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뱃길로 한참 가다 보면
포구 깊숙한 섬 하나 를 만나게 되는데
행정상 통영군 에 속하지만
그 섬의 문화는 매우 독특하고 자립심 과 창의적 기질이
강하여 그곳 사람들 자존심 또한 대단하다.
아마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면
도태 될수밖에 없었던 환경 교육이 그랬고
또 더 이상 물러설곳이 없다 는 지리적 여건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곳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 나 그 방법을 상.농어업 으로 분리하여 실행 하는것이 아니라
시간,계절,장소 를 묶어 언제던 연결해 응용했고
실제적 교육과 자격을 확인 시키려는 열의 또한 대단 했다
아마도 절해의 작은섬 치고 그곳처럼
제도 학부 출신과 전문인 을 많이 배출 시킨곳도 드물상 싶다.
실제로 인근 큰 항도 에도 없던
그 시절 대 규모의 얼음공장 과, 산물인 전분공장, 그리고
어업협동조합 의 넓은 공판장 에는 수시로
산더미처럼 쌓여 선별을 기다리던 고등어 무더기.
바람만 조금 거세게 불어도 포구에 꽉 차이도록
고깃배가 닻을 내리고 거리는 활발하고 풍요 로웠다.
이런곳에
한쪽 해변길을 빙 돌아가면
"자부포" 라 불러지는 마을 하나가 있는데
왜정시대 뱃 사람 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걸로
지금도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 시절 유리창 많은 목조이층 건물 이 많았다.
우리동네 할머니 말로는 그 마을에는 각시귀신들이 우글그리고
밤낮으로 뱃넘들 간을 빼먹는 곳이라 했다.
"집창촌" 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집창촌 을 내가 열두너살 부터 출입을 한것이다.
이 섬에 안식일 교회 가 시작 되면서부터
하필이면 그 집창촌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동목욕탕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로 만들어 예배 를 드렸기 때문이다.
장노교 3대째 집안에서 참으로 곱게 교육된 나 였지만
이 어린 나이에 매주 3회씩 그 집창촌 을 드나들어서니...
해 질녁 불그래한 바닷빛 노을과
유리창 넘어 남포등 불빛 흔들리는 집창촌 안에
반쯤 벗은 여자와 덥수룩한 굴레수염의 검은 뱃 사람
간드러진 엘레지 유성기소리와
우리가 악을쓰듯 "내 주님 오시리 확실히......." 의 찬미가 함께 뒤엉키던
묘하고 혼돈 스럽던 어린시절의 그 예배 를
아무리 지식 경험이 풍족한 이 시대 삼천포 어른 이나
국제적 ㅇ님 인들 어찌 속속들이 이해를 하시겠는가 ?
거칠은 뱃사람들의 무자비한 욕설과 폭력앞에 던져졌던 집창촌의 여자,
밀 보리 읶어가던 언덕에 그렇게 울고섰던 집창촌 여자,
칠흙 같은 밤바다에 몸을 던저 버렀던 집창촌 여자.
뱃전에 도다리처럼 개맞듯이 맞아 늘어젔던 집창촌 여자.
한과 악과 버림과 빼앗김과 포기로 실신하여 해변을 돌던 그 집창촌 여자.
그런 집창촌을 만들어서 굴레를 씌운자 나
그런곳 을 드나들며 더럽고 상스러운 욕구를 풀어놓는 자들의
그 참혹한 거리에서
주님 오시라고 무럽꿇고 기도하던 어린시절의
그 시간이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도
여전히 "albinoni 의 adagio-gminor 보다도
더 허무한 이 서글픈 부름으로
신앙집창촌이란 언저리에서 오늘도 우리들은
머리와 가슴 다른 형제들로 머물어 서서
서로 를 이렇게 바라 보면서
제 각기 다른 가사로 각기 다른 곡조로
신앙이란 노래 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