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상에 자장면 올리기: 성경에 나오는 희한한 이야기

by 김원일 posted Nov 10, 2012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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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8 / 성령강림절 스물세 번째 주일

 

사랑으로 묶다 1

아브라함 이야기 6

창세기 22:1-19

 

곽건용 목사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것은?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한 얘기를 전하는 창세기 22장을 읽겠습니다. 이 얘기는 창세기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얘기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얘기는 읽는 사람을 가장 곤란하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이 어디 있습니까. 또 바치란다고 정말 바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이 좋다고 해도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이 어디 있으며 그런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겁니다. 그렇게 해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많은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이 얘기를 모범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얘기로 읽지만 정말 진지하게 이 얘기를 읽는다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의 얘기로만 읽었지 아브라함의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서 읽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도덕률을 어기는 이런 명령을 하나님이 했을 리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을 했을 리 없다는 얘기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22장을 읽기 전에 서론 격으로 얼마 전에 제가 신문에서 읽은 칼럼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는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말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모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오늘은 창세기 22장을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할 터이니 얘기하다가 끊는 것보다는 이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 철학이란 학문은 정말 인기가 없습니다. 대학에서 철학 과목이 폐강되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철학과를 없애는 대학들도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별로 없고 기껏해야 부전공으로 택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는 매우 바쁜 철학자가 한 사람 있다고 합니다. 강신주 선생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바쁜 철학자가 있다는 얘기가 믿어지지 않아서 혹시 꽃미남인가 싶어 사진을 찾아봤더니 그렇지는 없더군요. 소크라테스도 추남이었다고 하지요. 어쨌든 꽃미남이라서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니 더 놀라운 일이지요. 꽃미남도 아닌데 하루에 서너 번 이상의 강연 일정이 잡혀있다고 하고 책도 엄청나게 많이 낸다니 말입니다. 이 분의 책을 몇 권 읽어봤는데 내용은 깊고 참 쉽고 재미있게 글을 쓰더군요. 그래서 인기가 있나 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 느낍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주어서 그 사람을 행복해지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길이 갈라집니다. 첫째로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상대방이 하게 애쓰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방에게 주려고 노력합니다. 상대방이 그걸 탐탁치 않게 여기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싫어하지?” 하면서 말입니다. 거기서 그치면 다행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 “왜 내가 이렇게 널 위해 애쓰는데 너는 그걸 싫어하냐?”면서 섭섭해 하거나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둘째로 보편적으로 누구나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물도 비쌀수록 좋은 것이고 음식도 비쌀수록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사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가져야 행복해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세 번째 경우가 바람직한 사람이요. 그러면서 필자는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고인의 배우자일까요? 아니면 가족이나 친척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친구입니까? 그렇지 않답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은 상조회사 직원이나 조의금을 대신 전달하려고 온 사람일 거랍니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과장해서 슬픈 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절이나 법도 같은 것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게 해주니까 말입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성경에 있는 까닭은 뭘까?

 

사람을 대할 때 형식에 치중할수록 그 사람을 덜 사랑하는 것이랍니다. 형식에 치중한다는 말은 예의나 법도 같은 걸 잘 지킨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좋아한 음식이 짜장면이라면 아버지 제사상에 짜장면을 올려놓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제사상을 차린다는 건 고인이 와서 제사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지요. 기왕 음식을 차리려면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을 차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짜장면을 제사상에 올린다면 분명히 누군가가 그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때 진정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제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던 음식은 짜장면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모른다면 제사상에 어떤 음식을 올려놔야 할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법도와 예절, 관습을 넘어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좋아한 음식이 뭔지 알더라도 관습을 넘어설 용기가 없다면 제사상에 짜장면을 올려놓을 수 없겠지요.

 

이런 생각들은 창세기 22장을 읽는데 도움이 됩니다. 시간 관계상 그 얘기를 오늘을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우선 분명히 하고 싶은 점은, 저는 이 얘기를 변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자식을 바치라는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린 야훼를 옹호할 생각도 없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수행하려고 했던 아브라함을 옹호할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저는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어떻게 하라는 얘기입니까? 이 얘기는 왜 성경에 있는 걸까요? 이해할 수도 없고 따라서 할 수는 더더욱 없는 얘기가 왜 여기 있느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해 달라는 겁니까? 저는 이 얘기는 이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이고 기껏해야 ‘독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누구나 다 이걸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면, 당사자가 되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공감할 수도 없다는 얘기가 창세기 22장입니다.

 

그럼 시간이 얼마 없긴 하지만 본문을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얘기는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런 일’은 앞장에 나와 있는 얘기를 가리킬 터이니 이삭이 태어나고 이스마엘이 쫓겨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21 1절 이하를 보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삭이 드디어 태어나 부모에게 웃음을 안겨줬습니다. 이게 밝은 면이라면 그의 탄생 때문에 하마터면 상속자가 될 뻔했던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이 성취됐음을 의미합니다. 얘기가 일단락 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얘기가 이어질까요? 약속이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본문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시험’이라고 하는 무거운 언어를 내놓습니다.

 

 

뭘 알려고 시험했을까?

 

본문은 아들을 자기에게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은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시험’은 무엇인가를 알거나 확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까닭은 학생의 실력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한세상 살면서 학교 시험 말고도 수많은 시험을 치릅니다. 사랑도 시험하고 효성도 시험하며 능력이나 신뢰도 시험합니다. 이 모든 시험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이미 안다면 시험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얘기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는 말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2절에서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for now I know that you fear God).”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확인하려 했던 겁니다. , 무엇을 확인하려 했을까요? 그의 믿음에 대해 의심이 생겼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지키는지를 보고 싶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의 믿음의 ‘성격’을 알고 싶었을까요? 궁금한 게 하나둘이 아니지만 본문은 그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고 얘기를 풀어갑니다.

 

본문을 한 절씩 읽어나가는 것은 다음 주일로 미루고 오늘은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에 대해서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침묵과 적막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말이 적다는 것입니다. 꽤 할 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 누구도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한 마디씩 하는 말에 담겨 있는 의미가 깊습니다. 설화자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여백이 많다는 뜻이고 읽는 사람이 의미를 결정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구조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 부분 모두 누군가가 아브라함을 부르면 아브라함이 대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고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야훼가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세 번 모두 동일합니다. 히브리어로는 한 단어이고 영어로는 “Here I am.”인데 우리말 성경은 약간 달리 번역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삭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버지!”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세 번째는 천사가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여기서도 역시 아브라함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각 경우에 아브라함은 부른 하나님과 이삭, 그리고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했고 두 번째 경우에는 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칼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세 부분이 모두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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