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하고 진부한 하나님: 그는 꼭 그래야만 했는가

by 김원일 posted Mar 04, 2013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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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4일 / 사순절 둘째 주일
 
                                                                   ‘나는 나다’를 만나다!
                                                                                  출애굽기 3:7-15
 
                                                                                                                                                                               곽건용 목사
 
모세의 영혼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리다
 
이집트인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서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으면서 긴 세월 동안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데릴사위로 살던 모세를 야훼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 가운데 나타나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하고 말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 순간은 절대자를 추구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인 절대자를 직접 만나 소통하는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자를 만나는 경험, 모든 것이 있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세상에서 무한하신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경험 말입니다. 이때 모세는 발은 땅을 딛고 서 있었지만 영혼은 하늘에 닿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게 먼지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세상사가 부질없이 느껴지지 않았겠습니까. 히브리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죽을 뻔했던 일, 이집트 공주의 눈에 띠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그녀의 양자가 된 일, 동족 히브리인들의 고된 노예의 삶을 눈으로 목격한 일, 살인과 도망, 양치기가 되어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 등, 자기가 살면서 겪은 일들이 모두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절대자와 직접 대면한 순간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하늘에 닿아 있는 그의 영혼을 땅으로 끌어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후에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린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하나님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뇌가 있는 걸까요? 정말 그렇습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분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뭔가 의견을 말하기만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지만 실제 성서는 딱 부러지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서는 하나님이 모르는 게 있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척 하면 삼천리’이고 ‘안 봐도 안다’는 식으로 모든 걸 쉽게 아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뭘 모르신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앎에도 ‘과정’과 ‘절차’라는 게 있다는 얘기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중간 얘기는 다 건너뛰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 바칠 양을 보여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12절). Now I Know! 내가 이제 알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나서 비로소 알았던 것입니다. 그가 자식을 번제로 바칠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그것을 시험하시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강행하셨다면 그 하나님은 ‘이상한’ 분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 가운데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see) 그들이 괴로워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고’(hear), 그래서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know)고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듣고 아셨다!
 
하나님은 보셨답니다! 들으셨답니다! 그래서 아신답니다! 당신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당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셨고 그들이 괴로워 부르짖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두 귀로 생생하게 들으셨답니다! 그래서 뼈에 사무치게 아신답니다. 흑인영가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은 바로 이런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 Nobody knows my sorrow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 Glory hallelujah!
Sometimes I'm up, sometimes I'm down / Oh, yes, Lord
Sometimes I'm almost to the ground / Oh, yes, Lord
Although you see me going 'long so / Oh, yes, Lord
I have my trials here below / Oh, yes, Lord
If you get there before I do / Oh, yes, Lord
Tell all-a my friends I'm coming to HEAVEN! / Oh, yes, Lord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세상의 풍진(風塵) 저 너머에 계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셨고 그래서 우리네 입술에서 새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셨답니다. 세상의 모든 긍휼과 동정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데서 생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잘 났고 많이 갖고 있고 많이 알고 있음을 알아주기 원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과 느끼고 있는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얘기입니다.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나를 알아주기를 바랄뿐입니다. 그게 ‘소통’이고 사람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이 내 사정을 알아주고 내 맘을 헤아려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는 이 소원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내 고통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 찢어지는 마음을 남이 헤아려주고 같이 아파해주기를 바랍니다. 아플 때 토해내는 신음은 내 고통을 알아달라는 절규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절규를 토해내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상에서 토해내신 이 부르짖음은 당신의 고통을 하나님이 알아달라는 외침이 아니었겠습니까.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동행하셨는데 그들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깨어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했더라면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진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 내 고통을 알아주기만 하면 고통은 반감됩니다. 물론 누가 알아준다고 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고통을 이길 힘이 내 안에서부터 솟아납니다. 그래서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시편 중에 ‘탄식시’ 또는 ‘탄원시’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께 탄식하고 하소연하는 노래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도 탄식시입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탄식시가 그냥 탄식만 하다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가 탄식과 탄원으로 흘러가다가 중간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면서 탄식이 신뢰로 넘어가는데 이 터닝 포인트는 시인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이 직접 보셨고 시인의 부르짖음을 직접 들으셨다는 확신입니다.
 
