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토요일에 국악예배 있는 거, 다 아시죠?
LA 근교에 사시는 분들은 모두 오셔서 함께 즐겁게 우리 가락으로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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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7일
/ 세계성찬주일
그는 강하고 너그러워졌다
창세기 13:1-13
곽건용 목사
유산이나 분배해달라고?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에게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말해주십시오.” 이 사람은 부모에게 큰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형이 그 전부 또는 대부분을 차지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이런 청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판사라도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렇다면 누가 예수께 그런 권한을 줬단 말입니까?
당시 유대사회에는 현대적인 사법제도 같은 게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 랍비가 판사 역할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유산 상속 문제를 예수께 들고 왔다는 뜻은 그가 예수님을 랍비로 여겼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며 그의 청을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유산분배 같은 데는 관심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부탁했던 사람은 허탈해 하며 돌아갔겠지요.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소출이 많아져서 곳간을 더 크게 지으려다가 하나님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말을 들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비유 말입니다.
저는 이 비유가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얘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산분배를 요청받았을 때 예수님은 창세기 13장의 얘기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위험한 일을 겪었는데 이에 대해선 지난 주일에 얘기했습니다. 가나안에 가뭄이 닥쳐 아브라함 일행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갔는데 거기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다가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는 목숨도 건졌고 큰
재산까지 얻어서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조카 롯은 내내 그와 동행했습니다. 일행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베델 근처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때 이미 아브라함과
롯은 많은 가축과 재산을 소유한 부자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이 불어난 식솔과 가축을 거느리고 살기엔
너무 좁았다는 겁니다. 자연히 두 집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빈발했습니다. 우물과 풀이 두 집의 가축을 먹이고 마시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조카와 헤어지는 아브라함의 심정
구약성서는 독자들에겐 친절한 책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생겼으면
그것의 상세한 경과나 거기 관련된 사람들의 의도와 심리상태 같은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줘야 사태를 파악할 텐데 구약성서는 그러지 않고 그것들을 몇
마디로 축약해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사태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데이터 압축파일을 풀듯이 고도로 압축된 얘기를 풀어가면서 읽어야 합니다. 압축파일을 풀어주는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한 그런 소프트웨어는 없습니다. 그저 상상력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많이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롯을 불러놓고 헤어지자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봤습니다. 조카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삼촌의 심정 말입니다.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무려 9백마일 길을 함께 여행했습니다. ‘동고동락’(同苦同樂)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그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걸 다 극복하고 용케
살아남아서 부자가 됐습니다.
그렇게 고락을 나눈 삼촌과 조카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가진 게 너무 많아서 헤어져야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비하면 지금 문명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삶은 양적으로 엄청 풍요로워졌지만 인간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가난이 아니라 풍요가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데 더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했던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고 그래서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에서 그나마 맘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친척과 결별하는 마당이니
왜 안 그랬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최선의 선택은 여기서 평화롭게 갈라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다행히 땅은 넉넉했습니다. 비좁은 도시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것도 꿈같은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땅의 우선선택권을 줬습니다. 조카에게 베풀 마지막 혜택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롯이 왼쪽 땅을 차지하면 자기는 오른쪽 땅을, 롯이
오른쪽 땅을 차지하면 자기는 왼쪽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아브라함의 얘기를 다시 읽고 놀랐습니다.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점들이 이번엔 눈에 들어오더군요. 바로 앞에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자기 목숨 지키고 대접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결코 떳떳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거기까지
온 사람이 취할 행동은 결코 아니었지요. 그는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아내도 남에게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아내를 남에게 넘겨줬던 그가 지금은 조카에게 땅의 우선선택권을 넘겨준 사람이 됐습니다. 이것은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가졌어도 기근 한 방에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는 형편이었으니 말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는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이집트에서 했던 혹독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학습효과였던 것입니다. 고난은 ‘자초’한 것이든 ‘자청’한 것이든 모두 나름대로 학습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자초’한 고난은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그 짓을 했기 때문에 초래된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청’한 고난이란 옳은 일을 하면 고난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아서 초래된 고난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겪은 고통은 전자에 해당됩니다. 자초한 고난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학습효과가 있었습니다. 꼼수로 위기를 넘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자기가 살자고 남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교훈,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이 그것입니다.
