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전제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한다...(조사심판3편)

by student posted Nov 26, 2012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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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우리 교회가 복음에,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포커스를 맞췄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그런면에서 민초에서 말하는 재림교회에 대한 문제의식, 깊이 공감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문제의 근원은

"조사심판"같은 "특수" 교리가 아니라 Penal Substitution (법적인 형벌을 대신받음) 신학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런 사상은 근본적으로 "화난 하나님을 달래야" (appeasement)한다는 전제가 깔린 신학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파워풀하게 마음에 와 닫지 않을 뿐더러 재림교회 "특수 교리"들과도 사실은 별 상관 없는 신학이죠.  
우리교회 신학자들이 일반 개신교의 대속신학을 통해 십자가를 이해하기 때문에, 재림교회 "특수 교리"

들은 십자가가 빠지고 이상하게 됩니다.  "조사심판"도 "화난 하나님"의 안경으론 십자가가 없는 아주 고약한 교리가 되 버리고, 종말론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화잇은 피날 섭스티튜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대쟁투"사상은 "Christus Victor model"
(승리하심) 과  "Healing model"(치유하심)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이런 단어들을 사용한건 아니지만 그런 사상이 그녀의 대쟁투 총서에 널리 깔려 있다는 말이죠. 화난 하나님을 십자가로 달래야 한다는 사상은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피날 섭스티튜숀 사상은 많은 보수파 개신교 신학자들을 "exclusivism" 으로 몰고 가는 덫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화잇은 진정한 "inclusivist" 였습니다 -성경을 전혀 몰라도 자연계를 통해서 만난 "예수"를 통해 구원 받는  사람이 많다고 화잇은 생각했죠.


암튼 "Christus Victor model" 과 "Healing model" 의 관점을 밑바침으로 우리 "특수"교리들을 바라볼때 엄청난 은혜로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나게 파워풀한 복음을 
맡기셨다는 걸 깨닭게 됩니다. (최소한 제 경우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사심판"같은 특수 교리를 이야기 하는 것은 그 교리들을 "변론"하자는 목적보단 그 교리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사심판"을 마무리 짓기 전에 시편 22 편을 같이 살펴보면서 십자가에서 드러난  또 다른  "구원"의 의미를 음미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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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선 십자가 위 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사복음서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않는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생각은 그 들이 관찰 할수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그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를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그중 시편 22 는 예수께서 마지막 고통중에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어두움이 우리 주님의 영혼을 덮어버려서 그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볼수 없었다.(시대소망 753) 아버지의 
 얼굴은 그 분으로 부터 완전히 가리워진바 되었다. (이사야 59:2) 그 분은 죄의식 때문에(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기에 - 벧전 2:24)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영원전부터 아버지의 임재하시는 빛 가운데 거하시던 주님께는 그 빛이 완전히 거두어 지면서 감당하기 힘든 초 인간적인 절망감과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주님께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시련과 고통의 시간에 아버지께 부르짖는다. 그러나 응답이 전혀 없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줄기차게 아버지께 매 달리시건만, 영 소식이 없다. 그 와중에 어둠이 찾아온다.
사람이 너무 큰 스트레스에 싸이면 시간 관념이 달라진다. 매초가 몇 시간같이 느껴지는 고통... 주님은

지금 낮이 가고 밤이 왔다고 생각하셨다. 그 만큼 큰 고통 중에 계셨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 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예수께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무 거룩하시어,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있는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 위로를 받으시고자 구약의 역사를 짚어보신다.  거기에는 믿음의 열조들이 아버지께 부르짖을떼 자비와 사랑으로써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그러나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도 자신의 기도 만큼은 끝까지 들어 주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결론을 내리신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아 이 놀라운 사랑! 진짜 벌레같은 우리들을 높이기 위해 자신은 얼마나 낮아 지셔야 했단 말인가)!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경해아할 대상에게 되려 멸시와 조릉을 받아 본적이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하신다.  그 분께선 자신을 가장사랑하고 존경해야할 자신의 백성들로 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그것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달리신 그 크나큰 사랑의 징표인 십자가를 그 들은 오히려 주님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도구로 삼았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자 없나이다."


이제 예수께선 당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짚어 본다. 태어난 순간 부터 아버지의 섭리에 의해서 
태어났고 또 매 순간 (젖먹을 때에도)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아욌다. 근데 제일 필요한 순간, 제일 의지하고 싶은 순간,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 다가오는 절망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바산은 거인들의 땅이다. (신명기 3:11-13). 힘쎄고 거대한 황소들이 예수님을 멸하려고 둘러쌌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는 악인들을 말하는게 아니다. 또 그 악인들을 부추기고 있는 
악한 천사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 예수를 멸할수 없었다. 만약 그들로 부터 "구원" 받기를 원했다면, 아버지께 기도할 필요도 없었다.  그 냥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 오면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완전히 자진해서 달리신 것이 었다. (요10:18)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 위해서 고투하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자기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함 이었다. 


