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런 설교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거의 못 듣는다.

by 김원일 posted Sep 11, 2012 Likes 0 Replie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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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9 / 성령강림절 열여섯 번째 주일

 

자기 자신을 봤더라면

창세기 4:1-16

 

곽건용 목사

 

열등감이 초래한 비극?

 

‘역사는 묻힐 수는 있지만 잊히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옳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다시금 깨닫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장준하 선생 하면 자동적으로 <사상계>라는 잡지가 떠오릅니다. 1953년에 창간되어 1970년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폐간 될 때까지 한국사회 지성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잡지 말입니다. 이 분은 일제 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싸웠고 해방 후에는 종신집권을 노렸던 이승만, 박정희 독재에 저항해 싸우다가 1975 8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당시에도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권력에 의해 묻혔습니다. 그런데 최근 홍수로 인해 이장하는 과정에서 관을 열 수밖에 없었는데 보니까 고인의 두개골이 뭔가로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로써 37년 지난 고인의 죽음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몇 번 설교하신 이해학 목사님이 이와 관련해서 최근에 인터뷰를 했습니다. 두 분은 감방 동기랍니다. 이해학 목사님은 장 선생님의 죽음이 추락사가 아닌 타살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두 분이 감옥에서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박정희)은 열등의식이 있다. 나는 독립운동가고 그는 친일분자다.” 장준하는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끌려갔지만 탈출해서 광복군에 가담하여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이고 박정희는 반대로 만주군관학교 출신 일본군 장교였습니다. 친일파도 보통 친일파가 아닌 거지요. 박정희 자신도 이것이 부끄러웠는지 극도로 감추려 했지만 그게 어디 감춰질 일입니까. 감출 수 없었기에 장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와 자신이 비교될 때 더 큰 열등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박정희의 열등의식은 물론 본인에 의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단지 장 선생님의 추측일 뿐이지만 상당히 근거가 있는 추측이라 하겠습니다.

 

 

질투심이 부른 비극적 사건들

 

열등감과 질투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을까요? 열등감과 질투심이 그토록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은 질투심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살인이 저질러졌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농부답게 땅에서 거둔 곡식으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반겼지만 가인은 반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쳐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동생의 제물만 받고 자기 제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동생 잘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묻더라도 하나님에게 묻고 따져도 하나님에게 따져야 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동생을 죽였습니다. 질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구약성서에는 질투에 대한 얘기가 꽤 많습니다. 야곱에게는 열한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아버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들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을 형들이 질투했습니다. 따지자면 요셉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는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느니 심지어 부모까지 형제들과 함께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느니 하는 꿈 얘기를 철없이 늘어놓았으니 누가 그 말을 듣고 기분 좋겠습니까. 하여튼 형들은 요셉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죽일 생각으로 그를 깊은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도 ‘질투의 화신’으로 불릴만합니다. 그는 용모 준수한 청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된 인물이고 백성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던 사람입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엄친아’였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그의 인기를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어느덧 그의 시대는 저물고 다윗의 시대가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그는 다윗에게 극도의 질투심을 느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는 것을 들은 그는 질투심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서 그 후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질투는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합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지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 간에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이유가 어이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려는 권력자들이 득실대는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길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의 나라에서 자기 두 아들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는데 그 이유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상황 파악 못하고 철없는 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들 어머니에게 선수를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일종의 질투였다 하겠습니다.

 

구약성서가 사람이 저지른 첫 번째 살인이 질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좀 뜻밖입니다. 거기에는 뭔가 독특한 생각과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생각해보면 열등감과 질투심은 매우 흔한 감정입니다. 이거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열등감이 전혀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잘난 사람도 알고 보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내용과 대상과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열등감과 질투의 감정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이렇듯 흔한 감정이 그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랑비도 오래 맞으면 옷이 다 젖고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큰 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긴 멀쩡한 사람이 사소한 일 때문에 크게 망가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모범적으로 잘 살다가 사소한 일 때문에 순식간에 망가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가 갖고 있는 거창한 이념이 썩고 부패해서 망가지는 게 아닙니다. 그가 추구하던 고매한 정신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에 망치는 것도 아닙니다. 말하기도 창피할 정도로 사소한 일 때문에 망가지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열등감과 질투심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감정이랍니다. 열등감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이고 질투는 두 사람에다가 제3자가 더해질 때 비로소 생기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박정희와 장준하 사이의 감정은 열등감입니다. 장준하가 독립군으로서 겨레를 위해 투쟁할 때 자기는 일본군 장교로 일본을 위해 싸웠다는 데서 오는 열등감입니다. 반면 가인이 아벨에게 느낀 감정은 질투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았기 때문에 가인에게 생긴 감정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없었다면 가인이 아벨을 질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가인이 품었던 질투를 인류 최초 살인의 이유로 든 것은 훗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경쟁하며 싸울 걸 내다봤기 때문일까요?

 

 

열등감과 질투심을 극복하려면

 

열등감과 질투심에 대해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이 첫 번째 오해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갖고 있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제가 커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열등감이나 질투심 같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과 질투심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남 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열등감과 질투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 중에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할 만큼 자의식이 강해서(이것도 병일 수 있습니다) 그걸 억지로 누르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없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뭐든지 억지로 누르면 고칠 수 없습니다. 감추거나 눌러서 해결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37년이나 지났지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보십시오. 누르거나 감춰서 해결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육체의 문제든 정신의 문제든 영혼의 문제든 무슨 문제든 그것을 고치려면 먼저 그것과 마주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등감이 됐든 질투심이 됐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란 사실이 중요합니다. 당사자만 노력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니,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이 당사자란 인식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신학적으로도 읽지 말고 신앙적으로도 읽지 말고 심리학적으로 읽어보면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성모독을 피해보려고 달리 생각해보고 싶은데 달리 생각할 길이 없네요.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았던 데 대해서는 뭐라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라면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불평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거부된 후 얼굴색이 바뀔 정도로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아벨에게 엄청난 질투심을 느꼈지요. 여기서 아벨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뭔가 하셨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자초지총을 설명해주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왕 심리학적으로 읽어보자고 했으니 끝까지 가보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도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시기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입니다. 사람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고 관계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어서 그랬는지 하나님은 그때까진 사람 심리를, 특히 사람의 질투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질투심이 됐든 열등감이 됐든 문제의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탓’이란 말을 아예 사전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문제를 푸는 걸 방해합니다. 남을 탓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질투심이나 열등감을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가치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소중하다는 감정, 곧 자기 존중심을 갖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남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와주더라도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당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아무리 남이 노래불러줘도 궁극적으로 자기 존중심을 회복하게 하는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인식과 감정이 내 안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존중심을 회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은 육체의 병이나 마음의 병만 고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영혼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병드는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를 가치 없다고 느끼는 데 있습니다. 흔히 영혼의 가장 큰 병은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만도 병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병은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을 회복시켜 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우리를 가리켜 보물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환란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는 까닭은, 절망에 무릎 꿇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는 까닭은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의 열등감과 질투심을 갖고 삽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갖고 있다고 해서 사소한 문제는 아닙니다. 생각 밖으로 엄청나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 열등감과 질투심입니다. 이런 감정을 ‘자기 발전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는 것도 너무 안일한 생각입니다. 질투심과 열등감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보기에는 폐해가 너무 크고 그 결과가 너무 비극적입니다. 우리는 이 감정을 진지하게 여기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해결해야 합니다. 제 열등감과 질투심은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열등감과 질투심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이해하고 서로 도와주면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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