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LA로 돌아온 '장고'

by Edchun posted Mar 23, 2013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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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LA로 돌아온 '장고'
                                                                                       전용근(Ed Chun)
우리가 LA로 2011년 가을에 다시 돌아왔다.
이곳을 떠난 지 꼭 30년 만이다.
한국에서 20대에 떠나 미국에 온 지 40년이 지나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면서 찾아온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타향살이 실컷하고 귀향하는 기분으로 돌아온 것이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미국 이민생활 동안 이사한 숫자를 
세어보니 27번이나 하였다는 것이다.
9개 주를 돌고 돌아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미 동서를 두 번 돌고, 서태평양 괌에서도 2년을 살고 온 것이다.
내가 어떤 이같이 군인이나 외교관이나 회사 일로, 직장 관계로 전근하여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마는,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은 나 자신이 원하여 옮겨 다닌 세월이니,
다 그 대가의 상벌은 나에게만 해당할 것이다.
아내와 아들딸에게 감사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실 우리는 시카고로 1973년 처음 이민하여 2년을,
다시 뉴욕으로 가서 살았던 3년 생활은 생략하고,
1977년에 이곳 LA로 이사하여 5년을 살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35년 가까이 지낸 미국 생활을 기술하려고 한다.
 
우리가 LA를 떠난 것은 1982년 봄이었다.
U-haul 트럭을 몰고 LA를 떠날 때에는 캘리포니아에 연정이란 것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에 자신만만한, 겁없는 젊음 하나를 자산삼아 택한 행선지는 
더 광활하고 사나이같은 기풍의 달라스 텍사스 주였다.
누구 하나 나의 결정에 '철없는 행동'이라고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끝없는 목장과 늘씬한 말들의 여유로운 거드름,
광야를 달리는 역마차와 cowboy들의 총싸움 등의 서부영화의 장면들은
중학생 때부터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텍사스, 이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끌어안을 수 있다면...'
 
선인장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피닉스로, 투산 애리조나 주를 지나 
뉴멕시코의 사막과 캐니언들을 돌아 텍사스 최남단 서쪽 멕시코와 경계인 엘파소를 들러
사흘을 걸려 달라스에 도착하여, 지인을 통해 아파트를 얻었다.
LA보다 다이나믹하고 현대적인 건물들과 널찍한 고속도로,
화려한 쇼핑몰과 대형주택, '덥다'는 표현은 약하고,
'뜨거워요'라는 표현이 맞을 100도 이상의 열기 속에서 8년을 살았다.
역시 텍사스는 넓다. 한반도의 4배다.
Lone Star. 늘씬하게 잘 생긴 미녀들,
1980년대에는 미스 USA에 연이어 뽑히는 주가 텍사스 미녀들이었다.
'산과 계곡이 없는 평지에서 자라서 그런가?'
샌안토니오의 Water Walk은 미국의 이태리 베니스랄까?
다운타운의 물거리는 Boat Taxi를 타고 돌아보는 재미와
TexMax 음식들을 파는 레스토랑과, 멕시칸 악단의 연주는 참으로 흥겹다.
신도시 휴스턴의 화려함과 NASA의 우주선,
아름다운 항구 코퍼스크리스티와 파드러아일랜드의 백사장,
낚시 명소인 갤버스톤 해안가의 후끈한 열기,
텍사스 페어에서 주먹 크기 만한 칠면조 넓적다리 구이 맛은 잊지 못한다.
 
오클라호마를 거쳐 아칸소의 Hot Spring은 한국 사람이 많이 좋아할 것이다.
인구 5만의 이 도시는 온천 휴양지로, 불란서의 영향으로 도시가 고풍으로 건설되었고, 
양쪽 길가의 BathHouse들과 호텔 레스토랑은 인상적이다.
호텔과 연결된 산자락의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야외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눈 내리는 하늘을 감상하던 때가 그립다.
이곳은 예전에 인디언들의 휴양지였고 한다. 
그들이 어딘가를 다쳤을 때, 그 상처를 온천수에 담그면 효험을 보았다 한다.
 
