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기함할 발언--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죽여도 좋은가.

by 김원일 posted Sep 09, 2012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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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의 사형제 발언이 끔찍한 이유


박용현 사회부장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사형 관련 발언을 접하고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잔혹한 고문을 당하며 고통 속에 천천히 죽어가는 주인공을 수많은 대중이 환호하며 지켜보던 영화 속 장면. 중세에 행해지던 고문사형(torture-execution)이다. 박 후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도 (사형제 또는 사형 집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는 사형을 옹호하는 여러 논리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부분이다. “범죄 억제라는 형사정책적 목적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다(2010년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합헌 결정에 대한 김종대 재판관의 소수의견). 더이상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구금 상태에 놓인 사람을 ‘본보기’용으로 살해하는 사형제는 인간 생명의 도구화다. 이런 논리는 저 끔찍한 고문사형을 정당화하는 길로 이어진다. 잠재적 범죄자를 겁먹게 만들어 범죄 발생을 막겠다고 한다면, 광화문 앞에서 거열형을 집행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를 옹호하는 이들도 대부분 이런 논리 확장에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비공개 교수형으로 집행되는 ‘문명화된’ 사형은 고문사형과 다르다고 여길 테니. 칸트도 그랬다. ‘인간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위대한 정언명령을 남긴 칸트도 사형옹호론자였다. 그러면서도 잔혹한 방식의 사형은 반대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할 만큼 흉악한 행위를 저지른 자라도, 나는 그가 한 사람으로서 갖는 존엄성을 철회할 수 없다. 사지를 찢는다거나 개한테 물어뜯기게 한다거나 신체를 절단하는 잔혹한 형벌은 인간성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 인간 자체가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종족으로 추락한다는 점에서 구경꾼들 또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도덕 형이상학>) 칸트가 이런 이중잣대를 가지게 된 것은 우선 죽음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혼의 영속성을 믿었고, 사형은 범죄자를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일 뿐 인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건 아니라고 봤다. 아주 긴 징역쯤으로 여겼다고나 할까. 칸트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날의 교도소와 같은 장기 구금시설이 제도화하기 이전이기도 했다. 칸트가 되살아나 인간의 생명에 대한 현대적 인식과 ‘가석방 없는 종신형’ 등 대체 형벌의 존재 등을 알게 된다면, 과연 지금의 사형제와 고문사형을 굳이 구분할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물며 ‘본보기 사형’은 그의 정언명령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이야기다. 어떤 목적을 위해 특정 부류 사람들의 존엄성을 부정할 수도 있다는 태도는 많은 비극을 불러왔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 그렇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한낱 도구로 전락시키는 성폭행범의 심리 상태가 그렇다. 유럽 국가들은 대학살의 경험에서 인권의 자각을 끌어내 사형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용서받지 못할 흉악범에게조차 마지막 한 방울의 존엄성을 남겨둠으로써, 칸트가 말한 ‘구경꾼들의 자괴감’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도 유신 시절 자행된 숱한 ‘사법살인’을 비롯해 비극적 경험을 갖고 있다. 어떤 교훈을 새길 것인가. 사형과 고문사형은 다르다고 18세기식 변명만 하고 있을 것인가.


*칸트와 관련된 부분은 넬슨 포터의 <칸트와 오늘날의 사형>(Kant and Capital Punishment Today)을 참조했다.


박용현 사회부장 piao@hani.co.kr


출처: 한겨레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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