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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7 /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죄가 없다면서 왜 죽였을까?

요한 19:1-16

 

곽건용 목사

 

지나치게 친절한 빌라도 씨?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이에 대해선 지난주에 비교적 상세히 얘기했으므로 오늘은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둘째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또는 ‘인자’를 자처하셨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대가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그다.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가 14:61-62). 지난 주일에 오늘 ‘인자’에 대해 얘기하겠다고 예고했지만 그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인자’에 대한 얘기와 빌라도의 법정에서 벌어진 일을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도 중요하지만 고민 끝에 그 얘기는 하지 않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벌어진 일 및 관련된 얘기에 집중하겠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가장 소상히 전하는 복음서는 의외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어떤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가 하는 것보다 그것이 갖는 의미, 곧 그것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증언하는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 법정 얘기도 거기서 벌어진 사건들보다는 그것의 의미에 더 집중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양()으로도 요한복음의 빌라도 법정 얘기는 공관복음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뭐 이런 것까지 기록했나......’ 싶을 정도로 꼼꼼한 구석도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빌라도 공관으로 예수를 데리고 갔더니 빌라도가 공관 밖으로 나와서 이들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께 사형을 선고한 의회를 대표한 자들이었으니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왜 빌라도가 친절하게 공관 밖으로 나와서 이들을 맞았는지를 자상하게 설명합니다. 그때가 유월절 즈음이어서 유대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빌라도 공관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나치게 꼼꼼한 보도가 아닙니까. 하지만 정말 빌라도가 유대인의 사정을 배려해서 공관 바깥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을까 싶은 의심도 듭니다. 좌우간 빌라도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소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이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악한 일’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귀찮은 듯 그들 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합니다. 설마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아닐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형에 처할 만큼 중죄인이란 얘기지요.

 

 

이른바 빌라도의 재판

 

여기부터 소위 ‘빌라도의 재판’이란 게 시작됩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여기서 요한복음이 재판의 전과정을 세세히 보도하지는 않음을 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죄명이 뭔지 이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네가 하는 그 말은 네 생각에서 나온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나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말해 준 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로마총독 빌라도 앞이지만 예수님은 당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네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너는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답니다. 빌라도는 짐짓 무심한 척 하지만, 그래서 유대인들의 고소에 관심 없는 척 하지만 사실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 무척 신경 쓰였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엉뚱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이 세상’이 뭔지는 알겠는데 거기 ‘속하지 않은 나라’는 과연 뭘 가리킬까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이 자기 부하를 시켜서 유대인들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빌라도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왕’이란 말이 귀에 거슬려서 “그러면 네가 왕이냐?”라고 재차 물었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역시 ‘왕’이란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

 

예수님은 분명 스스로 왕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셨을까요? 이 세상의 왕은 진리가 아니라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해왔습니다. 진리로 세상을 다스린 왕이 있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왕, 진리, 나라 등등은 이 세상의 왕, 이 세상의 진리, 이 세상 나라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나라였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답은 마지막에 찾아보겠습니다. 빌라도의 마지막 물음,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해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은 유일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제 빌라도의 법정 얘기를 상세히 전한 요한의 의도를 알 듯도 합니다. 그는 재판과정을 그대로 전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하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재판이 일종의 ‘쇼’였기 때문입니다. 곧 검사가 피고를 기소해서 죄를 찾아내고 변호사가 피고를 변호하고 배심원이 피고의 유무죄 여부를 따지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현대적 의미의 재판 과정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21세기의 재판에도 불의한 요소들이 곳곳에 널려있는데 2천 년 전의 재판이 정당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진행한 형식적 재판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기 직전인 1993년 말에 제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동창들이 제가 미국 간다고 송별회를 열어줬습니다. 그때는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찬양고무죄 같은 걸로 잡아들여 재판을 통해 감옥으로 보내던 때였습니다. 제 친구 중에 당시 현직 판사였던 친구가 송별회 자리에 왔는데 거기서 제가 그 친구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도대체 판사란 자들을 뭐 하는 거냐고, 판사들은 양심이 있는 거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국가보안법사건의 재판은 미리 정해진 각본대로 하는 거다. 몇 조 몇 항 위반이면 검사는 몇 년을 구형하고 1심에서는 몇 년을 선고하고 항소하면 또 몇 년으로 깎아주고 결국 대법원에서는 몇 년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판사에게는 재량이 없다.” 그 말을 하던 친구의 어두운 표정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21세기에도 이 모양인데 2천 년 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니 빌라도 법정에서 ‘법대로’ 같은 걸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재판은 그저 형식일 뿐이었고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었습니다.

 

 

우리 왕은 로마황제뿐입니다!

