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놀이"와 "진리 효과"

by 잔나비 posted Nov 07, 2012 Likes 0 Replies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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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참 이치"라는 것인데, 그래서 참 좋은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진리 문제는 상당히 폭력적으로 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자신만이 진리를 보았고,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거나(교만이나 자기중심주의)


모든 사람이 내가 가진 진리를 똑 같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파시즘, 우월의식)


다시 말해, 진리는 폭력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활용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것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니면 과연 진리라는 것은 어떤 특성을 가진 것인가요??


매우 난해한 이 물음을 조금만이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림교회 문제를 새롭게 돌파할 수 있는 지점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저는 잠시 미술사의 거대한 전환을 만들어낸 "소실점" 이야기를 경유하여 제 이야기를 전개하려 합니다.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발견한 소실점은 근대 회화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회화에 이 소실점이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그림의 세계"는 평면에 "3차원의 세계"를 거의 흡사하게 재생시켜 준 것입니다.


지금은 상식적인 기술/지식이 된 이 소실점은 인류 시각의 역사를 송두리채 바꿔놓은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서구 열강이 소실점의 시각을 가지고 동양의 그림들을 보면서, "기술적으로 많이 뒤쳐져 있다"라고 폄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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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은 그의 책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에서


이러한 소실점이라는 기술은 데카르드적 주체 즉, 모든 판단 기준이 된다고 믿는 코기토(cogito)를 중심하는 세계관의 결과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다시 말해, 소실점을 활용한 시각 작용이 절대적 "진리"가 아닌 서구적 세계관(개인적 주체)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동양의 미술이 서구의 기술보다 기술적으로 부족해서 소실점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것을 의미합니다.


동양적인 세계관에서는 개인을 주체로 두지 않기 때문에 소실점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는 한 사람의 시선을 중심으로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걸 우려했죠.


동양화에서 대상들이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보이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원근감 처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러시아 미술에서는 가까이 있는 것들이 더 작게 그려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역마다 세계관이 다르고, 시각작용도 다르고, 그에 따라 표현도 다르고 진리의 작용과 효과도 다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소실점이 기술적으로 뛰어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보편적인 진리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정리 하자면, 결국 소실점도 절대적 진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동양에는 동양적인 방법론이 있었고, 서양에는 서양의 방법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동양의 방법론이 진리였고, 서양에서는 서양의 방법론이 진리였던 것이죠,


물론, 이후에 동양에서 서양의 방법론을 수용하면서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서구에서 동양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재밌지요.


그래서 요즘은 누구도 자신의 시선이나 견해가 "절대적 진리"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우리는 "진리"라는 개념이나 "진리"라는 말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거나, 부러 없애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인지 부조화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등장하는 개념들이 "진리 놀이"나 "진리 효과"들입니다.






진리 놀이는 "진리"라는 어떤 대상이 갖는 놀이적 기능을 강조한 것이고,


진리 효과는 "진리"라는 대상이 나타내는 치유적 효과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 개념 자체를 폐기 하지 않으면서도 전통적인 진리이해가 갖는 폭력성을 지양할 수 있는 방편들이지요.





제가 예전에 저희 교회 청년들에게 요한복음 14장 6절을 완전히 뒤집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요한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고 적었지요.


그래서 저는 청년들에게 "나는 이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서 일반화해 설명해 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항을 간단하게 뒤집어서 현대적인 개념으로 재정립해보았습니다.


길(way)-소통,      진리(turth)-중요/핵심 정보,       생명(Life)- 창조력,생명력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존재가 곧(=) 예수- 세상을 구원할 자(메시야)로 소개했습니다.


예수만이 진리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지 않고,(이런 해석은 너무 흔해서 진리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꾸로 핵심적인 진리를 유통, 소통시켜서 생명을 유발시키거나, 창의성을 발휘해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이런 해석은 예수 "만"이 구원이라는 기독교 독단론에서도 벗어나는 해석이죠.




그랬더니 대부분의 청년들이 성경 구절을 읊었을 당시 식상해 하던 표정이 펴지면서, 큰 흥미를 가지고 들었으며.


말씀이 끝나자 교회 분위기가  up이 되고,  많은 친구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상담하고 싶다고 찾아오게 됫습니다.


이전의 해석을 뒤집었을 뿐인데, 그 전 해석에서 나타나지 않던 어떤 효과(effect)가 나타난 것입니다요.


저는 그 때, 진리는 하나의 의견/견해(opinion/perspective)가 아니라 하나의 "효과"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리는 그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로 그 정체를 알찌니...^^)




어떤 특정 견해나 해석이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시대마다 사람들에게 들어맞는 복음적 효과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이렇게 유연하고 신선한 견해를 수용하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변동해온 재림교회 교리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특정한 성경 해석이 영원한 진리이고, 그러한 해석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배웠는데,


어느 날 그 해석이 잘 못된 것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떠나는게 맞죠.(그야 말로 멘붕이 오게 됩니다.)





하지만, 재림교회 수많은 오류(해석적, 행정적 등등)들이 드러나는 데도 왜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까요?


지금 이곳에서도 미흡하지만, 여전히 "진리 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떤 분들은 여전히 말씀을 듣고 삶의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기도 하죠.


이것은 재림교회 교리가 진리여서가 아니라 진리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소스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강조하지 않고, 왜 시간이 지나면 폐기할 수 밖에 없는 구시대의 "해석"들에 목을 매는 지,,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진리 효과가 젊은이들에게 발현되는 데 있어서, 소위 전통 교리라고 하는 "박제화된 교리"들은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현대 선교학에서도 자주 나오지만, 현대인들은 교리나 가르침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게 아니라 


인간관계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만난다고 하더군요. 


시대가 바뀌니 진리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뭐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아이들이 진리 효과를 경험하게 해줄 것인지, 그 구태한 교리적 자존심을 붙들고 있을 것인지요.





폐일언하고, 지금은 특정한 해석과 관점을 진리라고 우길 때가 아닙니다. 이미 시대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재림교회 진리라고 믿었던 방법론은 이미 실패했다는 것이 판명이 났습니다. 진리효과가 사라져 갑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진리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진리의 맛을 경험시켜줄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나쁜 바람은 내 보내고 새로운 바람을 들여와야 합니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살고, 미래가 있습니다.


교단 내부에 있는 사람으로써 진정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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