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와 나르시스의 쉽지 않은 협상--또 하나의 좋은 설교

by 김원일 posted Sep 12, 2012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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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6 / 성령강림절 열네 번째 주일

 

지금은 희미하지만

고린도전서 13;12

 

곽건용 목사

 

자화상 · 사람의 심리 · 나르시스

 

반 고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자화상 한두 점 그린 화가는 많지만 고호는 무려 서른 편에 달하는 자화상을 그렸으니 특별하긴 합니다. 그는 왜 이렇게 자화상을 많이 그렸을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자기 얼굴이 멋있고 잘 생겨서 후대에 그림으로라도 남겨두고 싶었을까요?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그리 잘 생긴 얼굴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멋지고 잘 생긴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을 그렸어야 했을 겁니다. 그럼 왜 그는 그 많은 자화상을 그렸을까요? 모델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지불하고 모델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모델료 줄 돈이 없었다는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종이를 살 돈조차 없어서 종이 앞뒷면에 그림을 그렸다니 말입니다. 유럽 어딘가에 있는 고호 갤러리에 가면 천정에 줄을 매달아 놓고 거기에 작품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보통 갤러리에 가면 벽에 그림을 붙여놓게 마련인데 줄에 매달아놓은 이유는 종이 앞뒷면을 다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참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가장 비싸게 팔리는 화가가 모델 살 돈이 없어서 자화상을 그려야 했고 종이 살 돈이 없어서 앞뒷면에 그렸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는 생전에 자기 그림을 팔아서 돈 한 푼 번 적 없는 화가라는 얘기도 어딘가에서 읽었습니다.

 

저는 성경에 ‘불만’이 없지 않습니다. ‘불만’이라는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시면 ‘아쉬운 점’이라고 고쳐도 좋습니다. ‘완전무결한 성경에 불만이나 아쉬움이라니!’라고 생각하고 화를 낼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솔직한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성경이 완전무결하다는 얘기는 교리에서나 하는 얘기이고 실제로 성경을 정성껏, 그리고 정직하게 읽는다면 제 말에 공감할 분이 적지 않을 겁니다.

 

제가 성경에서 아쉬워하는 점은 성경은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거의 묘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 다윗, 솔로몬 등은 이스라엘 신앙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인데 우리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그들의 내면세계는 어땠는지 등등을 전혀 모릅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에게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걸어서 사흘이나 되는 먼 길을 함께 여행했다지만 부자(父子)가 그 먼 길을 걸으면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성경은 일언반구 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속으로 품은 생각은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아들이 “하나님께 바칠 제물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건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했다지만 이 대답은 정말 하나님이 준비해주실 것으로 믿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시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대답을 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는지, 듣는 아들의 심정은 어땠는지, 여러분은 알고 싶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높이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싶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모세와 바울의 광야 생활

 

모세는 갓난아기 때 죽을 뻔했다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살아남아 이집트 공주에게 구조되어 파라오의 왕실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생모가 유모가 되었다니 자기 근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요. 이 얘기를 한 다음에 출애굽기는 한참을 건너뛰어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한 얘기로 넘어갑니다. 그는 히브리 노예들을 못 살게 구는 이집트인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가 이집트 공주에게 구조되어 왕궁에서 자랐다는 얘기와 이집트인을 죽였다는 얘기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큽니까. 그 중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왜 이집트인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히브리 노예들을 괴롭혀서 죽였다고는 하지만 왕궁에서 자란 그가 동족에게 얼마나 동질감을 느꼈고 그들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했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했겠습니까. 우발적인 사고였을까요? 아니면 인도주의적 관심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동족에 대한 사랑이었을까요?

 

그런데 그는 히브리 동족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그가 히브리인 둘이 다투는 것을 보고 말린답시고 끼어들었지만 그들에게 “누가 당신을 우리 재판관으로 세웠소? 우리도 때려죽이려 하오?”라는 핀잔만 들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는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집트 왕궁의 안락을 버리고 히브리인이 되어 살게 했을까요?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결정을 내렸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고 싶은데 성경은 그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살았습니다. 장인의 양떼를 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타오르는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야웨 하나님을 만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을 살았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무슨 생각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았을까가 궁금한데 성경은 이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이래서 제가 성경이 아쉽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건너 뛰어보겠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냈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가 달리 전하고 있긴 합니다.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뭘 하면서 지냈을까요? 신약학자들은 이미 그때 그는 선교사가 됐었다고 하는데 저는 글쎄, 그 말이 믿기지 않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사람이 그렇게 금방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을까요?

