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제가 조사심판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2300 주야가 1844년에 끝난다는걸 성경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토픽은 이 누리에 계신 분들중에도 10년이나
넘게 논쟁해온 분들도 계시고, 교회 안밖으로 100년이넘게
논쟁 되어왔던 문제로 제가 더 할말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많은 자료들이 있으니, 님들이
보고 직접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포커스를 맞추고 싶은 것은 조사심판이 왜 영원한 복음인가에 대한 것 입니다.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조사심판의 중심이 되는지, 또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날들중 1844년이여야
하는지에 촛점을 맟출생각입니다. "왜" 에다 촛점을 맞추다보면, 조사심판안에서 드러난
예수그리수도의 사랑이 뼈져리게 느껴집니다. 최소한, 제 경우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꼈던 그 사랑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글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조사심판 1 편에선 욥기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성품을 공격하면서 욥을 물고 늘어졌고, 결국은 욥의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이 우주의 심판대위에 서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체면" 보다는 욥을 더 사랑하시고, 사단의
공격을 욥을 구원하는 (욥자신의
영적 교만으로부터)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결국그러한 과정을 통해 온 우주와 욥 가슴깊이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지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지요. 욥기에 중심에는 사단에게, 욥에게, 천사들에게 조사심판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준 이상, 그 자유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성립 되려면, 그 피조물들에게 "조사심판"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진정원하시는 것들, 그들의
사랑과 믿음, 이런 것 들은 절대 "명령"으로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 다는 것을 느낄때, 오직 하나님이 신실한(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을 느낄때, 진정한
사랑과 믿음이 생기는 것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조사" 받으셔서, 자기가
피조물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가
얼마나 신실하신지 증명해 보이실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조사심판의 첫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다는 아닙니다.
조사심판 2 편 부턴, 하나님
께서 받으시는 조사심판이아니라, 하나님 (예수님)께서 하시는 조사심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뭘 몰라서 하는 "조사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조사심판"을 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입니다. 오직 피조물들을 위해서, 그 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조사심판을 하십니다. 이건 벌써 욥기에서 나왔던 이야기지만,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 확실하게, 더 깊이있게 나옵니다. 그래서 전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조사심판"의 의미를 짚어 본후 우리의 구원과, 야곱의
환란, 일휴, 그리고 1844 를 연결시켜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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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장 2 절은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나라..." 로 시작합니다. 그러다 3절에선
갑자기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합니다. 3절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요셉) 깊이 사랑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물론 아무 의미없이 이름이 바뀌었을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이란 이름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서 "승리"한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더이상 속이는 자 "야곱"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을 이긴, 믿음의
사람인 이스라엘...같은 사람이지만 그 이름이 암시하는 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서 낳았기 때문에 요셉을 더 사랑했단 이야기는 육체적으로 나이가 많았기 때문 일수도 있지만, 육적인
나이와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 졌기 때문일수도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걸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것이랑,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이랑 무슨 상관 있냐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전 많이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영적인 관점으로 요셉을 더 사랑했다면, 이스라엘 (야곱)은 다른 아들들도 똑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됩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야곱이
다른 아들들 을 위해 요셉을 더 사랑할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더사랑 했기 때문에 한일이 "채색옷"을 지어준 것입니다. 당시 채색옷은 아무나 입지 못했습니다. 왕자나
되면 모를까...그 게 포인트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요셉에게 장자권을 물려 주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도 장자권 때문에 쌩고생을 격은 터라, 아마도
일찌감치 교통정리를 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형들은, 요셉을
죽도록 미워할수 밖에 없었겠지요. 당시 문화로선 엄청 불공평한 처사였을테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럴수
밖에 없었습니다. 루우벤-스텝 엄마와 동침 했지요. 시미온 과 레위- 복수심에
불타 온 동네를 학살했습니다. 유다- 며느리 (물론 몰랐다곤 하지만)와 동침했습니다. 이기심에 물든 아들에게 모든 재산과 권력을 물려주면, 그 힘으로 뭘하겠습니까? 더 많이 얻을려고 다른 형제들을 짓 밟고 핍박 하겠지요. 사실 그건 장자권 시스템의 원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세상의
진정한 장자는 둘째 아담인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모든것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숨까지 바쳐서 그가 물려 받은 것을 형제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예수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요10:17). 다시 말하면, 그 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른 형제들(우리)을 사랑 하셨단 이야기 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요셉을 더 사랑한면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영적인 안목으로 요셉의 성품에서 예수를 본 것이란 말이지요. 야곱이 요셉의 마음에서 자기 형제들을 위해 자기가 물려 받은것을 다 나눌수 있는 사랑을 봤단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다른 형제들도 요셉만큼 사랑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 증거는 12-14절에 나옵니다. 형들이 양치러 갔는데 돌아오질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걱정합니다. 다 큰 애들인데 왜 그러나 하실지 모르겠지만 34 장을 보시면 그 답이 나옵니다. 시미온 과 레위가 "더럽힘"을입은 누이 디나의 복수를 하기위해 한 마을을 피로 물들입니다. 그 들을 속여 할례받게 한 다음 제 삼일날 밤 그들이 고통중에 있을때 마을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고, 재물은
빼았고 부녀자들은 사로 잡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후 양치러 간 아들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당연히 걱정됩니다. 어찌보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복수극이 벌어지고 있을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요셉을 보냅니다. 가장 요셉을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또 요셉이 위험해질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를 보냈다는 말은, 그 만큼 야곱이 다른 아들들도 사랑했다는 말이 됩니다.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냈다는 말은 그 만큼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이 것 처럼...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그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 들은 질투심과 이기심에 눈이 멀어 동생을 결국 노예로 팔아 넘기고 맙니다. 그렇게 살려달라고 빌고 빌었건만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렇게
잔인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변화됬을까요? 그 무엇이 그들을 회개케 하는 캐탈리스트가 되었을까요?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치운 이후 그들은
요셉의 옷을 염소 피에 적시고 그 옷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이고 " 이것이 아버지 아들의 옷인지 아닌지 잘 보십시요"
라고 말했다. (창 37:32 공동번역). 야곱은 곧 그 옷을 알아보고 외쳤다. "맹수가 그를 잡아먹었구나. 내 아들 요셉이 찟겨 죽은 것이 틀림 없다."
(창37:33 현대인). 야곱은 몇날 몇일을 대성통곡 하며 위로받기를 거부하였다.
바로 자기
앞에서 고통으로 무너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걍팍한 심장을 가진 아들은 결코 흔치 않습니다...하물며 자기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그 고통을 당한다면이야...
이것이 요셉의
형들이 회개하는 계기가 되지않았을까요? 자신들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들의
걍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 까요?
우리 하늘
아버지 께선 야곱보다 훨씬 더큰 고통을 갈보리 언덕에서 견디셨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맹수에게 찟겨 죽는 모습을 그냥 상상 하면서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선 자신의 독생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찟겨 죽는 모습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맹수들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서 구원 하기를
원하는 자신의 자식들에 의하여... 자신의 독생자가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짓으며 자기를 찾을때, 아버지께선 그냥 바라만 보실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위로해 주고 싶었건만...그렇게 구원해 주고 싶었건만....오직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오직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아버지께선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형들은 이 일을 아주 가슴 깊이 묻어 버렸습니다. 자신들 앞에서 고통으로 망가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이후론
이 일은 다시 거론하기 싫은 그들만의 비밀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자난후, 그 들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요셉의 "조사심판" 이 시작됩니다.
-계속-
요셉의 심판은 시험 심판인데요.
좀더 사색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