“내 재앙과 재난을 손수 처리하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라는 시편 10편이나 “당신께서는 저의 가련함을 굽어보시어 제 영혼의 곤경을 살펴 아십니다.”라고 노래하는 시편 31편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대목에서 탄식은 신뢰로 바뀝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탄식을 신뢰로 바꾸는 힘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고통을 직접 보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시인의 신음소리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확신이 탄식을 신뢰로 바꿨다는 말씀입니다. 시인의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 위에 초월해 계시는 형이상학적인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풍진 가득한 우리네 삶의 현장에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와 소통하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깨달음이 탄식을 신뢰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사람은 위로 올라가려 하고 하나님은 아래로 내려오시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바벨탑을 쌓았고 하나님은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명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그 모습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희고 찬란하게 변화한 적이 있었습니다(마가 9장). 거기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본 베드로는 거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예수님께 제안했지만 예수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씀하셨지요. 산 아래에는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고치지 못해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변화가 일어난 산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풍진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상황을 보고 듣고 아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으로 직접 내려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들과 동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God with us)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과 동행하시고 소통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이 그들과 소통하고 동행하시는 데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데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야훼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니, 듣기만 해도 흐뭇해지고 부자가 된 것 같지 않습니까? 머릿속으로만 그려봐도 배가 불러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땅이 얼마나 기름지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땅의 비옥함만 두고 보면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집트에는 나일 강이란 거대한 수자원이 있지만 가나안 땅은 극히 일부 해안평야 지역을 제외하면 젖과 꿀이 흐르기는커녕 메마르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땅입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얘기도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에 미구엘 세르베토(Miguel Serveto)라는 의사이자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가나안은 사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고 썼다가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에 의해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 아닙니까? 지금이야 중동지역에 엄청난 양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으니 ‘젖과 꿀’이 아니라 ‘기름’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면 말이 되겠지요.
 
그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가나안처럼 척박한 땅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일까요? 왜 야훼 하나님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설교 마지막에 얘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본문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부르심에 대해서 즉각 “예,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자기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뒤로 물러섰던 사람은 모세가 전부는 아닙니다. 사사(판관)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고 예언자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결국은 부르심에 순종했지만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아모스는 예언자 무리에 끼어본 적이 없는 자기 같은 농사꾼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느냐고 저항했고(7:14), 이사야도 자기는 입술이 더러운 자들 가운데 있는 사람이므로 예언자로 부적격자라고 했으며(6:5), 예레미야도 자기가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한다고 뒤로 물러섰습니다(1:6).
 
모두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렇게 핑계를 대가면서까지 부르심을 회피하려 했던 이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 개인이 하나님의 부름을 직접 받아서 백성들에게 가서 심판과 회개와 메시지를 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요리조리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 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포기하시겠습니까? 누가 핑계를 대고 빠지려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그 대신 보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싫다는 사람을 겁주거나 윽박질러서 억지로 보내시지도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요리조리 빼는 사람을 끈질기게 설득하시고 그가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모세의 형 아론을 동행시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무엇보다 야훼 하나님 스스로 모세와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기왕 하나님께서 직접 (이집트로) ‘내려오기로’ 작정하셨는데 왜 굳이 모세를 보내시려고 하셨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도 하시고 놀라운 기적도 일으키셨습니다. 파라오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재앙 때문에 히브리인들을 내보내지요. 그런데 왜, 무엇이 모자라서 굳이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려 하시는가 말입니다. 하나님 혼자서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위의, 그리고 이 문단의 글자 색상은 퍼온이가 한 짓거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리조리 빼면서 이집트로 가지 않으려는 모세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으로만 읽는데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약속은 동시에 하나님이 가시는 길에 모세도 동행하라는 부르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사람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방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나가신다는 게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더러 혼자 스스로 알아서 역사를 만들어나가라고 하시지도 않고 또 스스로 홀로 역사를 이루어가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과 더불어, 사람과 소통하시면서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뤄나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일개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라 당당한 동반자요 파트너인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모든 성서는 이 진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제게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답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지 저는 모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역사를 이뤄나가신다는 사실을 성서와 현재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안다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 메마르고 척박한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셨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저는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 이스라엘을 막론하고, 진정 그들이 가나안이라는 지리적인 공간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이해했다면, 그래서 지금도 그 땅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고 독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이라는 물리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저 높은 하늘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땅 위에서 이루어야 하고 또 이룰 수 있는 ‘가치’를 가리키는 말인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가서 더 길게 얘기할 수 없으니 이전에도 인용한 적이 있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 한 마디를 인용하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있는 하나님’(God in Canaan)을 찾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Canaan in God)을 찾았어야 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나는 나다’를 만나다!”입니다. ‘나는 나다’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당신의 이름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목은 이렇게 붙여놓고 거기까지 가지 못 했습니다. 이어지는 모세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사순절 마지막 주일까지는 ‘그들은 왜 예수를 죽이려 했을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복음서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틀린 고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만 고백하면 ‘누가, 왜, 어떤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예수를 죽였나?’ 등의 역사적인 질문은 묻혀버리고 맙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이 문제를 파헤쳐보겠습니다. 기대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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