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다 악질 아브라함

by 김원일 posted Oct 05, 2012 Likes 0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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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0 / 성령강림절 열아홉 번째 주일

 

그는 약/악했다

창세기 12:10-20

 

곽건용 목사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

 

그 나라에서는 주민들이 왕을 선거를 통해 선출했습니다. 그렇게 선출된 왕은 7년 동안만 다스렸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임되지 않았습니다. 왕은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고 장로들로 구성된 장로회의에 의해 견제되었습니다. 일종의 ‘원로원’ 같은 기구였지요. 장로회의는 국가 운영에 중요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 나라의 경제정책과 행정업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이는 비단 왕비 개인의 지위뿐 아니라 여성의 일반적인 지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얘긴지 아시겠습니까? 어느 나라가 국정을 이런 식으로 운영했을까요? 왕이 있는 군주국이지만 상당히 민주적인 나라가 아닙니까? 이 나라는 에블라(Ebla)라는 나라입니다. 어디 있는 나라냐고요?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기원전 2,500년경에 시리아 북부지역에 있었던 나라인데 21세기의 그 어떤 입헌군주국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아 보입니다. 에블라는 1960년대 말에 발굴되기 시작해서 거기서 수많은 토판이 발견됐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이 해독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 나라의 전모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알려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원전 2천 년 중반,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보다 수백 년 앞선 시기에 이렇게 발달된 제도를 갖춘 왕국이 가나안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3,700년 전 아브라함 시대가 매우 원시적이고 미개한 시대였다고 생각하는데 에블라 왕국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알 것은 다 알았다고나 할까요.

 

오늘 아브라함에 대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얘기를 했습니다. 흔히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식구들을 끌고 고향을 떠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데라였고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물론 그의 의사도 개입되어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데라 일행은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 왔는데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거기가 아니라 가나안이었지만 거기까지 가지는 못하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왜 데라가 우르를 떠났는지 모릅니다. 최종 목적지가 왜 가나안이었는지도 역시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데라가 가려고 했던 가나안은 아브라함이 가려 했던 가나안과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차이를 ‘가나안 안에 있는 하나님’(God in Canaan)과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Canaan in God)의 차이로 설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해서 모든 신앙인의 신앙여정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이른바 신앙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땅이나 돈이나 자식이나 명예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데라에게는 가나안 땅이 최종 목적지였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영혼의 고향으로서의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놓여 있는, 지중해에 면해 있는 땅 덩어리로서 가나안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데라의 자손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이 아니라 ‘가나안 안에 있는 하나님’에 집착하니 말입니다.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나다

 

오늘의 본문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전합니다. 아브라함 일행이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야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야훼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의외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아브라함 일행은 이집트로 내려가야 했다니 말입니다. 가나안은 전적으로 비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는 땅이고 이집트는 나일 강이란 거대한 수자원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가뭄에 덜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가뭄이 오면 식량을 구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일행이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아내 사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해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아내 사라가 너무 예뻐서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그녀를 차지하려들 테니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 목숨도 건지고 대접도 받자는 얘기입니다. 아내를 팔아서 목숨도 부지하고 대접도 받겠다는 말입니다. 이게 야훼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고향을 떠나서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가나안까지 온 사람 입에서 나올 얘기입니까.

 

이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아내를 남에게 넘겨주고 목숨을 부지하려 드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럴듯합니다. 이와는 달리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것을 좋게 생각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가 잘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면 그에게 매우 비판적이었겠지만 아브라함아닙니까! 그러니까 좋게 봐줘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둘 다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남의 사정은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작정 비판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아브라함이니까 무조건 좋게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옳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누구라 해도 옳아야 옳은 것이지 아브라함이니까 옳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니까 모세니까 예수님이니까 무조건 옳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됐든 모세가 됐든 예수님이 됐든 옳아야 옳은 것이지 옳지 않은데도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옳지 않은 말과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개인에 집착하고 그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옳은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내를 남에게 주려 했던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무리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한 짓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해보면 그에게 손가락질하기 힘듭니다. 여러분이 그 처지에 놓여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남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신앙에서뿐 아니라 우리네 삶 전체에서 반드시 필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사람이 철이 든다는 말은 역지사지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남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역지사지를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악하기도 했지만 약하기도 했다

 

아브라함 일행이 이집트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우려했던 대로 이집트 사람들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녀를 곧장 바로의 궁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바로는 그녀를 보고 아브라함을 잘 대접했고 큰 재산까지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서 바로와 그의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바로가 재앙의 원인이 그것인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걸 알고 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 이 말로 미루어보면 재앙이 바로와 사라 사이에 불미스런 일이 벌어진 다음에 닥친 것 같은데 후대의 유대인 랍비들은 그게 아니라고 사라를 적극적으로 방어합니다. 사라를 옹호하는 랍비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 중에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는 글도 있지만 터무니없는 내용도 많습니다. 좌우간 바로가 신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라함이 모든 재산을 거두어서 그 아내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으로 에피소드는 마무리됩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무엇을 얘기하려고 이 얘기가 여기 자리 잡고 있는 걸까요? 우선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겪은 일이 기근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흔히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지만 거기에는 젖도 없고 꿀도 흐르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오히려 기근에 매우 취약한 척박한 땅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을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난 것은 그러니까 매우 현실적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난 사건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땅이 가나안 땅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이었음을 넌지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나안에 흔히 기근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기근을 만났다고 창세기가 전할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영적인 메시지는 단순히 흔히 일어났던 일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진정한 가나안은 어디인가, 그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이를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곤혹스런 일을 겪었습니다. 아내와 자기 목숨 중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을까요? 창세기 22장은 야훼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임을 서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을까요?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시험’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 실행합니다. 따라서 만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뭘 잘 몰라서 알아보려고 시험했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발끈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르는 게 어디 있냐는 겁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시험’이란 말이 없지만 창세기 22장에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얘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얘기입니다. 뒤집으면 하나님이 그때까지 아브라함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똑같은 얘기를 오늘 본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시험이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을 때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이름도 제대로 몰랐으니 말입니다. 흔히 그가 야훼 하나님을 잘 알았다고 전제하지만 그랬을 리 없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야훼 하나님에 대해 잘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해서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도 그를 다 아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시험해봐야 했습니다. 그가 이집트에서 겪을 사건을 이런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이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불합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했어야 통과했을지는 모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불합격했음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최종적으로 불합격시킨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을 것입니다.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어야 할 동반자로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실패를 발판으로 해서 아브라함은 이후에 뭔가를 선택해야 했을 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얘기는 다음 주일에 아브라함과 롯의 얘기를 할 때 더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실패는 우리를 괴롭히고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패는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그 때문에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서 최종적인 것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불합격하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는 실패했지만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때는 실패하고 불합격했지만 그 실패를 밑거름 삼아서 나중에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도 삶도 긴 여정입니다. 단판승부가 아닙니다. 1회전에서는 실패했을 수 있지만 곧 2회전이 시작됩니다. 거기서 만회하면 됩니다. 물론 만회가 자동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1회전의 패배를 제대로 반성하는 사람만이 다음 회전에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악하기도 했고 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음에 선하고 강한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자신의 악함과 약함에서 소중한 진리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오늘의 실패에서 배워서 내일에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신앙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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