8년을 텍사스에서 살다 보니 근질근질하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Northwest 미 서부 북단 캐나다 국경의 도시 시애틀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이곳을 향해 가는 오레곤의 서부 해안은 빼놓을 수 없는 드라브 코스일 것이다.
Eureka 캘리포니아 최 북단 도시에서 Redwood National Park을 거쳐
101번 오레곤 하이웨이에 들어서면 해안에 멋진 바다 풍경과 등대, 
물개들의 서식처, 아름다운 어항의 아기자기한 마을들, 
종일 달려도 피곤치 않는 해안도로, 신선한 생선구이 요리, 친절한 주민들, 기념품 상점,
일생 처음으로 '저의 모텔에서 지내주심을 감사'하다는 그림카드를 보내 준 모텔,
온종일 걸리는 드라이브이지만, 미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해안이다.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섬과 반도의 해안도시 시애틀,
만년설의 Rainier Mt.의 설경은 장관이고,
Olympic National Park의 하이킹과 캠핑은 잊지 못한다.
숲속으로 수 마일을 걸쳐 놓여진 Wood Board Walk을 통하여 서해안에 이르러서
인간 문명의 흔적을 볼 수 없는 해안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날 돌아오는 길에 인디안 어촌에 들러 갓 잡아온 대구를 
파운드당 15센트에 사와서 끓여 먹는 매운탕, 일품이다.
보트를 타고 외곽 해안 Juan Island로 나가서 딴 방울미역, 
청록색 줄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고, 연어회와 곁들이면 왕의 진미가 부럽지 않았는데...
 
인생 여정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한국에서 미국에 이민하여 서부에 살다가, 
특별한 연고가 아니면 Midwest쪽으로 이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외였다.
학창시절 즐겨 부르던 '켄터키 옛집'의 본향 루이빌 켄터키였다.
시애틀에서 짐을 싸서 다시 북동쪽 90번을 타고 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험한 산길을 지나 이틀 걸려 도착한 어느 모텔에서 아내가 나에게 한 말을 아직 잊지 못한다.
'우리 산호세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여보!'
이곳에서 하루 반나절이면 행선지인 캘리포니아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곳에 좋은 Job Offer가 있었다.
멈칫하였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동으로 향하였다.
무지막지한 남편이었을 것이 당연하다.
루이빌 켄터키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는데,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말하기를, 
'아빠, 여기는 아시안들이 사는 곳이 아닌것 같아' 하는 것이 아닌가.
충격적이었다. 아들은 짐을 내리고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것이지만,
부모들이 이런 외딴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하는 말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이곳을 나의 삶터로 일구어 나가기로 하였다.
동양인이라고는 보기도 힘든 곳이라서,
공항에 나가 보면 여행객 100명 중에 하나나 있을까 말까 했으니까...
오히려 그곳 주민들의 친절과 도움은 각별하여,
이곳에서 딸을 고등학교, 대학까지 미시간에서 마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말들의 고향, 켄터키 더비 말경주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며,
4월부터 시작하여 5월 첫 토요일의 Churchilldown의 말경주는 온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한달 내내 더비파티로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명절로 법석인다.
이 경주의 특색은 난생 처음으로 경기에 임하는 말들로서,
우승을 하면 수백만 불짜리 명마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Blue Grass의 아름다운 목장과 들녘 광경,
'켄터키 옛집'의 포스터의 고향 Bardstown의 옥수수밭, 
링컨 생가의 오두막집, 세계 최장의 맘모스 동굴,
종마의 본터인 렉싱톤, NCCA 챔피언 UK, 한국 밤맛 나는 산밤,
 
이곳에서의 한 가지 잊지 못할 아찔한 사건을 잊을 수 없다.
하루는 시골길을 지나다가 한 농지를 세일한다는 광고판을 보고,
그 땅 끝자락이 있는 집으로 샛길을 따라 들어갔다.
멀리서 보니 한가한 농가 앞에는 한 노인이 흔들의자에 앉아 편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집 가까이 이르자, 옆문이 열리면서 
한 아낙네가 한 손에 장총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섬짓 놀랐지만, 그렇다고 어찌 도망칠 분위기는 아니어서 자세를 고치고, 
부드러운 소리로 '땅을 판다는 사인을 보고 들어왔노라' 설명하였더니,
그 아주머니는 총을 놓지 않고서, 
퉁명스럽게 빨리 이곳을 나가고 전화로 연락하라고 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것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뒤돌아 나왔다.
아직도 이곳은 일세기 전의 의식과 모습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깊은 시골에 가면, 아직도 전기가 없는 집이 있다고 한다.
 
