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이 들어봄직한 장로교 목사의 설교

by 김원일 posted Dec 07, 2012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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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 / 대림절 첫째 주일

 

계절은 분별하는데....

누가 21:29-33

 

곽건용 목사

 

대림절은 기다리는 절기

 

대림절은 아기 예수가 구세주로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보통 네 주간 지키지만 우리 교회는 성탄절 직전 주일을 성탄주일(23)로 지키기 때문에 오늘 시작해서 성탄주일 직전까지 세 주간 동안 대림절을 지키게 됩니다. 대림절을 뜻하는 영어 ‘Advent’는 ‘다가오다’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에서 왔습니다. 대림절의 주제는 당연히 ‘기다림’입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시를 한 편 낭송하겠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기다리는 마음’이란 시입니다.

 

기다림 때문에 눈이 내리게 하소서.

기다림 때문에 꽃이 피게 하소서.

푸른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 꽃은 꺾여 찬거리에 흩어졌으나

오직 기다림 때문에 눈이 내리게 하소서.

오직 기다림 때문에 새벽이 오게 하소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 / 야윈 어깨 위의 눈을 털며 쓸쓸히 가는

그대의 마지막 뒷모습은 사라져가도 / 산과 산은 이어지고 강과 강은 흘러흘러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을 믿고 기다리나니 / 기다리는 자의 새벽이 밝아오게 하소서.

기다리는 자의 마음마다 새벽이슬이 되게 하소서.

추운 바람 속에서 별들은 흐느끼고 /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또 외로우나니

어둠 속에서도 신뢰를 나눔으로써 / 어둠의 그림자로 빛이 되게 하시고

오직 기다림 때문에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사랑 때문에 기다리게 하소서.

기다리는 자의 새벽마다 눈이 내리게 하소서.

 

기다림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는 유대인이라면 모를까 기독교인들이 대림절을 지키는 것은 얼핏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2천 년 전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이미 오신 분이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재림’(second coming)을 기다린다면 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니 대림절이라는 절기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재림을 기다린다면 말구유에 아기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구름 타고 천군천사들과 함께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겠지요. 하지만 대림절에 이미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게 꼭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대림절에는 이 얘기를 세 번에 걸쳐서 하려 합니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개념

 

희랍사상에는 시간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첫째는 길이로서의 시간, 곧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길이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짓는 찰나로서의 시간, 우리말로는 ‘때’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수평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를 오래 살면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늘어갑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이것과 구별됩니다. 카이로스는 길이와 상관없이 한 사람의 생을 결정짓거나 결정적으로 바꾸어놓는 운명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그리고 로마를 등지고 떠나던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외치며 지팡이를 땅에 꽂고 로마로 발걸음을 되돌렸던 순간도 카이로스였습니다.

 

