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遷位 기행 .55] 해월 황여일(1556∼1622)

by 영남일보 posted Dec 18, 2012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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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봉규기자
  • 2012-07-25 07:34:43
  • 
    탁월한 언변과 문장력…對明외교의 달인되다

    해월헌(海月軒) :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으로 풍수학상 강릉 이남 최고의 명당 

    해월 불천위 사당과 제청이 있는 해월종택(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전경. 종택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송림과 대숲이 멋지다.

    종택 별당인 해월헌은 해월이 33세 때(1588년) 처음 지어 공부하고 수양하던 건물로, 63세 때 벼슬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만귀헌(晩歸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98년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사건이 일어났다.

    정응태가 조선의 왜란 중에 명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 땅은 옛 고구려 땅이어서 조선이 다시 회복해야 한다면서,
  • 조선이 왜병을 불러들여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래서 본보기로 조선의 국왕과 신하를 문책해야 하고 조선을 토벌해 제거해야 한다고 극언했다.

    이런 내용의 글이 명나라 황제에게 전해졌으니 명 황제와 조정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 실정은 일본과의 오랜 전쟁으로
  •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는데 정응태의 주문대로 우리 강토를 토벌한다면 국운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임제·차천로와 더불어
    시·문장으로 이름 떨쳐

    임금에 화합정치 직언
    류성룡 중용 강력 권유

    임란후 민심안정 전력
    백성·왜인들 큰 감동


    명나라가 당시 여러 가지 상황으로 조선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조선은 이 엄청난 사건을 해명·설득할 사신을 선발해 보내야 했다.
  • 이때 변무진주사(辨誣陣奏使)로 정사(正使)에 백사(白沙) 이항복(우의정), 부사(副使)에 월사(月沙) 이정구(이조판서), 서장관(書狀官)으로
  • 해월(海月) 황여일(사헌부 장령)이 뽑혔다. 인품과 문장으로 가장 촉망받는 해월 황여일(1556~1622)이 함께 선발된 것이다.

    조선 국왕이 석고대명(席藁待命), 즉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니 용서를 간걸(懇乞)한다’는 치욕적인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는
  • 중대한 사명을 띤 사신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월은 문제 해결을 위해 수많은 관리와 접촉하는 등
  • 온갖 노력을 다했고, 명나라 재상과 고위관리들은 해월의 설득력 있는 언변과 예의바른 태도에 감탄하며 호의적으로 대함으로써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백사 이항복은 문집에서 당시의 일을 해월의 문장력과 노력, 선견지명으로 거의 혼자 힘으로 사건을 처리했음을 밝혀놓았다.



    ◆임제·차천로와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황여일

    해월은 1556년 10월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5세에 독서를 시작한 해월은 8세 때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있던
  •  중부(仲父) 대해(大海) 황응청에게 가서 공부했다.

    한 번 본 글은 모두 외우고 문리를 이해할 줄 알아서 다른 아이와는 비교가 되지 아니하니, 대해공이 기특하게 생각하며 해월의 아버지에게
  •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이 아이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14세 때 처음 간성(杆城) 향시에 응시해 진사 1등을 차지했다. 돌아오는 길에 삼척 죽서루(竹西樓)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어젯밤 은하수 신선 쪽배 내렸는데
  • / 삼척땅 취한 객 흥이 절로 나는구나/ 나 혼자 죽서루에 올라 아무도 없는데/ 옥피리 길게 불며 능파를 향한다네.’

    당시 봉래(蓬萊) 양사언이 삼척부사로 있었는데,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 만나보기를 청해 대면하고는 크게 칭찬했다.

    20세에 수일(守一) 김귀봉의 딸과 혼인했다. 처가인 안동에 머물 때 경상도 감사가 안동에 와서 백일장을 열었다. 이때 학봉(鶴峯) 김성일이 지필을
  •  준비해주며 해월에게 시험장에 가서 응시하기를 권유해 늦게 시험장에 들어갔다. 모두들 붓을 들고 글을 짓느라 바쁜데 해월은 한쪽에서 조는 듯이
  •  있다가 석양 무렵 혼자 앉아 단번에 붓을 휘둘러 출품했다. 시관이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라며 장원으로 뽑았다. 그 글이 ‘치술령부’로, 당시의 광경이
  • 영남 사림의 입에 회자되기도 했다.