 

모세가 야웨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광야에서 지냈던 시간과 바울이 아라비아에 머물렀던 시간은 자기 성찰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그 동안 살아온 삶을 찬찬히 돌아본 시간이 아니었겠나 말입니다. 물론 이는 아무 근거도 없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바울에게는 그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저는 이런 근거 없는 상상이 그럴 듯하게 여겨집니다.

믿는 종교가 없는 한 소설가가, 만일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이나 상담학 같은 것들이 지금처럼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글을 쓴 걸 봤습니다. 이렇게 말한 걸 보면 이 소설가는 종교를 매우 높이 평가하는 모양입니다. 종교가 본래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니 말입니다. 저도 이 분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종교에는 그런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데 있겠지요.

 

종교라는 것은 결국 절대자와 관련을 맺으려는 시도입니다. 종교에 따라서 절대자를 부르는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이름이 무엇이든 결국 모든 종교는 절대자와 통()하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 지난주에 얘기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 절대자와 구도자의 위치는 동일할 수 없으므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기 십상이라고 했습니다. 거기 ‘사랑’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절대자는 명령하고 구도자는 복종하는 주종관계에 그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걸 ‘구도’(求道)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어느 종교든 절대자와 구도자의 관계에 ‘사랑’이란 요소가 필수적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성경도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관계가 절대자와 구도자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절대자와 구도자가 통하고 관계 맺는 것이 종교라면 종교의 첫 걸음을 심리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을 버리는 것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은 신화의 인물 나르시스에게서 왔습니다. 그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물로 뛰어들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온 나르시시즘은 자기애(自己愛), 자신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궁금한 점은 나르시스가 얼마나 미소년이었기에 자기 모습을 보고 물로 뛰어들었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는 그렇게 미소년이었을까요? 그는 20년 전의 장동건이거나 영화 <패왕별희>의 장국영 같았을까요? 수많은 화가들이 나르시스를 그렸지만 16-7세기 이탈리아 화가이며 미켈란젤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카라바지오가 그린 나르시스는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과연 나르시스를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은 매우 추하게 그렸습니다. 둘을 너무도 대비되게 그려서 충격적일 정도입니다. 카라바지오는 나르시스를 왜 그렇게 그렸을까요? 그가 물속에서 본 모습은 그의 외면이 아닌 내면인데 그게 너무도 추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물로 뛰어든 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추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I Am Nothing!

 

나르시시즘이란 근거 없이 자신은 선하다, 옳다, 정당하다고 느끼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을 포함합니다. 종교에서 구도자가 절대자와 관계를 맺으려면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적 수행은 정신 또는 영의 성장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의 추악함과 보잘것없음을 인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I am nothing!”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그것과 진실하게 부딪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지적인 사람이나 덜 지적인 사람이나, 많이 가진 사람이나 덜 가진 사람이나 막론하고 자신의 추악함과 보잘것없음을 인식할 때 엄청난 아픔과 고통을 느낍니다.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이기 때문에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건너 뛰고 싶습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구도자가 절대자와 통하기 위해서 이 과정은 절대 건너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추악함과 보잘것없음을 인식하는 일, 곧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얘기하고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린 뭘 해야 하나?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답니다. 거저 먹으라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그리스도교는 문제집에 있는 문제를 스스로 힘으로 풀려 하지 않고 맨 뒤에 있는 해답을 살짝 보는 학생과 같습니다. 자신의 추악함과 보잘것없음이, 자신의 죄인 됨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 해결되었다면서 고통스런 과정을 건너 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해답을 살짝 엿보는 학생은 자기가 공부를 잘 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을 건너뛰려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가 높은 수준에 올라가 있는 구도자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는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것은 절대자와 구도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이와 똑같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그것이 가족관계든 친구관계든 그 관계가 아름답게 지속되려면 내 안에 있는 나르시스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나르시스를 바울은 ‘내 안에 있는 죄’라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그것을 죽여야 하는데, 만일 죽이지 못하면 힘으로 눌러 놓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가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만 제대로 맺으면 모든 것이 절로 해결되는 듯이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자와의 관계 맺기에서 해야 하는 똑같은 일들을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서도 해야 합니다. 하나만 하면 나머지는 절로 따라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고린도전서 13 12절은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나를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나르시스로 착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아는 나는 부분적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이 나를 아시듯이 나도 나를 온전히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내가 아는 나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함을 깨닫고 내 안에 있는 나르시스를, 내 안의 죄를 때로는 힘으로 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면서 진실한 구도자로서 절대자와 통하는 길을 찾아 갑시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삶을 나누는 모든 사람들을 종교의 차이와 상관없이 함께 길을 가는 동료 구도자로 여기고 존중하며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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