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님의 '출구'라는 표현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기존의 질서에 일종의 대안을 기대한 분들에게는 매우 환영할만한 표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좀 꺼려지는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단 그는 '출구'의 필요성을 적절히 피력했지만,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꾸준한 요구에 대답을 주진 못했다. 그래서 그를 대신하여 '출구'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먼저, 잔나비님의 의도는 이러했다.
현재는 위기이며, 위기 상황은 기존의 체제 아래에서는 답이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좋은 지적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너무도 비슷하 나머지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처한 가장 큰 위기 상황은 바벨론 유수일것이다 (W. Brueggemann ). 이 때 그들이 해결한 방법은 토라 (Torah)에 선지서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즉, 선지서가 이들에게는 출구였던 것이다. 정경이 추가된 것이다.
종교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경이 등장한 것은 단 한번 뿐이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의 탄생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27권이 더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후, 종교 암흑기간을 지나 루터가 개혁을 필요로 했을 당시, 성경 해석의 자율성을 내세워 성서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재림교회는 엘렌 화잇의 글들을 제 2의 정경처럼 받아 들여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결국, 매 위기 상황에서 출구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가 발전해 온 것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라는 것이다.
'출구'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답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출구'는 그 자제로 매우 스케일이 큰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마도 점진적으로 신학을 발전시켜나가면서 해결해야 할 것이기에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사실, '출구'는 이전 것을 모두 버리자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토라와 선지서들, 그리고 신약 성경이 모두 우리에게 귀한 자산 아닌가? 신약이 등장했다고, 구약을 버릴 일이 아니었듯, 지금까지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이룩한 일을 당장 버리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새로운 '출구' 전략을 선교학, 전도법적 차원에서 Biblical Theology 차원의 문제로 봤으면 한다. 2300주야, 1844, 예언 등 예민한 토픽들이 결코 성서 즉 Text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에 접근하고자 하는 방법론은 획일적이지도 않다. 교조주의적 혹은 교회신학적 해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해석을 위해 어떤 헤게모니에도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교단이나 교회이든, 세계적인 신학자이든 상관없다. 다양하게 접근하고 고민하면서 어떤 '출구'가 기다리고 있는지 기도하며 명상하며, 연구하며 진행해 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