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의 전화위복

by 김주영 posted Sep 16, 2012 Likes 0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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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흘 전에

데이빗 네프와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지난 2월 20일 이 게시판에

"한 때 안식일교회 목사였던 사람이" 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 소개한 

http://minchosda.org/xe/97233

데이빗 네프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의 주필 (editor-in-chief)  이다. 

안식일교회 목사를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이다. 


안식일교인을 만날 때마다

'왜 떠났냐' 고 묻는 그들의 호기심 때문에 성가셨겠지만 

조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내 친구 포드" 에 대한 교단의 처사였다. 


네프는 

포드에 관해 대총회 부회장에게 직접 물은 것이 있었는데

그 대총회 부회장의 대답은 나중에 알고 보니 명백한 거짓말이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는 모르겠다. 

(아시다시피 포드는 PUC 교수 시절

다니엘 8장에 대한 교단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설을 가르쳤다.

그의 위치와 영향력 때문에 

대총회는 그에게 면책을 약속하고 성경 컨퍼런스에서 그의 주장을 듣고 토론하기로 약속했다. 

주지하는 대로 면책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


당시 교단 불어온 회오리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목사직을 떠난 사람이 거의 2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네프의 경우는 

안식일교단을 떠나 

'성공' 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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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프의 개종(개혁?^^) 은 사실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안식일교인이었지만

일요일교회에서  어린이 성가대 활동도 했다.


일요일 교인들이 

나중에 우리를 잡아죽일

마귀의 자식들이 아님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교회 음악에 대한 취미와 정열로 인해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일요일 교회 올개니스트와 성가대 지휘자를 하기도 했다. 


왈라왈라 대학 교회 담임할 때

이웃의 휘트먼 칼레지 (왈라왈라에 있는 유명한 사립대학)에서

'학교 내에 IVF 서클이 있는데  우리학교는 종교학 교수가 없으니

당신이 와서 지도교수를 해달라' 고 해서

IVF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들의 연례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그들의 출판사인  IVP 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나중에 안식일교회 목사직을 사임하면서

그는 IVP 의 편집진으로 취직하게 된다. 


거기서 얻은 경험으로 길이 열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편집실로 진출하여

결국 chief editor 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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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 라본은

아버지가 앤드루스 세미나리 교수였다.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체류하던 시절

그 가족들은

일요일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참석하기도 했다. 

거기서  D 마틴 로이드 존스를 비롯한 복음주의 개신교계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는 호사를 누렸다. 

(DM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  Preaching and Preachers 는 

삼육대학 신학과에서 박해종 목사님이 설교학 교재로 쓰던 교과서였다). 


네프 부부는

'일요일교회' 와 담을 쌓고 격리되어 살던 대부분의 교인들과는 달리

그들과 교류하면서

오히려  안식일교회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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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식일교회는 

분위기가 빡빡했던 것 같다. 


6,70년대의 독특한 종말론

완전주의 

그리고 포드로 인한 피바람. 


"당시 교회분위기가 요즘 같았더라면

떠나시지 않았겠지요" 라고 물었다. 


물론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가족은 중요하니까.  문자적 가족이든 교회 가족이든..."


3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아픔이 다시 되살아나는지

그의 얼굴이 잠시 어두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잘 된' 일인지 모른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주필

이거 보통 자리인가^^)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dream job 일 것 같다"고 했더니

적어도 자기에게는 그렇다고 했다. 

복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양질의 기사가 모자라는 일은 없다고 한다.

넘쳐나는 것을 추리기가 힘들다. 

(시조와 교회지남 생각이 난다^^  리뷰는 어떤지?)


서평을 쓰느라 책을 엄청 읽는다. 

개신교계 흐름의 전반을 모니터하고

뛰어난 신학자들, 저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교류한다.

(필립 얀씨, NT 토마스, 또 누구 누구 이야기를 할 때 마다 '내 친구 아무개' 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세상에 즐겁기만 한 일이 어디 있으랴마는 

가장 힘든 부분이래야 

기사가 나가면 (어떤 때는 기사가 나가기도 전에)

항의와 비평의 서신들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정도다. 

그만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의 비중이 크다는 말일 것이다. 


가족과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에게는 전화위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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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저녁을 먹은 다음 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질의 응답 시간에

누가 '안식일교회의 무엇이 당신을 떠나게 했는가'    또 물었다. 


그는 당시 (아직도 남아 있지만) 교회의 '종파주의' (우리만 남은 무리라는 사상) 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생각을 달리하더라도 이 교회의 목회를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떠나야 했던 것은 구체적 사건 (포드) 으로 촉발되었다고 했다. 


그의 강의의 주제는 '정의와 종말론' 이었다. 


한마디로

종말을 기다리는 기독교는

이 땅에 정의 (특히 경제정의를 강조했다) 를 실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교회를 떠나던 당시의 SDA 종말론과 요즘 SDA 종말론이 달라진 것이 있다고 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SDA 교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내 어머니 집에 늘 틀어 놓고 계시는 3ABN  에 나오는 설교들을 보니 별로 달라진 것 없는 것이 없기도  하다" 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종말론에 관한 한 이 교회는 성장을 멈춘 것 같다. 

개연성 없는 시사와 설득력 없는 신학을 아직도 붙잡고 있다. 

어제 어느 교회 목사님과 몇 평신도와 가볍게 얘기했다.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데 아직도 19세기 종말론만 되풀이하고 있느냐고 했다. 

Yes.   미국 한인안식일교회 목사와 평신도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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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강의를 했던 곳은

30여년전 그가 담임목사로 부임할 뻔 했던 교회였다. 


당시 목사를 찾던 그 교회의 적합한 후보자 1위였던 그를

워싱턴 합회장이 인터뷰하러 왈라왈라에 왔었다. 


아내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보고

합회장은 그것은 빼는게 좋겠다고 했다. 


아내 라본은

신학자의 따님 답게

왜 결혼반지가 문제가 되느냐를 조목조목 따졌다. 


합회장은 그 뒤로 다시 연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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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사건 때문에 떠난  그 수많은 목사들

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결국 다들 별 볼일 없이 끝났어. 

떠나 봐.  어떻게 되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분들 있다. 


참 잔인하다. 


몇대를 내려온 뿌리가 뽑혀

다른 곳에 제대로 이식되지 못하고

몸살하는 것 당연하다.

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의였나?


아, 그리고 


그중에는

네프처럼


성공해서

그분들이 부러워할만한 job  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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