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영원한 구원의 잣대도 내가 정하는가?

by 로산 posted Feb 07, 2013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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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영원한 구원의 잣대도 내가 정하는가? 


어릴 적 교회에서 배운 사상은

거룩해야 하고 또 거룩해야 하고

율법이 일점일획도 가감 없듯이

신앙도 그런 틀 안에서만 자유를 논하는 것인 줄 알았다


우리만이 구원의 집단이며

우리만이 이 지구의 미래를 짊어진 무리

즉 남은 무리는 우리뿐이며 간혹 재수 좋은 놈은

천주교회에 있어도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거듭나지 못한 녀석들 빈자리를 채우는

그런 복을 겨우 얻는 녀석들 몇 있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 시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이 지구의 끝이 스페인이라 믿었듯이

나 역시 지구 인구의 흥망성쇠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나만이 홀로 남았다는 관념적 신앙을 하고 있었다


안식일 지키는 무리는 우리들뿐이며

오직 우리들을 통해서만이 구원의 길이 제시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가 190여개나 된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고

그들 역시 안식일을 지키니 구원 얻을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예언의 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구원은 안식일이 아니었고 예언의 신이란 존재였다

안식일과 예언의 신 좋게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


위선으로 가득 찬 내 신앙은 한 번 되새김을 한다

이건 아니다

이 많은 지구 인구들이 날 위해서 아니 우리들 재림교인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나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를 위해서 동식물이 존재했던 것처럼 그토록 위대하냐

어쨌던 이 교단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는데

내가 나를 되씹고 있었다


그런 생각의 편린들이 오늘 나를 다시 창조했다

이젠 석양이 노을 지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붉음을 더 심하게 토하듯이

그런 세월을 살아가고픈 내게 어떤 장로님의 “신앙 뻘 짓“이란 단어가

가슴을 치며 슬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단의 탈을 쓴 많은 유사 기독교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종말론적 신앙으로 날짜를 잡아 뜯어먹고

신의 새로운 탄생으로 여자 잡고 돈 잡고 있는 것 모두 발가벗기고 만다

성경을 내 마음에 들도록 해석하고 그리고 다른 이의 해석은 이단으로 몰아간다


사랑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랑의 대상을 내가 정하고

내가 정하지 않는 무리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을 누가 용서할 것인가?

그래서 그 용서의 대상까지도 내가 정해야 어제 마신 술로 상한 속 풀이를 한다


세상 모든 동물은 종족보존을 위해서만 성행위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종족 보존이 아니라도 쾌락을 위해서도 성행위를 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 만물보다 나은 것이며 그 성행위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고

그래서 많은 백성들의 성행위를 못하게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즉 가진 자의 성행위로 못 가진 자는 희생제물이 됐다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서 성행위를 하면서도 그 위에다가 사랑이란 두 글자를 덧씌우면

거룩해 진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

헨리 8세의 결혼문제로 로마 교회와 등을 지게 된 영국은 결국 영국성공회를 만든다

왕의 결혼을 위해서 새로운 교파가 탄생한 것이다

그건 힘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권력을 사유화 한 것이다

중세기 유럽의 전쟁은 대부분 종교전쟁인데

그 전쟁의 배후에는 남녀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관계설정을 부인하기도 하고 부러 잊어버리기도 하고

쌩 까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거룩으로 날개짓하는 시늉을 한다


나는 솔로몬의 아가서를 연애시 정도로만 해석한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유하는 비열한 짓은 안 한다

성문시집 가운데 제일 난삽한 시가 바로 아가서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이 모두들 저들 지식을 뽀티 내는 자리인 척 한다

그래서 그 애로틱한 용어들이 성경이라는 거룩을 옷 입고

우리 곁에서 자랑스럽게 자리 잡는다


아가서를 적은 솔로몬의 형인 암논의 이야기를 보자


암논은 배다른 동생인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별 짓을 다해서 꼬시는 데는 성공한다

다말이 말한다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삼하 13:12~13).


