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는 없다. 정말 없다. 메시야 해체주의적 설교

by 김원일 posted Dec 12, 2012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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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9 / 대림절 둘째 주일

 

메시야는 없다

누가 7:18-23

 

곽건용 목사

 

세례자 요한의 얼굴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에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구세주보다 앞서 와서 구세주의 길을 예비했던 바로 사람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정도입니다.

 

절기에 따라서 매주일 예배 읽는 성서구절을 정해놓은성서주기표 따르면 오늘은 누가복음 3 1-6절을 읽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 7 18 이하를 읽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이지만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다릅니다. 3장에서 요한은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와서 길을 닦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굽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져야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해야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메시야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회개 메시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해야 일종의 준비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서 속에 던져진다.소름이 끼치지 않습니까? 살벌하다는 느낌이 정도가 아닙니까? 회개를 촉구하는 서릿발 같은 그의 외침을 듣고 군중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물론 그들도 한편으론 괴롭고 불편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의롭고 당당한 외침에 막히고 답답했던 그들의 속이 뚫린 느낌 아니었을까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진실한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귀에 달콤한 말들만 전해지는 아닙니까? 전하는 말이 하나님이 전하기 원하시는 메시지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삶에 부합하는 말씀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성공 지향의 메시지만 난무하는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런 상황을 교인들 탓으로 돌려왔습니다. 요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올바른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그래서 목사들도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귀에 달콤한 말만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사람들이 달콤한 거짓 복음에 그토록 쉽게 넘어가는 까닭은 참된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 막히고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농부가 밭을 탓하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데 목사들이 그걸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하는 아닌가 말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려고 누가복음이 전하는 요한에 관한 말씀들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이번에 읽어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야가 정확하게 누군지 끝내 모른 죽었다고 말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이번이 처음입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나아가자 요한이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텐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3:14). 마태는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달랐지만 결국 비슷한 얘기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예수를 가리키며 사람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1:29). 요한복음 역시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구체적으로 누군지 세례자가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이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메시야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은 얘기에도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3 21-22절은 단지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고 전합니다. 여기서는 누가 예수께 세례를 줬다는 말이 없습니다. 전에 유행했던 말을 쓰면 누가 예수께 세례를 줬다는 말이, 주어 없습니다. 물론 이에 앞서 3절에서는 요한이 백성들에게 세례를 줬다고 말하긴 하지만 정작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일을 전하는 구절은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로써 상황을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누가복음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했다는 점을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저의 주관적인 해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누가복음은 요한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오늘의 본문이 말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을 비판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 불안하고 초초하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 역할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정작 메시야가 누군지는 확신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이오실 누군지 알았다면 이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그는 메시야가 누군지 확신하지 못했음에 분명합니다. 모르니까 묻지 않았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은그가 바로 나다!라고 직접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모든 쉬웠을 텐데 말입니다. 대신 예수님은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가 나다!라고 말했다면 쉬웠을 이렇게 길고 복잡하고 모호하게 말씀했을까요? 도대체 그랬을까요? 멋있게 보이려고? 그랬을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 저는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의도도 없이 일부러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했겠습니까. 문제는 의도가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저는 의도가 예수님을 확실히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고요? 의도적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했냐고요?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의존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

 

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서에 두드러진 신학적 주제가 여럿이 있지만 중에제자들의 몰이해와 무능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곤 했습니다.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까요? 예수님 가장 가까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까닭은 가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으니까 말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변화산에서 내려온 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십니까?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일행은 못하게 하는 귀신에 들린 아들과 그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예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셨다고 합니다. ,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누가 9:41)

 

예수님은 탄식을 토해내셨을까요? 예수님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언제까지 그들과 함께 계실 수는 없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니 탄식이 절로 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만 없으면 아무 것도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으로 믿었고 그렇게 되기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신앙의 미덕이라고 말들 합니다. 하지만 믿고 의지하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의존하는 것은 모든 일을 그분께 미루는 겁니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기다렸던오실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실 분이 예수님이냐고 물었을 분명히 대답하지 않고 모호하게 대답하신 까닭은 예수님은 요한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서라는 무대에서 예수님은 홀로 두드러진 주연입니다. 그것도 공동주연이 아닌 솔로로 활약하는 주연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안에 은근하지만 도도하게 흐르는 묘한 흐름 하나가 있는데 예수님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이름 없는 다수의 무리 속으로 흩어져 해체시키는 움직임이 그것입니다. 흐름이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경향인지 아니면 예수님 자신의 의도인지는 전문가들이 따져볼 문제이만 눈에는 예수님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너희가 기다리는오실 바로 나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속으로 흩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눈멀고 다리를 절고 병을 앓고 귀먹고 죽은 사람들 속으로 예수님은 해체됩니다.

 

흐름은 누가복음뿐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최후의 심판 비유 그렇습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때에 자기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울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 때 임금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이보다 어떻게 분명하고 확실할 있겠습니까! 의인들은 자기들이 예수께 선행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자리에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없는 사람 자리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없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해체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메시야는 없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폭군 헤롯이 엄청난 살육을 저지른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습니다. 이에 놀란 헤롯은 박사들에게 자기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려 하니 그가 태어난 곳을 알려달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박사들이 속지 않았지요.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헤롯은 베들레헴 인근에 있던 이하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인구를 감안해서 추정하면 2 명쯤이 거랍니다.

 

저는 과거에 본문으로 설교했을 얘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런 처참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변호하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얘기는 마태복음 이외에 다른 역사적 자료에는 전해지지 않으니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변명을 하려면 수도 있었고 그래서 저는 그렇게 변명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딜리 생각합니다. 역사성 여부를 따지는 중요한 아니라 얘기를 전한 마태복음의 의도를 묻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혹시 마태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전하는 지점부터, 예수님 얘기의 시초부터 그분이 이름 없는 무리 속으로 스며들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얘기는 헤롯이란 왕이 얼마나 나쁜 폭군인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부터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말입니다. 물론 이는 저만의 생각일 뿐이고 다른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메시야는 없다입니다. 알다시피 이는 오강남 교수님의 책제목예수는 없다에서 가져왔습니다. 교수님의 제목이 본래는그런 예수는 없다였는데 출판사에서 바꾸었다고 하지요. 설교 제목 역시 사실은그런 메시야는 없다였습니다.

 

메시야는 있지만 그런 메시야는 없습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그런 메시야는 오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져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메시야는 없습니다. 그러니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아기 예수도 그런 분일 없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한 내용을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어디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지, 예수님을 찾아야 곳이 어딘지가 분명해집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랍비 여호수아 레비가 예언자 엘리야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메시야는 언제 오십니까?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가서 그분에게 물어보시오.랍비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엘리야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분을 알아볼 있겠습니까?라고 랍비가 묻자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분은 상처 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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