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수’를 제대로 잡았다는 눈치다. ‘보수신문’들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건을 보도하며 기어이 색깔론을 꺼내들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 통합진보당 내 ‘당권파’의 패권적 대응을 주로 문제 삼던 것에서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조선일보는 7일자 5면 <낯선, 국민에겐 너무 낯선 진보당 장악세력>에서 “통합진보당이 그동안 당 운영 및 비례대표 부정선거 문제 처리 과정에서 보인 말과 행동은 상당 부분 일반인의 상식과 거리가 멀다”고 운을 뗐다. 이어 “민주적 절차보다는 당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여기까지야 충분히 수긍할 만한 비판이다.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이 같은 비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다. 조선일보는 “1980~90년대 운동권 주사파의 용어, 우리 정당에선 보기 힘든 생소한 이름표 들기 투표와 집단 박수·울음 등의 행태들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드러난 (통합)진보당의 말과 행동, 사고방식은 우리 국민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지적이 많다”고 덧붙였다. 당권파의 의사진행 방해나 ‘버티기’ 등 민주주의 원칙의 파괴행위를 문제 삼은 게 아니다. 이들이 ‘북한을 닮았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 7일자 5면.

이 신문은 ‘당원증 들기’ 투표를 도마에 올렸다. 통합진보당 운영위원들은 지난 4~5일 회의에서 이름이 적힌 당원증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투표를 진행했다. 조선일보는 “북한 노동당이나 중국 공산당이 주요 회의에서 거수 대신 당원증을 들어 의사표시를 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북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했다. 또 “당원들은 마치 약속한 듯 팔을 높이 들어 열정적으로 집단 박수를 쳤는데 그 모양새가 북한과 비슷하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보도했다.

조선은 이어 “당의 주요 인사들이 자주 쓰는 ‘동지’ ‘통일전선’ ‘노선’ ‘혁명’ ‘척탄병’ ‘세작질’ 등은 주사파들이 즐겨 쓰던 용어”라며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인) 남북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종속적 한미동맹 해체 등은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이 주장한 내용”이라거나 “국민이라는 말 대신 ‘민중의 (의사결정) 참여 확대’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도 문제 삼았다. 그러니까, 단순히 낯설어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대놓고 ‘북한을 닮았다’는 조소를 날렸다. 이 신문은 7일자 사설에서 “NL계 당권파는 자신들끼리 똘똘 뭉치는 폐쇄성이 강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직문화가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여기까지야 일리 있는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민주적 절차를 외면하는 행태는 북한을 빼닮았다”는 다음 문장이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비민주적 행태가 ‘북한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 동아일보 사설

이 신문은 5면에서 ‘일심회 간첩단 사건’을 꺼내들기도 했다. 동아는 “경기동부연합이 옛 민주노동당 NL계 핵심 인사들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일심회’ 간첩단 사건의 판결문에 적시돼 있음이 6일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2007년의 판결문을 새삼스레 꺼내들며 김제남·이상규 당선자의 언행 등을 지면에 옮긴 이유는 단 하나다. 이들 당권파가 북한의 지령을 받는 ‘종북세력’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으로 호명되는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문제인 이유는 이들이 ‘주사파’여서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 당권파의 패권적 행태와 비민주적 태도다. 물론 이 같은 태도가 ‘북한을 닮은 것 아니냐’고 되묻거나, 혹은 ‘북한을 추종하기 때문에 닮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일부 사실에 부합하는 대목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만 아니라, 중요한 질문을 은폐한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질문 말이다.

이들 신문들이 마음껏 ‘북한을 닮았다’는 식의 공세를 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종북행위’가 현행법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물론 국가보안법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쥐고 있는 세력들은 ‘종북세력’일 뿐만 아니라, ‘불법세력’이다. 원내 제3정당으로 발돋움 한 통합진보당은 “‘지하당’ 같다”(동아일보)는 표현에서 보듯, 일반인의 상식과 거리가 먼 ‘국가 전복 집단’이나 다를 바 없다. 교묘한 ‘물타기’가 아닐 수 없다.

