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이란 것이 다......
누가 10:25-37
곽건용 목사
불량품 스위치가 맺어준 인연
한 아랍 청년이 사람들로 붐비는 텔아비브(Tel Aviv)의
어떤 시장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는데 그런 척하지 않으려는 데서 오히려 뭔가 중요한
일을 시도하려 한다는 사실이 엿보입니다. 그는 오른손을 왼 소매 안에 집어넣고 두 눈 꾹 감고 스위치 같은
것을 누릅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스위치가 불량품이어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생명을 건 자살테러도 이렇듯 하찮은 실수로 그르치기도 합니다.
청년은 자기가 살아남는 상황은 대비하지 않았으므로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그는 텔아비브의 유대인 지역 안에 있습니다. 그는 일단 시장을 빠져나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스위치를 고치러 수리점에 갔습니다. 수리점 주인은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인데 스위치를 고칠 수는 없고 똑같은
걸 주문해야 하는데 며칠 걸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연고자 하나 없는 곳에서 며칠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를 그곳에 보낸 테러단체는 뉴스에 폭발소식이 보도되지 않자 그에게 전화해서 다음날 오전까지 실행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합니다. 청년은 다음날은 안식일이라서 아무도 시장에 나오지 않거니와 스위치를 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해서 실행날짜를 하루 미룹니다. 그의 몸에 장치된 폭탄은 제거하면 자동으로 터지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씻지도 못하고 옷도 벗지 못합니다. 그는 수리점 지붕에 물이 새는 걸 보고 재워주면 그걸 고쳐 주겠다고 제안했고 주인과 합의가 되어 지붕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주인 아내가
자살하려는 광경을 우연히 보고 그녀를 설득해서 자살을 포기시킵니다. 남편에게는 물론
비밀로 하고 말입니다. 이래저래 그는 주인 내외와 친해져서 저녁까지 얻어먹는데 주인은 그가 누구란 걸 잊어버린
양 술이 취해 자기 과거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일면식도 없던 세 사람은
그렇게 가까워집니다. 청년이 거기 처음 왔을 때부터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리점 건너편에서
작은 매점을 하는 젊은 유대인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옷도 야하게 입고 문신과 피어싱도 한 신세대 여자였습니다.
청년은 여자가 몇 명의 남자에게 괴롬당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도와주어 그녀와 가까워집니다. 그녀는 혼전임신을 했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난 여자였습니다. 청년은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물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테러단체 요원은 청년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보고 원격조종장치로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통보합니다. 마침 그때 청년은 유대인 여자와 같이 있었는데 폭탄이 터지면 그녀가 죽을까봐 갑자기 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고 여자는 그는 따라 뜁니다. 그가 따라오지 말고 소리치지만 그녀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는 나무에 올라가 폭탄이 터지기를 기다리지만 폭탄은 터지지 않습니다. 본부에서 더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폭파시간은 일요일 오전 8시로 정해졌습니다. 그는 토요일 밤을 해변에서 그녀와 함께 보내고 그녀가 잠자는 사이에 일어나 붐비는 시장으로 갑니다. 막 8시가 되기 직전, 그가
만반의 준비를 마쳤을 때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 돌아보니 수리점 주인이었습니다. 청년에게 말을 붙이며 다가가는
그에게 청년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외치지만 막무가내입니다. 주인은 그가 뭘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를
막아보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장면은 바뀌어 유대인 여자가 잠에서 깨어나 청년이 없음을
보고 시내로 향해 걷는데 시장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립니다. 청년이 스위치를 눌렀는지 아니면 본부에서 원격조종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폭탄이 터져 청년과 주인 그리고 수십 명이 죽습니다. 죽기 살기로 할 일은 아닌데......
