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았을 땐 아들의 영정을 품에 안은 의문사 유가족 어머니들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정 사진의 주인공은 남편들이었다. 어느 날 청천벽력처럼 남편을 잃어야 했던 지어미들이, 37년이 흐른 오늘, 여전히 푸릇한 청장년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남편의 사진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인혁당 사건 유가족의 회견을 함께 지켜보던 광주 출신 한 선배는 “그래도 5·18 영령들은 국회 청문회라도 했지”라며 혀를 찼다. 비록 학살의 주역들은 건재하지만, 5공 청문회라는 전 국민적 공론의 장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절차를 밟았으니 인혁당보다는 한(恨)이 덜할 것이라는 얘기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민주화 이후 5·6공에 대해서는 역사적·사법적인 단죄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졌다. 그러나 3공은 아니었다.

지난 정권에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이 시도되기는 했지만 관련 국가기관들의 비협조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재심 판결도 만시지탄인 감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후보는 고마운 존재다. 덕분에 잊고 지내던 역사가 공론의 장에 되살아났다. 사실 사람이 자기가 몸담지 않았던 시대를 유추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10대나 20대에게는 6·10항쟁 어쩌고 하는 말이 화석처럼 들릴 것이다. 내게는 유신이나 긴급조치가 그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생생한 현실이 됐다. 유력 후보의 역사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오히려 부차적 수확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떠받쳤던 권력기구의 속성이 변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음을 새삼 깨우쳤다는 사실이다.

1차 인혁당 사건(1964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3명은 양심상 도저히 이들을 기소할 수 없다며 버티다 사표를 썼다. 이들의 사표를 즉각 수리했던 검찰총장 신직수는 훗날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2차 인혁당 사건(1975년)을 진두지휘했다. 이를 거치며 검찰은 박정희 정권에 ‘완전 정복’됐다(<대한민국사>, 한홍구).

MB 정부 들어서는 임수빈 부장검사가 <PD 수첩>을 기소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다 옷을 벗었다. 그 뒤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던 검찰이 미래 권력의 출현을 앞두고 또 어떤 낯 뜨거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는 이번 커버스토리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래도 5년 내 윤리 공부 했으면 됐지 이번엔 역사 공부를 시키는 누군가의 출현이라니. 대한민국 국민 하기 참 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