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6일 / 대림절
셋째 주일
수많은 마리아들 덕분에
누가 1:26-38
곽건용 목사
여자 주제에?
오늘날에도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 수십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졌습니다. 지금 현실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터이고 또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유대에는 사정이 이렇지 않았습니다. 남녀의 지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했습니다. 오죽하면 탈무드에 “토라의 말씀을 여자에게 교육하느니 차라리 토라를 불태우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겠습니까. 게다가 유대인 남자들은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님, 저를 여자와 이방인과 무식한 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니 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면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얘기는 ‘파격적’이란 말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뒤집어엎는다는 뜻의 전복(顚覆)을 뛰어넘어서 가히 혁명(革命)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마리아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매우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동정녀’라는 말입니다. 마리아 하면 동정녀이고 동정녀 하면 마리아가 떠오릅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해서 낳았다는 게 마리아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여깁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예수의 동정녀 탄생 교리는 신앙이냐 불신앙이냐를 가르는 잣대 구실을 해왔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신앙인이고 믿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한 개의 잣대만으로 신앙과 불신앙을 가를 수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종교는 한두 가지 모양이나 색깔만으론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갖고 있는 모자이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이거다’라거나 ‘불교는 간단히 말하면 저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랫동안 그런 잘못을 저질러왔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임을 믿는가?’라거나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났음을 믿는가?’ 등등
몇 마디 말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로 신앙과 불신앙을 갈라왔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긴 합니다. 다른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녀가 갖고 있는 가치와 의미는 그녀가 동정녀로서 예수를 잉태했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동정녀 잉태를 빼면 마리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존재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마리아가 갖는 의미는 동정녀 잉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이미 그런 축복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이 사실을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전합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서로 다른 두 탄생 이야기
누가복음은 1장은
두 사람의 탄생이야기를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그들입니다. 둘의 탄생이야기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는데 그것을 대조하면서 읽어보면 예수의 탄생이 갖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먼저
공통점을 보겠습니다. 첫째로 두 사람 모두 천사 가브리엘이 그들의 부모에게 나타나서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아무나 천사가 탄생을 알려주지는 않겠지요. 그런 점에서 둘 다 범상한 인물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둘째로 두 사람 모두 태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나이 많은 여자였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를 낳을 수는 있지만 가져서는 안 되는 처지였습니다. 아기를 갖는 일이 스캔들이 될 미혼여성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미혼여성이 아기를 갖는 게 별 일 아닐지 몰라도 그때는 상상할 수 없는 추문(醜聞)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탄생이야기에는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천사 가브리엘이 누구에게 나타났는가하는 점입니다. 요한의 경우는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났고 예수의 경우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경우는 아버지가 주인공이었고 예수의 경우는 그게 어머니였던 셈입니다. 이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세례자 요한은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고 예수는 새 시대의 첫 인물이라고 말들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을 가리켜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찬사 아닙니까! 하지만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도 그보다 크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는
요한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위대하고 크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은 옛 시대를 닫는 역할을 한 인물이고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여는 분입니다. 두 분 사이에서 시대가 갈라진다는 얘기입니다.
두
사람의 탄생이야기에는 차이점이 더 있는데 모두 같은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낮은 신분의 시골처녀였다는 점도 그렇고, 요한의 탄생소식은 사가랴가 성전에 있을 때 전해졌지만 예수의 경우는 마리아가 집에 있을 때 전해졌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거룩과 세속의 대조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차이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탄생소식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이 보인 반응입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아내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턱이 없으니 그게 아무리 천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 못하는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이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천사의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불신의 표현이 아니라 방법을 묻는 물음이었을 따름입니다. 처녀인 자기가 어떻게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적임자일 수 있는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아,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사람을 불러 쓰시려고 할 때 사용된 범상치 않은 인사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라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사가랴에게
아기의 탄생은 속된 말로 밑질 게 없는 장사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자식 상팔자는 요즘에나 통용되는 말일뿐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요즘 같이 불임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알았던 게 아니라 하나님이 태를 닫아놓으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으니 제사장이 되어서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런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이 태어나자 “마침내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주셔서 나도 이제는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구나!”(25절)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처녀로 아기를 가졌다면 그녀는 엄청난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파혼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에서도 쫓겨나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를 위기에 빠뜨릴 하나님의 계획에 대담하게 순종하게 만들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사가랴는 부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천사는 앞으로 태어날 요한에 대해서 그에게 “(요한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을 것이며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주 하나님 품으로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가 바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이다. 그는 아비와 자식을 화해시키고 거역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여 주님의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가랴의 응답은 “이제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됐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의 탄생을 그저 일개 개인의 탄생으로, 자식이 없던 자기에게 자식이 생긴 일로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도 그가 그렇게 응답한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위신과 명예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반면
마리아는 장차 자기 태를 통해 태어날 아기와 그가 할 일, 그리고 그로 인해서 벌어질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일을 하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