신뢰하는 법을 배우다
그는 조카에게 땅에 대한 우선우택권을 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인은
땅 선택의 우선권은커녕 오랫동안 거기서 살고 있던 사람들까지 내쫓지 못해 안달이니 과연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오늘날 유대인은 아브라함을 생물학적 조상으로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을 따른다고 말하지요. 어떤 점에서 그런지 모르지만 확실한 사실은 땅에 대해서만큼은 아브라함과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롯은 눈앞에 펼쳐진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삼촌이 그에게 우선선택권을
줬으니 그가 택하는 땅이 곧 자기 땅이었습니다. 그가 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야훼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멸망하기 이전의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롯은 그곳을 택했습니다. 풍요를 택한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지금 풍요 때문에 삼촌과 헤어지면서도 또 다시 풍요를 택했으니
말입니다. 이는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방금
전, 아니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방금 풍요 때문에 삼촌,
조카의 관계가 깨졌는데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또 풍요를 택하니 말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롯이 그렇게 대단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뭘 잘못 했습니까? 그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에게 흠이라면 소돔에서 구원받은 후 자기 딸과 동침한 일이 흠이라면
흠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그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사건은
딸의 의지에 따른 일이었지 그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딸이 먹인 포도주에 취해서 잠이 들었고
딸들이 잠자는 아버지와 동침했던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그저 보통사람이었을 뿐입니다. 특히 선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악하지도 않은 보통사람이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같은 잘못 반복하는 게 사람이지요.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는데 똑같은 문제를 일으킬 선택을 하는 게 사람이란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택하지 않은 다른 땅을 택했고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롯이 하늘로부터 불벼락을 맞은 소돔을 맨몸으로 겨우 탈출한 다음이었습니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요, 비옥하다고 해서 택했는데 결국 거기서 빈털터리가 되어 나왔으니 말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아브라함과 롯의 얘기를 유목민들의 실제적인 경험에서 나온 얘기로 봅니다. 가축을 이끌고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에게 소돔과 고모라 같이 풍요롭고 비옥한
도시가 얼마나 매력적이었겠습니까. 그들도 거기에 정착해서 살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와 같이 풍요롭고 비옥한 도시가 동시에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배웠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야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라는 말은 유목민이 소돔과
같은 도시에 내린 평가였습니다. 롯은 거기를 택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그의 입장이 되어보면 저와 여러분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선택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결여되어 있는 선택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신뢰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신앙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의 여정은 어떤 길일까요?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으며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는 신앙여정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저는 신앙여정은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뢰가 배울 필요가 있는 거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뢰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배워야 갖출 수 있는 일종의 ‘능력’입니다.
신뢰하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의존은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나보다 능력이 큰 존재에 얹혀가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신뢰는 얹혀 가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뢰를 롯에게 땅의 우선선택권을 넘겨준 아브라함에게서 봅니다. 이집트에서의
경험에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만일 그가 거기서 야훼를 신뢰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했던 행동은 옳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도와주셨을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사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신뢰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닙니다. 신뢰는 그게 하나님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의사와
의지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고 하는 게 아니라 옳게 행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신뢰는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신뢰하기 어렵도록 행동하시는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겪을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곤경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럴 경우 하나님을 신뢰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뢰는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믿는 걸 가리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신뢰는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 곧 신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가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경우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얘기 가운데 유산을 받을 청년의 경우가
그렇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탐욕’을 얘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신뢰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여정을
걸으면서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그는 실패했지만 롯과 헤어질 때 그는 달라졌습니다.
실패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여정은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설교도 다음 주일에 계속됩니다. ♣
신뢰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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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의존은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나보다 능력이 큰 존재에 얹혀가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신뢰는 얹혀 가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뢰를 롯에게 땅의 우선선택권을 넘겨준 아브라함에게서 봅니다. 이집트에서의 경험에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만일 그가 거기서 야훼를 신뢰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했던 행동은 옳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도와주셨을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사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신뢰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닙니다. 신뢰는 그게 하나님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의사와 의지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고 하는 게 아니라 옳게 행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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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좋습니다. 자기 아내를 아내라 하지 못했던 소심한 남자에서 '강한 남자로', 신뢰의 의미를 배운 아브라함의 연단과 너그러움............나도 그처럼......
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