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통 거부와 안식일 노동 거부로 사형이 결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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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 목사였던 프란츠 요제프 하젤
(
Pranz Joseph Hasel )은 40세의 나이로 독일군에 징집되었다.
의롭지 않은 전쟁에 참전하여 불의한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하젤은 집총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안식일에는 일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요청은 어느 군대에서나 복잡함과 어려움을 야기시켰겠으니, 나치 군대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사형감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전쟁이 끝난 후 사형하기로 연기되어 그의
복무 기록 카드와 부대 서류에는
"
종전( 終戰 ) 후 사형
"
이라는 기록이 올라갔다. 하젤은 많은 매를 맞고 총 대신 삽 자루를 들고 699 선봉
중대의 일선에 섰다.
나치 장교들은
"
네가 총을 들고 적을 쏘지 않는다면, 적군이 네게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겠다"
라고 하며 삽 한 자루를 주고 공병 부대에 배치시켜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 세웠다.
그가 당하는 그런 환란의 때에 독일군은 승승장구하여 전 유럽을 휩쓸었지만, 그는
그 전쟁에서 독일군이 패배할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다니엘서 2장의 예언에 의하면 로마 이후는 유럽이 다시 하나로 합하지 않을
것이므로 독일이 유럽을 통일하려는 2차대전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단2:41~43 ]
그래서 그는 교회에서 가르치던 다니엘서 2장의 낡은 그림을 가슴에 품고 늘 그 성경
예언대로 될 것을 묵상하였다.
◆ 총알이 그를 피해가다. 수백명 중 생존한 2명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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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 부대는 언제나 전투 부대인 보병부대 앞에 서서 다리를 놓아야 했으므로 무수한
공병들이 적의 총탄에 쓰러져 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수 많은 병사들이 주위에서
쓰러져도 하젤에게는 총알이 피해갔다.
드디어 철저한 신앙인인 하젤을 총알이 자꾸 피해가는 것을 분명히 목격한 병사들로 신앙
인인 그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총알이 피해간다는 소문이 나서, 나중에는 병사들이 죽지
않으려고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전투가 끝났을 때, 그는 그가 소속했던 부대 대원 수백명 중 살아 남은 7명의
병사 중 하나였고 또한 그 살아남은 7명 중에서도 전혀 다치지 않은 2 명 중의 하나가
되었다
◆ 사령관에게 다니엘서 2장을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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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젤이 소속된 공병 부대가 러시아의 모스크바 남부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1943년 어느
날, 그 때는 독일군의 절대적 우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공병부대 사령관이 신앙
으로 유명해진 하젤을 집무실로 조용히 불러 뜻밖의 질문을 했다.
"프란츠 하젤, 내가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길 바란다. 하젤, 그대의 생각에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독일군이 승리하리라고 보는가?"
하젤은 독일이 비록 조국이지만, 성경의 예언을 상기할 때, 전쟁에 승리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질문에 망서렸다.
독일이 이긴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또 독일이 진다고 하면 군법 재판에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이 없는가?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그대의 의견을 말하라."
그 때 하늘의 지혜로 되묻기를 " 이것은 사적인 질문입니까? 공적인 질문입니까?
하였으니,
이는 당시 독일에서 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무어라 하든 처벌할 수 없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장군은 사적인 질문이니 염려 말고 말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프란즈는 가슴에 품고 있던 그 그림을 꺼내어 다니엘서 2장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바벨론( 금 머리 )부터 시작하여 페르샤( 은 가슴 ), 헬라( 놋 허리 ), 철다리( 로마 ) 까지 성경
예언 그대로 세상 역사가 성취되었으므로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나라 곧 돌이 날아오는 것으로
표상된 반석이신 주님의 재림도 분명하여 보였다.
그렇다면 유럽의 열 나라들이 철과 진흙이듯이 다시는 서로 달라 붙지 않는다는 예언도 틀림 없었다
로마 제국이 열 발가락으로 분열되어 서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수님 재림 시까지 통합되지 못
하는 유럽의 역사를 연대를 들어 설명할 때, 사령관은 깊은 감명을 받았으니, 이는 성령께서 그
강의에 역사하신 것이 분명하였다'
"하젤,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비밀이다. 결코 없었던
것으로 하는 거다. 알았나?"
두 명의 장교가 더 있었다.
그들은 예하 부대의 지휘관이었는데, 전쟁 전 대학교에서 서양사와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들이었다.
"하젤, 어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도록 하라."
"이 장교님들 앞에서 말입니까?" "그렇다."
