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받을 자들.....

by 박진하 posted Nov 17, 2012 Likes 0 Replies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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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 1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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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극히 잘 아는 성경 이야기이다.

무화과 때가 아니기에 열매가 있을리 만무하지만,

참 무화과(비쿠루)의 전조 즉 '탁쉬'가 없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저주를 하신 것이다.

즉 참 열매의 가능성이 전혀 없이 입만 무성한 것에 대한 저주이시다.

 

이것은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보여 주신 것이지만

오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중대한 교훈이 있다.

 

열매  없는 신앙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열매는 없이 말만 뻔지르르하게 해 대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늘 말로만 떠들고 행함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안식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더럽히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비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자비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전혀 실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계명의 참 정신은 사랑이라고 하면서도

(그래서 그 계명의 문자는 마구 짓 밟아 버리면서)

자신들의 삶과 말과 행위와 글들 속에서는

전혀 그 사랑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자유, 복음, 사랑, 자비만을 강조하면서

율법, 의무, 공의, 엄위를 무시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 중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만 강조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성화된 삶과 

그 삶 속의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인다운 열매는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렇다!!!

예수교는 사실 제사보다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이다.

안식일인 토요일마다 예배를 꼬박 꼬박 드리면서도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예배는 말짱 헛 것이다.

십일조를 아무리 철저히 드려도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한을 품는다면

그 모든 행위는 말짱 도루묵이다.

 

매주 토요일을 안식일로 기억하여 꼬박 꼬박 예배를 드리며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정신은 온통 세상에 속해 있고 마음은 세속으로 더럽혀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짐승의 표요 바벨론이다.

안식일을 비록 몰라 일요일을 주일로 알고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진정한 복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로 말미암은 속죄의 뜨거운

경험과 죄사함의 확신을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印)이다.

 

안식일을 평생 지켰어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 자매에 대해 늘 증오심과 미움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은 안식일 교인은 천국에 못 가도

일요일을 평생 지켰어도

형제 자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선을 행한 일요일 교인은 천국에 갈 수 있다.

 

물론, 안식일을 깨닫고 그 날을 매주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며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부르시며 찾고 계시다.

그러한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자"들인 저 여자의 남은 자손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인 성도들인 것이다.

 

십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이다.

십계의 문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이다.

물론 십계의 문자도 중요하다.

문자가 없는 의미와 정신은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간음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이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시다.

매 안식일마다 예배를 통해

그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우리가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안식일은

날자의 구별만을 일컫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날에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형제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는 법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매주 토요일을 안식일로 기억하여 교회에 가면서도

형제 자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법을 잊어 버리는 사람은

안식일 교인이 아니라 토요일 교인이다.

유대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결론은 다음 성경절 안에 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5-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이 여기에 들어 있다.

말로만 하지 말고

"가서"

"행하라"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복음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다.

이런 곳에서 손가락 놀리며 자판기로 떠들어 대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혹시 우리는 입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들은 아닌가?

혹시 우리는 참 무화과인 비쿠루의 전조인 탁쉬조차 없는 자들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저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의 운명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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