10년을 켄터키에서 살고 오하이오 강 건너 100마일 동쪽 신시내티로 이주하였다.
켄터키하고는 강 하나 건너 150만의 큰 도시다.
이곳에서 8년을 살았다. 오하이오 주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때마다 
승자를 가름하는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아이덴티티를 가늠하는 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가늠대랄까.
미국인이 매일 쓰는 Tide, Crest 등을 만든 P&G 회사를 중심으로,
지금은 추신수 선수가 활약하는 Reds, 풋볼의 Bangels로 유명하다.
Bangles 로고가 '한국호랑이'의 모습이라서, 나는 지금도 팬이다.
 
오하이오를 떠나 조지아 애틀랜타로 가게 된 것은, 나 개인의 의도가 아닌 다른 사유에서다.
요양 목적으로 소나무로 우거진 작은 별장에서 8개월을 지내게 되었다.
남부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지형적으로 남동부의 중심으로서 플로리다 주를 남부에 두고
북으로는 캐롤라이나 주를 경계로 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땅콩과 복숭아로 유명한 주이다.
따스한 기후와 풍성한 농작물은 값싸고, 
주택과 땅들이 미 대도시권에서는 가장 싸다고 한다.
한국인도 10만을 헤아리고 있으나, 경제 침체와 경기 악화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남부에 기아차와 인근의 앨라배마 주에는 현대차 생산기지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면은 자랑스럽다.
관광지로는 Mono Rock Mt.은 큰 한 덩어리의 돌로 이뤄진 산과,
그 벽에 남부군의 명장 Lee 장군 일행의 말타고 출정하는 모습을 새긴 그림은 장관이다.
100마일 북쪽 테네시 차타누가에 가면 
남북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현장을 살펴 볼 수 있다.
 
다시 처음에 뉴욕에서 LA로 횡단하던 때를 돌이켜 기억을 더듬으면 
캘리포니아의 꿈을 그리면서 뉴욕을 떠난 것은 1977년 봄이었다.
뉴욕에서 학교를 마치고 안전한 직장을 갖게 되었고, 
1976년 5월에는 아들을 낳았다.
다음 해에 첫 돌잔치를 치루고 3,000마일이 넘는 대장정에 나선 것이다.
볼보 스테이션 웨건에 보따리 짐들을 싣고 떠났다.
우리는 마치 자신감이 넘치는 젊음, 막힐 것이 없는 탱크의 발동처럼 말이다.
아들을 안고 떠나는 기분은 백만 불 예금통장을 가진 것보다 
훨씬 귀한 것을 얻고 떠나는 기분이었다.
사흘을 걸쳐 록키 산맥의 정상을 들러 울창한 삼림과 만년설의 산너머 산산산...
키를 넘은 갈대숲과 순록 떼들의 행렬,
계곡 사이로 깊게 흐르는 강줄기, 그리고 호숫가에서의 물새들의 물놀이... 
Glenwood Spring 온천에서 여행으로 피곤한 몸을 담그고, 
원기 회복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리면 캐니언들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브라이스캐니언, 자이언캐니언 등의 큰 Red Rock들의 신기한 모형들...
해 지는 사막의 아름다운 적막감, 수시로 다른 색으로 변하는 석양노을,
늑대들의 울음소리, 독수리들의 고공회전,
혹시 골짜기 어딘가에 있을 인디언 촌락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을까…
드디어 라스베가스에 도착하여 찬란한 불빛 아래 허름한 모텔에 짐을 풀고,
동전 몇 닢으로 백만 불 잭팟을 떠트리는 흥분도 가져본다.
 