그래서 프란즈는 다시 한번 사적인 질문이냐? 공적인 질문이냐? 를 다집하였다. 그러자
그 장군들은 한결 같이 이것은 절대 사적인 질문이며 공적인 것이 아니니 염려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프란즈는 다시 그 설명을 하였는데, 세계 열국의 흥망 성쇠를 이야기하며 연대를 언급할
때, 사령관은 서양사 교수 출신의 장교에게 맞는지 확인하기를 잊지 않았다.
역사 교수였던 장교는 하젤 목사가 언급하는 모든 연대에 정확하게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사령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지킬 것을 장군들에게 지시했다.
그들도 돌아가면서 이것은 절대로 사적인 대화였다고 다시 한번 다짐을 주고 갔다
그후 사령관은 유사시 도망갈 준비로 그 때부터 휘발유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1944년 독일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고, 수 많은 독일 군인들이 휘발유가 없어 철수하는 데에 모진
수난을 겪고 있을 때, 프란츠 하젤이 소속한 부대는 비축해둔 휘발유 덕에 무사히 독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놀만디 상륙전과 히틀러의 자살로 그 지루하던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나고 프란즈는 다른
장교들 병사들과 함께 서부 독일에 진주한 미군에 포로가 되었다.
◆ 종전 후의 심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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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포로 수용소 생활은 너무 지루하고 오래 끌어 언제 집에 돌아갈런지 몰라서 그 문제로도
기도하던 어느날 육군 중령인 미군 장교가 포로들 서류를 검토하며 심문중 프란즈를 불러서 그의
기록 카드에
"
종전 후 사형"
으로 기록된 것을 보고
"
당신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며 사형 받기로 기록된 까닭을
물었다.
프란즈는 그가 집총과 안식일 문제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
당신은 내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했더니 그는
"
내가 이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 하여 프란즈는
"나는 이 전쟁을 반대하여 총을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장교는 충격과 함께 깊은 감동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 아 나는 자유로운 미국 군대에서도 안식일을 못지켰는데 이 사람은 그 독재적인 나치
군대에서도 안식일을 지켰다니...)
"
그 지독한 나치 군대에서 안식일을 지켰다니,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죄를 지었군요.
나는 자유로운 미국 군대에 복무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 보여준 그런 용기를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
"
군에 징집되기 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목사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프란즈를 석방하려고 여러 모로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농사꾼은 집에 먼저 보내주는 법조항을 발견하고 프란즈를 불러 물었다.
"
당신은 농사 지을 줄 아십니까?"
"
예 나는 어려서부터 농사군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지역의 독일군 포로들은 농장으로 보내져 노동을 시키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주님의 종이니, 주의 농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그리하여 주님의 섭리가 그로 하여금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프란즈는 석방되었다
프란츠 하젤 목사는 그 자리에서 풀려나 교회로 돌아와 1991년 하나님의 품에 잠들 때까지
미국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했다. (*)
◆ 프란즈 하젤의 아들 게르하르트 하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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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십게명의 말씀대로 츠란즈 하젤의 아들
게르하르트 하젤(
Gerhard Hazel )
은 믿음 안에서 자라며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복을 받았고 그의 모친은 그 자녀들을 다
안식일에는 학교에 보내지 아니 하였는데
한번은 그 문제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 문제를 판결을 선고할 관리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 후임으로 재림신자 부부와 친하게
지냈던 어느 다른 관리로 대체되었다.
초등, 중등 교육을 마치고 직업 학교에 들어 갔고, 18세 때는 전기공학 분야에서 프랑크푸르트
최고의 견습생으로 간주되었고, 헤쎈 주에서도 그 분야 최고의 견습생으로 간주되었다 .
그리하여 인근의 다름슈타트 공과 대학에서 풀 스칼라쉽으로 오라는 통지가 왔으나
그는 주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박사가 되어 목회도 하고 재림교의 세계 110 개 대학들 중 하나인 미쉬간 주 베틀크릭 소재
앤드류스 대학(
Andrews University ) 의 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많은 유수한 논문을 써서 재림교 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재림교회사에
안식일 지키려고 하다가 직업을 못 구해서 굶어 죽은 사람 있습니다
전통시님의 이분법적 신앙이 정말 창피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무섭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으로 전도회하면 잘 되겠습니까?
같은 교단에 있다는 것이 정말 창피합니다
그러니 정무흠 님 같은 분이 주야장천 복받았다고 떠드는데
님은 정무흠님과 비교할 때 어떤 복을 더 받았다고 여기세요?
내가 보기에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요?
찬미가에
크신 복을 세어보아라 했는데
님이 세어 볼 때 누가 더 복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