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일 / 사순절 셋째 주일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 했구나! 1
마가 11:15-19
곽건용 목사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은행원
제가 이곳 미국에 처음 왔을 땐 은행들이 토요일에는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닷새만 영업을 했지요. 그런데 언제부턴지 몇몇 은행이 슬그머니 토요일에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대부분이 토요일에도 영업을 합니다. 그만큼 경쟁이 심해졌고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일요일에 문을 여는 은행은 아직 없습니다. 앞으론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까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요일에도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은행이 있습니다. 그 은행은 00은행 여의도 지점입니다. 이 지점 행원 몇 명은 일요일에 사무실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교인이 많다는 교회의 재정부실로 출근해서 헌금을 계산해서 입금해야 합니다. 이들도 일요일까지 일하고 싶진 않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거래은행을 바꿀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이 얘긴 한 20년 전 일이니 지금까지 그런지는 저도 모릅니다. 지금은 더 발전된 방식으로 처리할지도 모르지요. 이 교회 설립자이자 원로목사가 1백억 원 대의 교회 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는 씁쓸한 뉴스가 지난주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 얘기를 한 까닭은 이런 현실이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매주 들어오는 엄청난 헌금 때문에 금융권이 이 교회를 무시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비슷했습니다. 또 이 교회가 벌이는 영리, 비영리 사업체가 적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도 유대인들이 바치는 막대한 제물과 성전세 덕분에 유대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세란 15세부터 65세까지의 유대인 남자라면 누구나 매년 바쳐야 하는 세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기능만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성전이 행하는 최고의 기능은 제사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곳이 유대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 이외에도 다양한 부수적인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법적 살인
오늘부터 종려주일 전까지 3주간 “누가 왜 예수님을 죽였을까?”라는 주제로 설교합니다. 이 주제를 택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고난당하고 죽으셨다.’라거나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고난당하고 죽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영성적 의미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그런 증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그렇게 영성적으로 해석하고 고백하기 이전에 인간의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 사건을 전하는 기록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사건들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파헤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풍랑을 잠잠하게 했다든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가 하는 기적들과 소경을 고쳤다는 등의 기적적인 치유 같은 것을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까지도 역사적 사실임을 부인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 권력자들과 로마제국에 의해 고난을 겪으셨고 끝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에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사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으셨습니다. 사고로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길 가다가 우연히 강도를 만나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그분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법적 살인’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법적 살인은 법절차의 형식은 갖췄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죽였을 때 쓰는 말입니다. 한국 대선정국에서 문제로 떠올랐던 ‘인혁당 사건’은 사법적 살인의 한 예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두 번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는 유대교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산헤드린’에서의 재판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총독 빌라도 법정에서의 재판입니다. 예수님은 두 법정 모두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셨지만 산헤드린에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했고 거기서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사형판결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과 빌라도 법정 모두 법적인 절차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형식적으로만 법적 절차를 진행한 일종의 ‘쇼’였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두 법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누가, 왜 예수님을 죽였는지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그 첫 걸음은 오늘 본문을 꼼꼼히 읽는 일입니다.
성전에서 벌어진 일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거주자가 아닌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는 대개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등 1년에 세 번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른바 순례절이지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이 절기에는 모두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으니 이때 예루살렘은 북새통을 이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셨을 때가 유월절 즈음이었으니 그날도 성전은 매우 소란스러웠겠지요.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서자마자 뜰 안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말이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채찍을 휘두르며’ 그들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성전이 장바닥이 아닌데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은 누구였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왜 비둘기를 팔고 샀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 대목에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요즘 큰 교회에 가면 교회 안에 카페도 있고 서점도 있어서 커피와 음료수, 책 등을 팔고 삽니다. 기금 마련이라는 명목으로 바자회도 흔히 합니다. 평일이 아니라 주일에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땐 이런 일들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교회에서 물건을 사고팔다니, 그것도 주일에 말입니다! 교회에서 누가 이런 일을 제안했다면 그는 당장 쫓겨났을 겁니다. 민수기 12장 32절 이하를 보면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얘기가 나오는데 교회에서 주일에 커피를 팔고 책을 팔고 바자회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데 요즘은 대형교회들에서는 앞 다퉈서 카페도 만들고 서점도 엽니다. 안식일 또는 주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른바 ‘현대화’된 것이죠. 저는 ‘현대화’에 대해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화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낡아빠진 죽은 말씀으로 만들지 말고 오늘날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문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선별적으로 현대화하려 든다는데 있습니다. 요즘 보수적인 대형교회들이 안식일 규정을 현대화해서 카페와 서점을 만들고 있다면(물론 ‘현대화’에 대한 의식조차 없이 그런 일을 하는 교회도 많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한 규정도 현대화해야 하겠지요. 어떤 계명은 현대화해도 괜찮거나 해야 하고 어떤 계명은 하면 안 된다면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나누는 기준이 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현대화할 것은 어떤 계명이고 현대화해서는 안 될 계명은 어떤 계명이며 둘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현대화가 곧 계명의 폐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후좌우 사정을 잘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단지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래도 지킬 수도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은 차나 책이 아니라 제사에 관련된 물건들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제도는 생각보다 복잡했고 거기에 필요한 물건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사제가 준비해야 할 것들고 있지만 제물을 바칠 사람이 준비해야 할 것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런 물건들을 파는 사람들이었으니 만일 이들이 없었더라면 제사 드리러 온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었을 것입니다.
