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Canaan in God)과 ‘가나안 안에 있는 하나님’(God in Canaan)--기똥찬 설교 하나

by 김원일 posted Sep 25, 2012 Likes 0 Replies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2 9 23 / 성령강림절 열여덟 번째 주일

 

그는 선택했다!

아브라함 이야기 1

창세기 11:27-12:3

 

곽건용 목사

 

마리아는 왜 그랬을까?

 

목사와 버스 운전사가 함께 천국에 갔는데 버스 운전사는 대궐 같은 집을 배정받았고 목사는 초라한 집을 배정받았답니다. 목사가 베드로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베드로 왈(), “당신이 설교할 때 청중들은 졸았지만 저 운전사가 운전할 때는 위험하게 운전해서 승객들은 모두 ‘주여, 여기서 살려주신다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너는 사람들을 졸게 만들었고 저 친구는 기도하게 만들었다. 알겠나?

 

설교가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는 모두 생각이 같을 것입니다.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는 설교 시간에 한 사람만 졸아도 설교를 중단하고 강단에서 내려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설교학 교수는 “설교시간에 교인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죄”라고 말했답니다. 예배 끝나 예배실을 나가는 교인들의 얼굴은 빛이 나고 생기가 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하고 포기하려 했던 것에도 다시 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게 설교이고 예배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의 설교만큼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 일행이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머물렀던 얘기가 있습니다. 일행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명은 아니었을 테니 그들을 대접하려면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매우 분주히 뛰어다녀야 했을 겁니다. 아니, 그랬어야 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손님 대접은 하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마르다가 이런 얘기를 왜 손님인 예수님에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능 해결사라고 생각했을까요? 어쨌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의 기대와는 다른 대답을 내놓으셨습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 향유를 붓고 머리칼로 닦은 여인이 마리아였다고 전하지만 다른 복음서는 그렇게 전하지 않습니다. 이 짧은 일화 하나로 그녀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식구들이 함께 접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 말씀을 들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녀가 제 정신이었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했지만 그렇다고 마르다가 쓸데없는 짓에 신경 쓴다고 그녀를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마르다도 잘못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택했다는 뜻이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인륜과 관습과 상식에 따라서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눈으로 보셨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했는데 이 ‘좋은 몫’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마리아의 행위에는 두 가지 판단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손님 시중드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판단이 하나이고,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을 다 감수하겠다는 결단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좋을 줄 알면서도, 또 올바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걸 누가 모르나? 형편이 그렇지 않으니까 못하는 거지.’라고 핑계대면서 말입니다. 어느 편이 좋은가 하는 판단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좋은 편을 ‘선택’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결단력’이 좌우합니다. 좋은 줄 아는 것과 그것을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줄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기도 하고 나쁜 줄 알면서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우연히 일치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연은 사람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행복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까닭은 그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버리고 포기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얘기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걸 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은 무엇이 달랐나?

 

얘기의 스케일을 좀 키워보겠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그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니까 특별히 하신 말씀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그의 비중을 생각하면 놀라운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해서 당대에 되살려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과거 한때를 살다가 죽어간 ‘과거형 인물’이 아니라 자기 세대에 살아 숨 쉬는 ‘현재형 인물’로 되살려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바울서신을 함께 읽어가면서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선조는 셈이고 셈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11 10절 이하에 있는 셈의 족보 맨 마지막에 아브라함 아버지 데라의 이름이 나옵니다. “나홀(아브라함의 할아버지)은 스물아홉 살에 데라를 낳았다. 나홀은 데라를 낳은 뒤에 백십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데라는 일흔 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데라 윗대는 모두 2-30대에 자식을 낳았는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데라의 아들들은 늦둥이였던 셈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백세가 돼서야 이삭을 낳을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일까요?

 

데라에 대한 얘기는 짧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창세기 11:31).

 

여러분은 놀랍지 않습니까? 뭐가 놀라우냐고요?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라는 곳에 살다가 거기를 떠나 하란까지 와서 하란에서 살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다는 겁니다! 훗날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바로 그 땅, 모세가 동족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켜 이끌고 들어갔던 바로 그 땅 말입니다! 데라는 그리로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Canaan in God)을 찾았어야 하는데 ‘가나안 안에 있는 하나님’(God in Canaan)을 찾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신앙의 순례는 실패였다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대단히 심오한 통찰입니다. 구약성서는 ‘땅’을 찾아가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가는 얘기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가나안은 중동지역 한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땅을 차지하려고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나안은 영혼의 고향입니다. 시신을 눕힐 땅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가 가려고 했던 가나안은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이 아니라 그저 땅덩어리에 불과한 가나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왜 그리로 가려 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무관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 안의 가나안’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는 데라의 아들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구약성서는 분명히 밝힙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장차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가나안으로? 천만에! 아닙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가나안이 최종 목적지임이 드러나지만 그가 짐을 꾸려서 집을 떠났을 때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갔던 것입니다. 그게 어딘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하느님이 불렀다고 해도 사람이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면 부름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억지로 해서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끈질기게 설득하십니다. 이집트에 안 가겠다던 모세에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내미는 손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과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떠났을까?

 

‘생명’(生命)이란 한자어는 ‘날 생’ 자에 ‘목숨 명’ 자를 쓰는데 목숨 ‘명’ 자에는 ‘명령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생명은 ‘살라는 명령’인 셈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살라는 명령을 받아 존재합니다. 우리는 살라는 명령을 하나님에게 받은 존재입니다. ‘생’은 곧 ‘명’입니다. 이를 입증해 보라면 저는 못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은 명입니다.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란 얘기입니다. 이렇듯 살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을 떠나라!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행한 총 길이는 900마일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애틀까지가 950마일이니 아브라함이 여행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 까짓것......’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3,700년 전에 이런 길이의 여행은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제가 자이언 캐년(Zion Canyon)에 처음 갔을 때 경치의 아름다움에도 감동받았지만 거기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거기까지 오다가 많이 죽었다는 얘기가 가슴 아팠습니다. 2백 년도 안 된 과거에도 그랬는데 3,700년 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한 마디로 목숨 걸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던 것입니다.

 

그는 왜 그런 모험을 감행했을까요?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는 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을까요? ‘하나님이 불렀으니까’는 완전한 대답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절반의 대답일 따름이니다. 왜냐하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말입니다. 곧 하나님이 부르시기도 했지만 아브라함에게도 그 부름에 응답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불을 붙이기만 하면 확 하고 타오를 ‘불씨’가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기 전의 아브라함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응답해서 목숨을 걸고 길을 떠난 걸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메소포타미아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거길 떠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게 될 가나안도 우상 섬기는 것으로 보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땅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상숭배가 이유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부르심에 응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전 존재가 달려 있는 문제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실제로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마리아 얘기도 비슷한 관점에서 봅니다. 훨씬 스케일이 작긴 하지만 그녀에게도 인륜, 도덕, 관습, 언니에 대한 미안함 등을 넘어서는 뭔가 중대한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녀가 그것을 찾으려고 애쓰고 노력한 것,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한 ‘참 좋은 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요한 8:14). 예수님은 자신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향에 대한 얘기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자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얘기와 관련해서 여기에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더러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겠습니까. 몰랐지요. 그 길이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 언덕이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장차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갔던 것과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른 채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 하나만 믿고 따라갔던 제자들의 경우가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길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디로 가는지 알아도 여행하는 것이 불안한 법인데 이들은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길을 떠날 수 있었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떠나라고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자기들 여정을 이끌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설교는 다음 주일에 이어집니다.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