사단이 유혹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쥐어 짰다. "너 이렇게 죽으면 아버지와 영원히 헤어진다."

 "왜 그래야만 하나?" "아무도 너의 희생을 알아주지도, 감사하지도 않는다"

 "너의 톱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 " 너의 어머니 마저 너가 제발 십자가에서 내려 오길 바라고 있다."

 "이런 한심한 인간들을 위해 네 아버지의 품을 포기한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이런 악한 패륜아들을 위해 하늘의 영광을 포기 하겠다구?
그게 제정신으로 할 일인가?" 정말 구절 구절 맞는 말이었다. 정말 구절구절 말이 되는 말이었다.
과연 이런 인간들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영원히 포기하라구? 정말 온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악물고 이 유혹과 싸웠다. 온 힘을 다 해 악의 세력과 사투하고 계셨다.
그러나 이 유혹들은 "찢고 부르짓는 사자"같이 계속 주님께 달려들의 주님의 상한 영혼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예수께서는 혼신을 다해 몸부림 치며 이 유혹과 싸우고 또 싸웠다. 온 힘이 다 빠져 "물같이 쏟아"진바 되었다.
진이 다 빠지고 나니, 이때까지 잊고 있던 육체적인 고통이 몰려왔다...몸의 모든뼈가 어그러지는 고통...

얼마나 심적으로 괴로웠으면, 이런 극심한 육적 고통마저 잊고 있었단 말인가?  극치의 고통중에 우리 주님의 마음이

"촛밀"같이 녹아내린다. 다시 말하면,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육체적으로나 정신 적으로나

"사망의 진토"에 같혀 있는 산 송장이나 다름없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여기서 주님이 악한 무리들을 "개"라고 욕하시는게 아니다.  주님을 멸망시키려 십자가를 둘러싼 개들은  자기 자신부터 살고 보자는 육의 욕망이었다.  들개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무조건 살아 남고 싶은  본능...이것이 개의 세력이다. 자기가 그 렇게 구원 해주려고 하는 이들이 자기의 
수족을 찌르고, 자신의 모든 뼈를 셀 만큼 온 몸 구석구석 고통을 주고, 아무렇치도 않은듯 제비 뽑아 자신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육의 본능 (우리 죄의 본능-아버지의 뜻이 아닌 또다른 뜻)이 울부짖는다. 제발 저런 것들을 위해 바보짓 하지말고 네 자신을 살리라고... 이게 바로 사랑과 반대되는 "개의 세력"이다. 이 개의 세력에 넘어가면, 우리들의 구원은 물 건너 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급하게 부르짖으신다. "여호와여...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님께서 그렇게 다급하고 필사적으로 이 개의 세력으로 부터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유일한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려는 우리들을 위한 자기자신의 사랑이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죽을힘 다해서 아버지께 간청한 구원은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포기하고 죽는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영존하신 생명마저 포기하며 지키고 싶었던 그분의 유일한 것은 , 바로 우리들을 위한 죽음보다 더강한 그 분의 사랑이었다.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 이 아니다. 예수께서 갑자기 뭔가 깨닭은 것이다.
그렇게 혼신을다해 자신의 원수들을 구원하고픈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을 본 것 이다. 이 사랑이 과연 어디서 왔나? 아버지께선 나를 버리신게 아니라

늘 나와 함께 계셨구나! 특별한 증거가 주어져서 깨닳은 것 이아니라, 믿음으로 깨닳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이사랑, 감사히 온 천하에 알리리라! (i.e. 내가 죽으리라).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여기서 부터 시편 22 장 끝 부분까진 아버지를 찬송하는 노래다.  우리들에게 창조주가 아닌 형제로서 다가오시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린 예수님...그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 까지 우리를 "형제"로 부를 수 있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 하시며 돌아가신다.  히브리 12:2 절에 보면 예수께선 "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다.  그 즐거움은 바로 우리들의 구원이었다. 그 즐거움 때문에 사망의 고통에 굴복치 않고 승리 하신것이다.  이 주님이 이젠 우리의 즐거움이 되도록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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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포인트: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울부짖었던 구원은 자신이 살아서 하늘로 올라 가는게 아니라,
육신의 이기심 (오히려 그렇게 올라가고 싶은 마음)으로 부터 우리를 향한 영원하고, 절대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 (곧 하나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었다...비록 자신은 영원히 죽을 지라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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