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구원해줄게’라는 의지에 숨은 폭력성_펌글

by 잔나비 posted Nov 13, 2012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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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원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27159.html


타인을 ‘밑바닥 인생’에서 구해내겠다는 생각은 아름답지만 위험한 상상이다.

구원의 의지는 순수한 선의에서 우러나오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욕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것이 자선이나 교육의 형태로 나타날 때는 더욱 은밀한 폭력성을 띠기 쉽다. 누군가를 밑바닥 인생에서 구한다면, 

그다음에는 어찌할 것인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해도, 구조자와 피구조자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권력관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구원에는 뜻하지 않은 폭력성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타인을 구원할 수도 있지만, 

그 구원의 힘은 구조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게다가 구조자와 피구조자 사이에 싹트는 감정이 사랑에 가깝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너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는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독단으로 바뀌기 쉽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구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타인을 구원한 후에도 그 사람과 ‘친구’가 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자부심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받았다’는 부채감에서 자유롭기는 더 어렵다. 

구원이 필요한 곳은 도처에 흘러넘친다. 하지만 그 구원은 구조자의 것도 피구조자의 것도 아니다.

버나드 쇼는 일찍이 이 ‘구원의 폭력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로 더 잘 알려진 희곡 <피그말리온>에서 

언어학자 히긴스는 거리의 꽃 파는 처녀 일라이자에게 ‘귀족형 영어와 고상한 에티켓’을 주입시킴으로써 

그녀를 일약 사교계의 여왕으로 등극시킨다. 일라이자의 꿈은 ‘올바른 영어’를 씀으로써 어엿한 꽃집 점원으로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사교계의 여왕으로 떠오르자, 그녀는 꽃집 점원도, 귀부인도, 숙녀도 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구원자-피구원자 사이의 부채관계’와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미묘한 감정의 전류가 흐르지만, 

히긴스는 끝까지 구원자의 특권을 사수함으로써 자신에게 최초로 찾아온 진정한 사랑의 힘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한다. 무언가를 조건 없이 주는 것만큼 기쁜 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받는 일의 불편함’은 잘 알고 있다. 

동정이나 연민에 대한 사람들의 알레르기 반응은 ‘기쁘게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는 사람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주는 것,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마냥 기쁜 일 아닌가. 

하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타인에게 주는 사람들은 ‘주는 마음’ 또한 왠지 편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는 이 ‘주는 사람의 불편함’이 지닌 신화적 본질을 성찰한다. 

내가 타인에게 준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주었는데도 마음이 불편한가. 내가 누군가에게 값비싼 선물을, 

엄청난 지식을, 대단한 기회를 주었는데도, 왜 내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는가. 우리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줌’으로써 

너무 커다란 기쁨을 얻기 때문에 그 기쁨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신에게 혼쭐나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지는 않은가.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증여’의 주체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인간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면, 그 선물의 소유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라는 거대한 신화적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적 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힘’이 아닐까. 

남을 돕는 일을 자신의 경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극단의 에고이즘에서 우러나온 허울 좋은 이타심을 ‘자선’이라 표현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받는다.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만 보답하고, 선물을 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선물을 준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만 도움을 주고받는다면, 이 세상에는 어떤 뜻밖의 기쁨도, 증여의 보람도 없을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 식의 교환이 아닌, 주고받는 일 자체의 기쁨을 소통하는 일. 엉뚱한 이에게 주고, 

예상치 못한 이에게 받기를 통해 인간은 ‘주고받음’의 주체가 결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끼리만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해마다 산타클로스를 기념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구원이나 선물을 자신의 소유물로 등록하고 싶은 욕심을 치유하기 위해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발명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너 사이에 ‘신의 사랑’이 개입하는 순간, 우리는 주었다는 자만심과 받았다는 부채감으로부터 동시에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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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이 진리를 가졌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만 구원이 전달된다고 생각할 경우

생각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글입니다...

물론, 본글은 부채감을 생성시키는 구원 전달방식은 "사랑"의 시스템이 아니라 "이해관계" 시스템에 가깝다는 주장에 방점이 찍혀있죠.

'청소년' 인문학이라는말에 우리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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