‘미래’라는 시간에도 크로노스, 카이로스와 비슷한 개념이 있습니다. 라틴어에는 ‘미래’를 가리키는 두 가지 말이 그것입니다. 첫째로 내가 만들어 가는 미래인 ‘푸투룸’(futurum)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결단하고 내가 행동함으로써 만들어가는 미래입니다. 둘째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기로부터 다가오는 미래인 ‘아드벤투스’가 있습니다. ‘푸투룸’은 비유하자면 한 사람도 밟아보지 않은 흰 눈 덮인 벌판처럼 내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빈 공간으로서의 미래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 나의 결단, 그리고 나의 행동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미래입니다. 반면 아드벤투스는 나의 의지와 결단과 행동과는 상관없이 내게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아드벤투스’입니다.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무에 잎이 돋고 열매가 맺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의지를 갖든 무슨 결단을 했든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새순이 돋으면 봄이 온 줄 알고 잎이 무성해지면 여름이 온 줄 알며 열매가 맺히면 가을이 온 줄 알 따름이지 그것을 앞당기거나 늦출 수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가 그런 줄 알고 준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반긴다고 해도 앞당길 수 없고 그것이 싫다고 해서 다가오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왜 어리석었을까요? 그는 어느 해에 평년보다 더 많은 곡식을 거뒀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곡식을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창고를 더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생각에, 먹을 것이 넘치게 쌓여 있으니 실컷 먹고 놀자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곡식이 많아져서 더 큰 창고를 지으려 했던 게 문제였을까요? 그게 문제라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남는 것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야 했다는 얘기일까요? 가진 것이 많다고 놀고먹으려 했다는 게 문제였을까요? 그럴 수는 있겠지만 이 비유에서 그 때문에 부자가 어리석다는 얘길 들었는가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넉넉하게 가지게 됐다면 놀고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몇 달 정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비유에서 부자가 어리석었던 것은 지나친 탐심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탐욕은 만악(萬惡)의 원인입니다. 사람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죄가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탐욕을 부추기는 체제 아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그가 어리석었던 것은 탐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놀고먹으려 했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놀고먹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많이 가졌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했기 때문에 어리석다는 얘기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혼자만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옳지 않지만 여기서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어리석었던 것은 미래라는 시간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와 결단과 행동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푸투룸’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하나님이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시면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누가 12:20)라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오늘밤’은 ‘푸투룸’으로서의 미래이지만 동시에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뜻에서 ‘아드벤투스’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늘 밤’이 아드벤투스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유를 읽으며 부자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하지만 우리네 모습 또한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미래는 우리가 개척하고 쟁취해야 하는 시간일 따름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실제로 창고를 지으려 했고 우리는 그걸 머리로만 짓는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뭐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우리도 우리의 미래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에 좌우된다고 믿고 사니까 말입니다.

 

이런 태도가 전적으로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진취적인 삶의 자세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기독교인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개척자적 자세는 기독교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푸투룸’이 미래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내 의지, 내 결단, 내 행동과 상관없이 저기서 다가오는 ‘아드벤투스’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을 미리 당겨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 때가 되어 자연이 변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 변화를 보고 봄이 왔음을 느낄 따름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푸투품’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는 사람만이 ‘아드벤투스’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아드벤투스’의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는 사람만이 ‘푸루툼’의 미래를 잘 설계할 수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진리입니다. 얼른 납득이 안 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지요. 하지만 이 역설은 확고한 진실이고 또 진실이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내 의지 및 노력과 상관없이 타력으로 이루어지는 일과 내 의지 및 노력으로 자력으로 이루는 일을 구별하곤 합니다. 그래서 종교적 구원에 대해서도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종교에서 이 둘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종교가 둘을 구별한다면 그 종교는 잘못된 종교입니다. 자력구원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자기의 힘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고 타력구원이라고 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가 됐든 바른 종교인은 신이 하는 일이라고 해서 자기는 손 놓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자기의 힘만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차원에서나 공동체적 차원에서나 미래에는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등하며 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것도 그저 적당히 애쓰고 노력하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힘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도 될까 말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만 갖고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예수의 충실한 제자로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드벤투스’의 사건입니다. 저기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시간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은 미래에 대한 두 개념과 연결됩니다. ‘크로노스’는 ‘푸투룸’과 연결되고 ‘카이로스’는 ‘아드벤투스’와 관련된다는 얘기입니다. 시간을 ‘크로노스’로만 사는 사람은 ‘아드벤투스’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푸투룸’에 머물기 십상입니다. 그는 미래에 뭔가 이루겠다고 꿈꾸고 그것을 위해 애쓰며 삽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내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이라고 생각되면 갈팡질팡하다가 끝내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애에는 ‘카이로스’의 순간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그리고 미래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아드벤투스’의 차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시간을 이끌어 가시고 결정적인 시점에 수직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감나무 아래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듯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란 얘기가 아님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푸투룸’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던 우리네 삶에서 ‘아드벤투스’ 차원의 미래를 회복하는 기간입니다. 아기 예수를 제대로 기다리려면,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제대로 기다리려면 이 둘을 잘 아울러야 합니다. 기다리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대림절을 뜻 깊게 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직 기다림 때문에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사랑 때문에 기다리게 하소서 / 기다리는 자의 새벽마다 눈이 내리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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