'California Dreamin' in such a winter day...
'마마 엔 파파스' 등의 노래는 캘리포니아에 대한 동경의 발단이었다.
글렌데일에 짐을 풀고 캘리포니아에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타임 지에도 소개되었던 LA의 한인타운, 올림픽 가.
독일 광부로 수고하고 이곳에 마켓을 성공적으로 이룬 이OO 씨,
놀만디 가까운 올림픽 길에 김방앗간 할아버지의 인자한 웃음,
한인회장을 역임한 아드님과 대식구들,
웨스턴 코너의 한인회관과 풍악놀이 벽화,
버몬트에 우래옥, 이태리 안경,
윌셔와 버몬트 코너에 큰 주차장의 칼스마켓,
8가에 동서식품, 짬뽕으로 유명하던 진흥원,
흰머리 형제분들이 하는 동일장, 세종여행사, 대륙상사, 버몬트 북쪽에 XX신문사,
베벌리 순두부, 한국종합의료원, 수많은 식당과 귀국선물점,
의료원, 한의원, 정비수리점 등
다 기억 못한다.
잊지 못할 기억들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민주화의 봄과 데모,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 미국으로 방출된 김대중 씨의 그리피스 팍에서의 시국 강연,
위태로운 조국의 현실에 안타까워하고 애타는 심정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에 희생된 사람들을 비디오를 통해 보고 울분하던 때도 있었다.
5년을 이곳에 살면서 다시 어디로인가 떠나고 싶은 충동은 왜일까?
캘리포니아보다 더 큰 곳은 어디일까 하고 지도를 살펴보니, 그 착점이 텍사스였다.
이 얼마나 사나이다운 명명인가?
 
처음 시작의 이야기로 눈을 돌리면 한 인생의 여정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다시 LA로 와서 아직도 미련이 있는 지난 40년의 기억을 더듬어 
미 동부 남부의 떠오르는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Old Black Joe' 늙은 흑인 노예의 애환을 그리는 
켄터키 Bardstown 포스터의 고향집 홀에서의 합창소리
'Gone are the days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헤밍웨이 생가 앞 해안에서 쿠바가 보일듯하다는 미 최남단 Key West 부두의 큰 석양 노을,
그리도 높이 물든 하늘...
 
미시간 호수 언저리 레이크 에리에 있는 Mackinac Island,
자동차 반입을 금하는 섬으로서 자전거, 마차와 말택시를 따라 섬을 도는 여행의 만끽…
 
한국 속리산 분위기의 Smoky Mt. 테네시의 시골도시,
게디스버그의 남부지방의 촌놈 관광 분위기,
서커스, 악단, 묘기요술, 크라운 행렬, 시골뜨기들의 거드름.
 
Fan Boat를 타고 악어 서식처인 숲을 헤치며 악어를 찾아 다니면서 
달리던 플로리다의 남쪽 Alligator Farm.
 
뉴욕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서, 
Upstate 뉴욕을 향하여 Paliside Pwy를 타고 달리는 기분, 
그리고 Seven Lakes와 West Point에서 내려다 보는 멋진 허드슨 강.
 
온 마을 천지를 울긋불긋 단풍으로 덮는 
코네티컷의 New Haven 물레방아 옛날 방앗간 식당에서 특산 실버웨어로 맛보는 송어요리.
 
Indiana의 Amish 동네에서 맛보는 사과파이와 초콜릿 쿠키, 쨈과 넛강정,
100퍼센트 수작업으로 만든 만년목기 Old Fashion 가구들.
 
시카고 John Hancock 95층에 있는 회전 칵테일 라운지에서 내려다 보는
미시간 호수의 Lakeshore 드라이브의 차량 행렬, 끝없이 펼쳐진 빌딩의 야경.
 
맨해튼 서부 이탈리안 Butch Shops 거리에서 끓이는 스파게티 토마토밋소스 냄새,
빵에 소시지와 누들에 소스를 듬뿍 부어 병콜라 한 병을 합해 단돈 1불로...
 