    1577년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백호(白湖) 임제와 오산(五山) 차천로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585년 30세 별시에서 을과 1등으로 합격하고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발탁되었다. 이때 출사하면서 집안의 아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 . ‘만리 푸른 바다 백구의 몸으로 우연히 인간의 추잡한 세계에 들어가네(滄波萬里白鷗身 偶落人間滿目塵)…’

    1588년 정월에는 임금이 불러 편전에서 여러 차례 야간강의를 하면서 국론 분열을 지적하며 조정의 화합을 도모할 것을 주문하고, 류성룡 같은 인재를 중용할 것을 권유했다.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필요 없다고 주장

    1589년 11월 일본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니 조정 대신들이 대부분 허락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해월은 홀로 불가함을 역설하며
  • “통신사를 두어도 전쟁은 나고 두지 않아도 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통하지 않고 난에 대비하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

    학봉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주었다. ‘동해에 노련자 있어 그 사람 또한 바른말을 하였네. 많은 사람이 진을 높이는데 너 홀로 주나라 섬겼네.
  • 변설로 삼군을 물리치니 무기 아닌 석 자 혀였지. 나의 일편심도 천추에 그대와 같다네(東海有魯連 其人亦抗節 擧世欲宗秦 爾獨戴周日 談笑却三軍 其機在寸舌
  • 我有一片心 千秋與君說).’

    이에 해월은 ‘즐겁게 십년 벗 만나니 한줄기 절개 서로 같구려…’라는 시로 화답했다.

    1590년 초여름 어느 날 친한 사이인 백호 임제의 집을 방문하니 임제가 무슨 책을 저술하고 있다가 해월을 보고는 책을 감추었다. 해월이 정색하며
  •  “무슨 책이기에 우리 사이에 감춘다는 말인가” 하자 백호도 해월의 강개한 성품을 아는지라 보여줬다. 그 책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인데,
  •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아부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판의 비정함을 파헤친 야심작이었다. 해월은 비분강개하며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발문을 지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지었다. ‘만고의 비장한 뜻으로, 새 한 마리 창공을 지나네. 찬 연기 동작(銅雀)대를 가리고, 장화(章華: 초나라 궁전 이름)는
  • 가을풀에 묻혀 있네. 요순보다 앞선다고 경탄하고, 탕무(湯武)와 같다고 야단들이네. 상강에 둥근 달 밝은데, 눈물로 죽지가(竹枝歌) 듣고 있네.’

    당시로서는 모두 감추고 피하는 사안인데도 분연히 발문을 지은 점은 그의 강개한 성품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강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

    1606년 여름 명나라군이 철병하기 위해 중국 사신으로 상사(上使)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양유년(梁有年)이 와서 조칙을 반포하게 되었다.
  •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시문이 훌륭한 관리를 뽑아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했다. 이에 해월이 선발돼 한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사신과 시를 주고받았다.
  •  이 시들은 해월문집에 기록돼 있다.

    1607년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2등의 녹(錄)을 받았다.

    1612년 창원부사에 제수되고, 이듬해 봄에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지은 시다. ‘도성을 나오니 학을 탄 것처럼 가볍고/
  •  동문 밖 십리는 그림 속에 흘러가네/ 새로 보는 금수강산 화려하기만 하고/ 넓게 펼쳐진 물은 유리처럼 맑구나/ 한 발만 나와도 그 아름다움 알겠는데
  • / 2년 동안 왜 그렇게 얽매였는지/ 송어국 국화술에 노어회 생각하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네.’

    1615년 동래부사에 부임한 해월은 왜적의 소굴로 피폐해진 지역의 주거시설 정비 등 민생안정과 교육에 심혈을 쏟으니 백성들은 물론 왜인들도 감동했고,
  •  임기가 끝난 후 사표를 내고 귀향했으나 백성의 청원으로 다시 1년 더 근무했다.

    1618년 8월에 벼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해월헌이라는 헌(軒)의 이름을 만귀헌(晩歸軒)으로 바꾸어 걸었다. 9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  ‘…고기 잡고 나무 지며 야인과 벗하고, 왜가리 갈매기와 강가에 놀겠네…’라는 시를 지어 은퇴의 뜻을 분명히 했다.

    1622년 4월2일 해월종택 정침에서 별세했다. 운명 전 병세가 조금 덜할 때 부인에게 “죽는 것은 모두의 운명이니 슬퍼할 것은 없소.
  • 자식들을 잘 훈계하고 문호를 잘 보호하시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요”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 황여일 약력

    △1556 울진 출생 △1569년 향시 장원 △1577년 성균관 수학 △1585년 별시 을과 1등, 춘추관기사관 △1593년 형조정랑, 병조정랑 △1598년 사헌부 장령 △1601년 예천군수 △1615년 동래부사 △1620년 조정 대신들이 경상도 감사로 추천했으나 사양 △1766년 해월 문집 목판본(7책 14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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