이 영화는 <나의 아버지를 위하여 For My
Father>라는 제목의 이스라엘 영화입니다.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가 있지만
제가 하려는 얘기와는 별 상관이 없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제게 몇 가지 생각할 점들을 던져주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외모로 유대인과 아랍인을 구별할 수 없었는데 아마 그들끼리는 쉽게 구별되는 모양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아랍인인지 첫눈에 알아보고 경계합니다. 특히 경찰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그를 잡아넣으려 하지만 몇몇 유대인들 덕분에 체포도 면하고 거기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가
아랍인이 아닌 듯이, 또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듯이 행동합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유전자는 유대인과 한국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비슷할 텐데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원수지간으로 만들었을까를 새삼 생각해봤습니다. 아랍 청년은 유대인들을 죽일 목적으로 거기에 갔습니다. 영화에서 테러단체
사람이 청년에게 “오십 명의 유대인을 죽이고 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고 말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서 몇 명의 유대인을 알게 됩니다. 하루 동안의 만남이었으니 서로
깊이 알게 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의 만남과 앎만으로도 그들은 서로를 염려하게 됐습니다. 참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청년은 유대인 여자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써서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했고 수리점 주인은 청년이 뭘
하려는지 알면서도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저는 무엇이 서로 원수지간인 이들을 이렇게 ‘인간적’으로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요즘 한국말에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벼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자’와 ‘죽자’의 라임(rhyme)이지요. 그냥 한 번 웃자고 한 말인데 그 말을 심각하게 듣고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주위의 많은 갈등과 분쟁이 ‘웃자고’까지는 아닐지라도 ‘죽자고’ 한 일은 아닌데 거기 목숨 걸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기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물건일 수도
있고 무형의 가치일 수도 있는데 남이 그것을 건드리거나 빼앗으려 하거나 하찮게 여기면 ‘죽자고 달려드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정말 죽기 살기로 매달릴 만한 것인지, 꼭 그래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며 소중히 여기는 걸까요? 또한 소중하다고 해서 꼭 그렇게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하는 겁니까? 아랍 청년에게 유대인을 죽이는 일은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량 스위치 덕분에 유대인 사회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사람’을 봤습니다. 이전에 이 아랍 청년은 유대인에게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죽여야 할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유대인 지역에서 이틀을 지내면서 거기서 ‘사람’을 보았던 것입니다. 어느 영화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사형집행인 얘기를 그린 한 영화에서 한 사형집행인이 “사형당하는 사람 눈을 보지 말라.”고 후배에게 가르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만일 눈을 보게 되면 후에도 죽은 사람이 계속 떠오르고
생각나서 견디지 못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세상일이란 게 참 묘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화와는 반대로 우연한 계기로 유쾌하게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손택수 시인의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이란 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이
시를 접하고 일주일 내내 시를 생각하며 많이 웃었습니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라는 율법은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마태 23:23)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박하, 근채,
회향의 무게를 달아서 그 중 정확하게 십분의 일을 떼어내는 데 온갖 신경을 다 쓰는 사람들이랍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데에 목숨 걸다보니 정작 중요한
정의, 자비, 신의 같은 가치들은 무시해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데에 신경을 과도하게 쓰다보면 ‘사람’이 안 보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의,
자비, 신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러한 중요한 가치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가치들에 목숨 걸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통에 정작 소중한 가치들이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비유’란 본래
죽기 살기로 읽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느닷없는 뒤집기가 있고 풍자가 있습니다.
비유는 죽자고 읽을 게 아니라 웃자고 읽는 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반쯤 죽게 됐습니다. 그 곁을 제사장 한 사람이 지나갔는데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봤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레위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도 제사장처럼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그를 나귀에 싣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주인에게 그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과 학자들이 이 비유를 제사장,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을 대조하는 뜻으로 읽어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우월하다고 뻐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정작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쳤는데 그들이 멸시해온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돌보아줌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해석도 물론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진정 말씀하고 싶었던 내용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그 사건에서 ‘사람’을 보는가 여부가
아니었을까요? 제사장, 레위인은 문자적 계명에 충실하려다 보니 사람을
보지 못했던 데 반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문자적 계명을 몰랐기 때문에(혹은 그 이상을 알았기 때문에)
강도당해 쓰러져 있는 자에게서 ‘사람’을 봤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제사장도
사라지고 레위인도 어딘가로 없어지고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의 정체도 사라지고 사람만 남았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일이란 것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획했던 일이 어그러지기도
하고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불량 스위치 하나 때문에 아랍 청년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원수’에게서 ‘사람’을 봤던 것입니다. 밥 먹다가 우연히 셔츠에 묻힌 김칫국물 덕분에 소원했던 사람과 사이가 좋아지기도 합니다. 김칫국물이
‘사람’을 보게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일이든 신앙의 일이든 ‘사람’을 보게 하는 쪽으로
열어놓을 일입니다. 결국은 사람을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도 거기서 보일 것입니다. 거기가 아니면 또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
2012.05.13 17:02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벼들기, 김칫국물에 고개 숙여 절하기--김칫국물처럼 시원한 설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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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군요
아멘
(설교 마치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설교도 아멘으로 마무리하거든요
물론 오늘은 그런 뜻의 아멘은 아닙니다
나도 사람을 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