당권파의 패권주의와 비민주적 행태는 이들이 ‘북한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랫동안 진보진영을 양분해왔던 이들 NL(민족해방)계열 당권파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동아일보의 표현대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한” 세력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비판만 받아왔던 게 아니다. 이들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실제로 ‘처벌’의 대상이었다. 구속은 물론, 일상적인 감시와 수배를 견뎌야 했다.

   
▲ 조선일보 5일자 사설.

“자신들끼리 똘똘 뭉치는 폐쇄성”과 조직 보호의 논리를 앞세워 “민주적 절차를 외면하는 행태”는 그 역사적 경험이 남긴 ‘상처’다. 이들에게 권력이나 조직은 ‘생명’의 문제였다. 국가보안법은 이들의 신체와 삶을 구속하는 구체적인 ‘현실’이었다. 이들은 그럴수록 더 똘똘 뭉쳐야 했고, 조직을 보호해야 했다. 사상의 자유를 빼앗긴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숨어드는 것’이었다. 그 실존적 공포 앞에 민주주의도 함께 질식사 했다. ‘괴물’은 그렇게 탄생했다.

보수신문들이 다시 색깔론을 들고 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들은 당권파가 국민 여론의 압박으로 ‘정리’되길 바라지도 않고, 그렇게 될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공세를 강화할수록, 당권파는 더 강하게 뭉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특히 색깔론이라는 무기가 이들의 ‘상처’를 자극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들 보수신문이 사태 해결을 위해 충고를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더 버티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더 버티라’는 주문 속에는 나름의 계산이 담겨 있다. 민주통합당과의 야권연대를 흔들고, 대선까지 공세를 이어갈 수 있다면 보수신문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진보당’이라는 약칭을 써가며 진보진영 전체를 싸잡아 위험세력으로 매도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과 여권의 실책이 은폐되는 효과는 ‘덤’이다. 국가보안법에 기생해 나름의 권력과 지분을 확보해 온 또 다른 ‘괴물’이 실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다시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권파의 ‘종북사상’이 문제라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그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물으면 될 일이다. 남북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종속적 한미동맹 해체 등 통합진보당의 공약에 숨겨진 ‘반국가적 사상’을 애써 추측해 고발하고 처벌할 게 아니라,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국민의 지지 여부를 물으면 그만이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간첩행위’는 어떻게 하냐고? 형법 98조로 처벌하면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당권파의 행태’는 국가보안법의 비극적 산물이다. 이를 소재로 ‘색깔론’을 들이대며 음흉한 계산기를 눌러대고 있는 보수신문들 역시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의 결과물이다. 북한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 함으로 진보의 미래를 발목 잡는 것도 국가보안법이다. 누구든 자유롭게 말하고, 민주적으로 토론하면 될 일이다. 사상에 ‘불법’ 딱지를 붙이는 순간, 그 사상의 옳고 그름은 토론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남는 건 ‘폐쇄’와 ‘퇴보’ 뿐이다.

   
▲ 조선일보 7일자 38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건 그래서 조선일보 류근일 전 주필의 표현대로 ‘야당 먹고 대한민국마저 먹을 채비를 하고 있는 NL’의 탄로 난 ‘체제 전복 작전’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이 낳은 두 개의 ‘괴물’이다. 국민을 겁박하면서 한결같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겨 온 세력과, 국가권력의 억압과 탄압의 대상은 되었을지언정 단 한 번도 국민과 소통하거나 검증받지 못했던 세력의 ‘맨 얼굴’이 불현듯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012년에 와서 곱씹어 보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다.

   

▲ 중앙일보 7일자 36면. 중앙일보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처럼 노골적인 색깔론을 제기하는 대신, 남윤호 정치부장의 칼럼을 통해 '진보의 상식'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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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의 남한 적화(?)가 가능할까?

한 번이라도 그런 꿈을 꾼 사람 있는가?

어떤 여인이 꾼 개꿈 같은 것 아닐까?


진보의 논리를 믿는 나도 그런 것은 못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