뉴욕 유대인 주택 근처에서 큰 김치통에 담아 파는 콜셔 오이지,
김치 대용 신선한 베걸과 마늘 냄새의 뜨끈한 비알리 빵.
 
뉴올리언스 해변가에서 흑인 부자가 불어대는 트럼펫 재즈 명품 연주
프렌치 쿼터 골목마다 Seafoods 냄새와 북새통 술꾼들.
 
미 남부의 체인 'Crocker Barrel' Restaurant의 절구질하는 갈색 사인
푹 삶은 그린빈과 매쉬드 감자와 그래비, Prime Beef 들기도 무거운 큰 접시.
 
퀘벡 주의 퀘벡시티의 언덕 위에 세워진 불란서 고풍의 건물들,
프랑스 요리를 맛 보고, 보트로 고래 구경을 나가 보는 진풍경.
 
잘 안 알려진 동부 남부지역을 상기하여 보았다.
아직도 수백 곳을 얘기해야 하는데...
허나 아직도 그 얼마나 많은 자연이 이뤄낸 명소들과 
인간 역사의 발자취를 눈여겨 볼 곳들이 많은가?
 
하늘의 보화를 쏟아 부은 듯한 보석 찬란한 브라이스캐니언, 
천만 톤 이상의 폭포의 물소리 대합창 나이아가라, 
만고의 전설을 속삭이며 조용히 흐르는 콜로라도 강,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 봉우리 산산산, 캐나다까지 이어지는 록키마운틴
신의 깊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깊고 깊은 계곡 그랜드캐니언, 
'No Return'의 마아린 먼로의 노래가 들릴 듯하는 쉐난도 강물,
한반도 동해의 거리를 계산하여 보는 카타리나 섬 서쪽 언덕,
신선들만 사는 곳 같은 메디슨 호수 건너 얼음산,
하늘의 끝같은 높은 산과, 하늘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뱀프와 루이스 호수,
인디언 불춤과 장작으로 구은 연어구이를 대접하는 브래익 아일랜드,
하얀 이빨과 뿔을 드러낸 들소 해골과 덩굴풀만이 나뒹그는 모하비 사막,
신의 정기를 받겠다고 붉은산 언저리에서 북을 치는 세도나, 
세계 최고의 고목들이 들어찬 세코야, 킹스캐니언과 요세미티 국립공원, 
미 최초의 국립공원 옐로스톤과 눈동굴을 지나가는 그레시어 공원
그리고 그리고...
 
자연은 자연을 부른다.
자연에서 우리가 나왔으니, 자연은 우리를 부양한다.
자연을 우리가 버리면, 자연이 우리를 버린다.
자연을 우리가 부를 때, 자연은 우리에게 삶에 원리를 배워준다
자연을 우리가 훼손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자연을 우리가 떠나면, 자연은 우리의 숨을 조인다.
자연을 우리가 무시하면, 자연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연을 우리가 저주하면, 자연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자연을 거역하는 징후들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지구 온난화로 깨어진 빙산조각에 매달려서 
갈 곳을 잃은 북극곰의 울부짖음 
기후의 변동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고
이 하늘 저 하늘을 헤매는 철새들
엘니뇨와 쓰나미로 뒤집어진 대양에서
산란기에 되돌아갈 수로를 잃은 물고기들...
 
자연을 낭비하는 인간의 행동들은
인스턴트 식품점을 통하여 무수하게 버려지는 Wrapping 종이들과 케첩,
식당에서 사용하는 일회용 젓가락들, 온 세상에 뒤둥그는 캔과 플라스틱 물병들
언젠가 자연은 우리에게 파멸의 쓰나미로 덮칠지 모르니 두렵다.
지금 있는 곳에서 일손을 멈추고 나와보라.
자연에서 우리는 삶의 활력과 충전을 얻게 될 것이다.
 
자연은 거짓이 없다
우리는 자연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왜냐면?
우리가 자연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청바지 입고 집을 나선다.
아직도 역마살 기세가 남아 있는지 흥얼거린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인생은 되돌아갈 수 없는 외나무다리인가?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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