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진정성’이라는 가면 / 문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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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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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연예인 강호동이 평소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진정성’이었다. <무릎팍도사> 등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강호동은 성공한 명사가 인생 역정과 직업정신을 이야기할 때마다 ‘진정성이 있다’고 표현하며 감동했다. 그가
없는 지금도 ‘진정성’의 물결은 여전하다. <슈퍼스타케이> 등 오디션 프로그램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감동적 사연의 가수
지망생들, <강연 100℃>에 나오는 자수성가형 노력가들, <짝>에서 열렬히 구애를 펼치는 남녀들에게까지
‘진정성’이라는 표현은 널리 쓰인다. 오디션에 나온 이들이나 자수성가한 이들, 사회적 명사들 모두 성공하고 싶어하거나 이미 성공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진정성’은 오늘날 ‘성공’의 한 척도로까지 재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원래 진정성을 뜻하는 영어의 ‘authenticity’라는 단어는 ‘authentikos’(진짜)라는 그리스어에서 기원했다.
가짜들이 많은 곳에서 ‘진짜’는 ‘원본’ 혹은 ‘독창성’을 의미했다. 독창성이 담긴 원본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작가’(author)라고 불린 것은 이 때문이며,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권위를 가진’(authoritative) 것이 된다.
서구에서 ‘진정성’이라는 에토스는 18세기 이후 근대적 개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는데, 고유한 ‘진심’을 가진 도덕적 개인이
진실되지 않은 사회와 대면하면서 그 사회를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의미했다. 그래서 ‘진정성’은 흔히 사회 진보를
염원하는 청년들로 표상된다. 한국 사회에서 ‘진정성’의 에토스는 1980~90년대를 풍미하며 청년문화의 헤게모니가 되었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급속히 사라진다. ‘생존’이 정언명령이 된 강력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진정성’을 가진 이들은
가장 먼저 망하기 십상이다.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것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개념들이 그렇듯 ‘진정성’ 역시 그것이 사라졌기에 더 남발된다. 생존의 압박 속에서 무한 경쟁하는 주체들은 ‘진심’이
인정받고 권위를 가졌던 ‘옛날’을 가끔 그리워할 것이므로. 찍어낸 듯 똑같은 아이돌 그룹의 노래 홍수 속에서 <나는
가수다>나 <불후의 명곡>이 다시 호출하는 1980~90년대의 명곡들은 잠깐이나마 느껴보는 그런 진정성 있는
옛날이다. <건축학 개론>, <응답하라 1997> 등 ‘1990년대로의 복고’ 역시 마찬가지다. ‘첫사랑의
아련함’만큼 우리가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우는 문재인 후보, ‘진심의 정치’를 외치는 안철수 후보
등도 모두 ‘진정성’에 기대고 있다. 속물의 대명사가 된 이명박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데 ‘진정성’은 강력한 슬로건이다.
하지만 생존경쟁의 체제에서 끝없이 속물화된 주체들에게 ‘진정성’은 그저 하나의 위안일 뿐이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들’이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 열심히 찾는 가면 같은 것이다. 드러나는 이미지와 실제
현실이 다른 곳으로 알려진 연예계와 정치권에서 ‘진정성’이 가장 열심히 호출되고, 누구나 개탄하는 이 폭력적인 사회에 붉은
십자가가 도시를 뒤덮고 있으며, 성공을 돕는다는 자기계발서와 ‘진정성’을 설교하는 멘토들의 책이 나란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놓여
있는 현상들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열망’이라 표현하지만, 그것은 대중에 대한 비판이 유일한 터부인
곳에서 만들어진 환상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현실의 더러움과 모순들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는지 읊조리는
냉소적인 목소리다. 따뜻하고 긍정적이고 부드럽기만 한 이 ‘진정성’이라는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한 차갑고
딱딱한, 무엇보다 ‘진실된’ 그런 목소리 말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출처: 한겨레신문
아랫쪽 셋째줄 부터
그것을 현대 사람들이 찾고힜는 " 진정성 " 인 됍죠.
삥삥 돌다가 제 자리로 다시온 문화 평론 인듯 싶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