돈을 바꿔주는 사람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는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가 있었습니다. 성전화폐는 성전 밖에서는 쓸 일도 없고 쓸 수도 없고 성전에서만 쓰였던 돈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온 돈을 성전화폐로 바꿔야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습니다. 환전상이 필요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편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값싼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니 환전상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과 환전상들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제사장 권력을 등에 업고 막대한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콕 집어 비판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나쁜 자들도 없진 않았겠지만 대체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물을 드리는 일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이들이 대단한 부당이득을 취하지도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아예 제사를 드리지 말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이들을 쫓아내신 걸까요?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좀처럼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는 도에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셨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뭘 어떻게 잘못했다고 해서 예수님은 노점상을 몰아내는 용역처럼 행동하셨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다음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이 짧은 구절에 대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이 말은 매우 뜬금없어 보입니다. 방금 전까지 분을 못 이겨서 채찍을 휘두르며 장사꾼들을 내쫓고 상을 뒤엎던 예수님이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왜 이 말이 여기 있는 걸까요? 그 답은 여기서 말하는 ‘물건’이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가리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제기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를 금하셨던 얘기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금하셨다 해서 그들이 그대로 행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이 짧은 한 마디에 성전과 성전제도,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금하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일은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팔거나 환전을 하거나 비둘기를 파는 일 따위를 금하신 게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행위 그 자체를 금하신 것입니다. 제사는 왜 드립니까?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다양한 이유와 목적이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죄를 지은 자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침으로써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얻고 분노한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보려는 것입니다. 곧 제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제사제도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고 또 예수님을 말씀을 들었던 ‘그들’이 누군지는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설명이 없으니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고 알 도리가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오, 하나님 맙소사!’이고 영어로는 ‘오 마이 갓!’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여기서 엄청난 말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답니다. 여기서 ‘너희’는 앞에 나온 ‘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들’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놓은 자들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뒤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고 했으니 ‘그들’은 곧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되겠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그런 곳으로 만들었답니다. 이런 짓을 한 자들이 대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나중에 이들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임이 드러납니다) 그 전에 ‘강도들의 소굴’이란 말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위엄을 과시하는 제사장들이 모두 강도들이란 말이 되겠습니다. ‘소굴’은 강도들이 강도질한 물건을 쌓아두는 곳이니 제사장들은 강도들이고 성전은 그들이 강도질할 물건을 쌓아두는 곳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쌓여 있는 귀한 물건들은 모두 강도들이 강도질해온 물건이 되겠지요. 이런 물건을 우리는 ‘장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리러 제물을 갖고 성전에 온 유대인들을 제 발로 귀한 물건들을 강도들에게 갖고 와서 그것들을 장물로 만들어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충격 아닙니까? 너무 충격적이어서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신 데까지 생각을 펼치기가 쉽지 않지만 이 말도 충격적이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을 위한 곳이라 했습니다. 유대인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란 뜻입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이 와서 제사를 드리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만민을 위한 집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민이라고? 웃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에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랍니다. 만민이 각자의 기도제목을 내놓고 함께 기도하며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곳이랍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사는 어떻게 될까요? 1천 년 이상 거기서 하나님께 드려져온 제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됩니까! 폐지되는 거지요!
이건 말 그대로 ‘혁명’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자는 얘기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도 없애고, 짐승을 잡아서 제사 드리는 짓도 하지 말고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겠다니 이런 말씀을 듣고 ‘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전에도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못마땅해 했지만 죽이려고까지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생각을 바꿔서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하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답은 ‘성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성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드러난 바,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 만큼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 주일이 계속하겠습니다. ♣
왜 성전에서만 통용하는 화폐를 만들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