 못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생명의 위협이 될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나 나이트는 답장을 보냈다

 

" 당신들이 총을 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니도 준비하고 있겠어요."

 

그녀는 말 타는데 탁월한 기수였으며

당시는 누구나 총을 쏘던 시절에 총 쏘는데도 아주 특출난 명사수였다.

그녀는 아주 빠른 말을 사고 연발 권통과 엽총을 준비하여 가지고 다녔다

"( ; 그녀가 사람을 쏜 일은 없었지만 아직 재림교에 집총 안하는 교리는 확정되기 전인듯 )

 

드디어 한번은 그가 말을 타고 달리는데 백인 밀주업자들이 그녀를 향해 총을 발사하였다

그 때 그녀는 말의 목 밑으로 몸을 숙여 총알을 피하여 위기를 모면 하였다

 

이런 위함한 일에도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일을 끝까지 하기로 결심하였다

밀주업자들에 대한 경고용으로 학교의 한족 구석에 엽통을 세워 놓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술의 해악을 강의하였디

또한 매일 책과 총을 직장까지 가지고 다녔다고 진술하였다. 나중에 그녀는

 

" 적들은 내가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고 더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켈로그 박사 주선으로 그녀는 1901년 베틀크릭에서 열린 대총회에 투표권이 있는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 그 대총회에서 재림 교회가 현대적 체계로 재조직되었다. )

 

그녀는 대총회에서 미시시피 주에서 벌리는 사역을 보고하였다

그 보고를 들은 대총회에서는 그를 인도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총회의 지시는 그녀에게 심한 갈등을 겪게 만들었다  그것은 미시시피에서 하던 일을 목숨까지

걸 정도로 하나님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하였고 아주 사랑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외국에도 봉사해야 한다고 믿고 대총회의 지시를 따라 미시시피 고향에는 가보지도 않고

친척들에게 학교를 부탁하고 곧 바로 뉴옥으로 가서 인도행 기선을 탔다.

 

그래서 1910 년 안나 나이트는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인도에 파견된 최초의 흑인 여성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가는 곳마다 재림교인이면 누구나 하는 일을 하였다

 

" 여러 분야에서 일을 했다."

 

라고 그가 적었듯이, 이를 뽑고, 부스럼과 종기를 칼로 째고, 꼬매고 선교 활동을 감독하였으며

성경을 가르치고 영어반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문서 전도를 하여 집집을 다니며 예언의신을 팔았다

 

또 농사 짓는 법도 가르쳤으며 "카르마타르" 라는 지방에서는 땅을 윤작도 하도록 가르쳤더니

인도인들은

 

" 글쎄요, 미국에서는 괜찮은 방법인지 몰라도 인도에서는 소용 없어요."

 

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윤작을 시키고 어린 수 송아지를 사서 좋은 미국 쟁기에 소를 묶고 갈아서

순무, 칼리플라워, 도마도, 비트등 여러 채소를 심어 그런 채소을 어떻게 기르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기록은 그에 대해서

 

" 채소를 걷어들였는데 이는 카르마타르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라 하였으니 그것은 굉장한 풍작을 거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안나 나이트는 교회와 의료기관과 훈련학교를 세우고 인쇄기를 갖추는,..

카르마타르를 발전 시켜 그곳을 제2 < 베틀크릭 >으로 만들었다

(  :베틀크릭은 옛날 재림교 본부, 병원, 시조사, 삼욱 학교가 있던 곳 )

 

그후 미국에 휴가를 갔는데, 미시시피에서 밀주 만들어 파는데 이권이 개입된 사람들이

그녀가 세운 학교를 폐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미시시피로 가 이번에는 아예 고향의 중심부에 학교를 다시 열었다

1909년에는 그 아끼던 학교를 동생에게 인계하고 조지아주 애틀란타로 이주하여

 

Y W C A 에서 야간 학교를 운영하며 응급 치료와 가정 간호를 가르치고

건강에 관한 일요일 학교 강연을 시작하였다

 

Y W C A 와의 인연는 원래 인도에서 시작하였으니 복음과 건강 교욱을 접목한

그의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은 Y W C A

그의 가르침을 전국 프로그램의 모델로 쓸려고 검토하여 결의하였다,

 

말년에 안나는 합회와 연합회에서 일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932년 남부연합회의

가정선교사, 선교사 지원자, 교육부 부서기로 선출되었다

또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갈 것도 강조하였다

 

1972 98세로 운명할 당시까지도 그는 전국 유색인 교사 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었다

안나 나이트는 사회 개혁에 관여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

사회 개혁 분야에서 재림교의 영웅이 되었다

 

압제적인 제도 속에서 스스로를 던져 사람들을 질병과 무력함에서 해방시켰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눈물을 씻기고 질병과 죽음이 없는 미래의 찬란한 도시가

정말로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재림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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