오라비 네가 나를 버리는 일이 생기면 나는 어찌하라고

아비의 허락도 없이 이러냐 하는 말이다

암논이 다말과 결혼했다면 압살롬에게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형제 살인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울면서 도망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쨋던 그는 사랑하던 여자 동생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를 버렸다

왜 버렸을까?

아무도 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저 성욕이었다고 한다

그저 성욕이라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랬을까?


나는 두 사람의 육체적 속궁합이 맞지 않았다고 정의한다

그렇게 좋아하던 동생을 억지로 강간했는데

하고 보니 재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심히 미워”했다는 말은 그 고생하고 얻은 것 치고는

형편없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변하면 증오가 되고

증오가 변하면 살인한다는 말처럼

암논은 자신이 살인의 대상이 될 짓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라비의 사랑을 압살롬이 다말에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결국 암논은 죽는다

그 일로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를 든다

왜냐하면 이 일로 아비의 마음이 솔로몬에게로 갔기 때문이다


속궁합

그렇다 사람은 예쁜 여자하고는 못 살아도

속궁합 맞는 여자하고는 못 헤어진다고 한다

인간의 쾌락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데 그 축복 속에서는 쾌락도 존재한다

그 쾌락이 악을 부르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힘 있는 자는 그 힘을 의지한다

인간 사회가 성경이 있기 전부터 정해 놓은 쾌락의 정당화는 정상위이다

남녀의 쾌락은 나라가 지켜주고 사회가 보살펴준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런 것조차 지켜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쾌락을 원하는 사회가 쾌락을 막는다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을 하되 쾌락을 좆되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능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전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이 헛된 세상에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 있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로서 만족을 얻지 못하니 둘을 얻고

다윗처럼 살고 솔로몬처럼 처첩을 1000명씩 거느리는 것이다

1000명의 처첩이 있으니 그 가운데서 레즈비언도 생기고

고자들로 환관을 삼으니 남색도 생기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제도 아래서 만들어진 이런 비정상적인 것들이 후천적 성향이 되고

죄의 성향으로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것이 바로 비정상적인 쾌락제도라 보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비정함의 세대이다

전쟁을 겪고 난 세대이며 평생을 한 일에 올인한 세대이다

그래서 비교적 보수적 색체가 강하다

남의 아내 이야기 하는 것 금기시된 사회를 살았고

남의 아내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시대를 살았다

성경이 말하는 “내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문구를

가히 상상도 못하는 수준으로 해석했던 시대이다

그러다보니 이불 속 대화를 상상한 이야기를 남의 아내 엎어 놓고 난도질이나 하는

그런 표현도 한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남의 여인을 벗겨 놓는 일은 예술에 속하고

이불 속 대화나 행위를 상상해서 글을 쓴 것은 간음에 속한다면

미술과 문학의 차이를 누가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황희 정승이 제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들으니

성리학의 대가답게 도덕군자놀이를 하는 것 아닌가?

“어젯밤에 이불 속에서는 별 소리 다 하더니.......” 하고 지나갔다

이불 속의 별소리....

우리도 하는 것 아닌가?

벌거벗고 누워서 우리들도 하는 짓 아닌가?

영화는 남의 남녀가 하는 짓이고 이불 속은 우리들이 하는 짓이다


오랜 세월을 막혔던 대화가 꿈틀댄다

이런 소리 평생 해 보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다

나잇살이나 먹으니 이런 소리해도 아무런 감응이 없는 것 보니

나도 이젠 다 살았나 보다

그런데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잣대로 삼아 남의 뻘짓을 간음이라거나

또는 부도덕한 짓이라고 도맷금으로 넘기지는 말자

소수자의 설움을 많이도 받아 온 우리들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논했다

성소수자는 육신의 자유를 논한다

그들 우리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선천적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붙들고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수를 위한 종교를 우리는 평생 믿어왔다

그런데 다른 소수에게는 돌 팔매짓을 예사로이 하고 있다

그런 뻘짓을 형상화 시키는 무리는 누구인가?

우리에게만 소수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 까지도 가르치고 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요“

이런 은유적인 글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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