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님의 신계훈 잘못 읽기....

by 오두막 posted Nov 08, 2012 Likes 0 Replies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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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잔나비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저렇게 살아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참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측은하다'는 것은 나의 신앙적 우월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잔나비님과 같은 형편에서 신앙을 해왔고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참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측은이라는 말보다 연민 혹은 반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잔나비님과

잔나비님에게

 

이렇게 부족한 글을 쓰면서 더 많은 오해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보다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면  더 좋을텐데하는....

 

생각이 앞서기도 한다.

 

 

 

2.

난 아직도 마태복음 13장과 실물교훈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의 기별>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누구든 재림 신앙에 흔들림 없이 곧 "빛과 어둠의 설정"을 바꾸지 않고  확신 속에 빛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4:18-19)

 

 

씨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좋은 밭에 있어야. 마음 밭에 떨어진 씨앗이 잘 자라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 아닌가!

 

좋은 밭에 있지 않고, 길 가 밭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마13:19)

 

 

 

잔나비님 신앙의 문제는

 

좋은 밭(햇빛이 잘드는 기름 진 밭)에 있지 않고

가 밭(나무 그늘, 어둠이 간간이 있고 사람의 조잘대는 소리가 있는 곳)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시의 큰 강당에서 무서운 짐승 그림과 역사 도표를 보여주던 전도회의 기억은

아직도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 설교자들의 모습만은 확실히 멋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무서운 짐승 그림과 역사 도표가 의미하는 참 기별을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의 외모나 달변 만을 바라보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엘렌 하몬양도 당시 지옥불의 생생한 묘사를 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그녀의 어린 시절 신앙 생활을 고백하지 않았던가?

 

최첨단 OHP와 달변으로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외양이 아니라 기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3.

잔나비님의

길 가 밭에 있는 특성.

 

기별에 대한 이해보다는 사람을 바라보는 경향은

신계훈을 읽는 자세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서문을 읽는 것이 예의요 시작이다.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에서 저자인 신계훈은 말한다.

 

 

"그래서 현실에 오해가 있었으면 이해를 돕고 성경을 곡해한 결과이면 이를 밝혀, 같은 주님을 함께 믿는 형제들의

사랑의 폭을 넓혀 마침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딤전2:4)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데에 이 책을 쓰는 목적이 있다."

 

 

신계훈 목사님의 저서는 정통과 이단 심포지엄이라는 교리 변증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삶을 소중하게 느끼고

진리를 귀중하게 여기며

양심을 두렵게 알고 신앙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는

 

머리말 앞 페이지의 권유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재림교회가

마지막 때 부르심을 받은 참된 남은 교회로서

하늘로부터 위탁받은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당위성에 대한 양심 고백의 성격이 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계훈 목사님이 이단 토론회에서도 어떤 토론자보다도 돋보인 이유는

그가 달변이어서도 상대방을 압도 할 수 있는 교리 전문가이어서가 아니었다.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성령의 음성이 그 연약한 대학 총장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신계훈 목사님이

처음 목회를 나와 강원도 춘천의 모교회에서 처음 설교단에 섰을때 벌벌떠는 목소리로 겨우 설교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신계훈은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기도의 생애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께 맡김으로서 용기있는 변증가가 되었고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신앙적 양심을 통해 성령께서 친히 말씀 하시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앤드류스에 유학을 했기 때문에 신계훈이 된 것이 아니다!

 

신계훈 목사님이 삼육대학 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니엘이나 계시록 등을 강의 하실때 그분이 강조하신 예언의 신 한 구절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은 죽음처럼 강하나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엘렌 화잇 시대의 소망)

 

 

신계훈은 교리 변증가나 투사가 아니다!

신계훈은 다니엘이 바벨론 박사 친구들을 이해하기 위해 왕의 진미를 먹지 않았던 것 처럼 "노래방으로, PC방으로, 술자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신계훈은 하루 세 번 하늘 예루살렘(예수님이 계신 지성소)로 향하여 열린 창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친구들을 위해 울며 기도를 했다.

 

 

신계훈은 삶을 소중하게 느낀 사람이다.

신계훈은 진리를 귀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신계훈은 양심을 두렵게 알고 신앙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한 사람이다.

 

그는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진리의 빛으로 어둠을 이긴 사람이다.

 

 

 

4.
잔나비님들은 길 가 밭에 있는 사람이다.
잔나비님들은 돌 밭에 있는 사람이다.
잔나비님들은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사람이다.

 

참된 빛을

하나의 '교리'로 전락시키고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빼앗기는 자요, 넘어지는 자요,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

 

곧 어두움의 사람들이다.

 

어두움 속에서 방황의 날개 짓을 하는 어떤 잔나비들도

볕 잘드는 좋은 밭에 있다면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는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S. 잔나비님의 글에 칭찬을 하는 분들은 정말 나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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