 

재판과정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여러 얘기가 나왔지만 빌라도에게 결정타를 먹인 사건은 이 같은 군중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놓아 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대체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어떻게 식민지 유대인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로 하고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대들의 왕이다.” 그러자 군중들은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답니다. 빌라도는 마지막으로 “그대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인가?”라고 물었는데 대제사장들은 이에 대해 역사에 길이 남을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시저뿐입니다!

 

그들은 “황제 만세!”를 외친 셈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체 대제사장들에게 로마제국은 무엇이었으며 그 황제는 누구였을까요? 이를 잘 보여주는 얘기 하나를 복음서가 전합니다. 그것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전하는 바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여부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0장이 전하는 바를 읽겠습니다.

 

하루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깊은 존경이 담겨있는 말로 들립니다. 이 말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들은 찬사를 늘어놓은 후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는 정말 알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겁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하면 유대인들이 싫어했을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말하면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곤경에 빠진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굽니까, 그렇게 간단히 함정에 빠질 분이 아니지요. 그분은 그들의 의중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다오. 이 돈에 누구의 초상과 글자가 새겨 있느냐?

 

데나리온은 로마화폐입니다. 이 화폐는 로마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지역 주민이 사용하게 한 것으로 특히 세금을 거둘 때 사용됐습니다. 그러니 데나리온은 일차적으로 로마제국의 경제적 힘을 상징하는 화폐였던 겁니다. 그런데 데나리온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에 누구의 초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는가를 물으셨고 그들은 로마황제의 것이 새겨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데나리온의 앞면에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과 함께 “티베리우스 시저, () 아우구스투수의 아들 Tiberius Caesar Divi Augusti Fillius Aaugustu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제사장을 상징하는 홀(지팡이)과 종려가지를 들고 있는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Livia)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데나리온이라는 돈이 로마제국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강요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로마제국이 경제주권을 쥐고 있으니 그걸 되찾을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주권은 그렇다 쳐도 야훼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둘째 내용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데나리온으로 세금을 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데나리온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 일반에게 권위 있는 해석을 내려줘야 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했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물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처지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투쟁하지 않고 협조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그들이 취한 입장이었으니 세금과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화폐제도는 그들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이 돈에 누구의 초상과 글자가 새겨 있느냐?”는 질문에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 대답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에 대해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고요. 요한도 “그러자 이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그의 답변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고 전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을 다양하게 해석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께서 황제(또는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고 세금도 내라고 하셨다는 주장에서부터 황제(또는 국가)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강조했다는 해석까지 다양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 세상에는 황제의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셨을까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은 그것대로 바치고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또 그것대로 바치라는 말씀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굳이 데나리온에 누구의 초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으셨을까요? 그렇게 행동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저는 예수께서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나누시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황제가 신의 위치에 올라서서 식민지 백성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예수님이 인정하셨을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주저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지만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서 남들을 지배하려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온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인 노릇을 해서는 안 됐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돌려주다’는 동사를 사용하셨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동사는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놓다’ 또는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왜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선 ‘황제의 것’이 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황제의 초상에 새겨져 있는 데나리온이라는 화폐이고 그것이 상징하는 로마제국의 경제체제를 가리킵니다. 반면 하나님에게 돌려드려야 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데나리온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까짓 금속을 녹여 둥글게 만들어서 황제의 초상이나 새겨놓은 동전 쪼가리가 정말 필요합니까? 그게 없으면 죽습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빈곤에 시달리고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깟 데나리온 따위는 황제에게 돌려줘라!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숨통을 조이는 세금제도와 황제숭배도 황제에게 돌려줘라! 이런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는지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그들’은 유대교 권력자들과 로마제국의 권력자를 통틀어 가리킵니다. 예수님 눈에 유대교 권력자들은 성전을 장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길을 독점하고 왜곡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맨얼굴을 드러냈으니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거긴 제사장 같은 중개자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고 거기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는 열망이 솟아나는 모든 사람들의 간절함과 목마름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마지막 기회’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늘 새로운 기회가 열려 있고 하나님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끝내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한편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로마제국에 대한 태도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얘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얘기들은 몇 가지가 있지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앞에서 말한 세금 얘기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정교분리’를 내세워 예수님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용인하셨거나 그에 대해 무관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내 나라를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어왔고요.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복음서를 표면적으로만 읽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에게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권력자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고 앉아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고......”라는 말씀은 권력의 탄압을 회피하기 위한 약자의 발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황제가 자행하는 착취와 스스로를 신의 위치에 앉히는 신격화를 강하게 부정하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가 답이다!

 

그렇다면 이 얘기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얘기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줍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는 참된 제자로 살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예수께서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신 ‘성전’이 과거의 얘기만은 아님을 인정하고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천 년 전의 성전과 오늘날의 ‘기업형 교회체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은 하나의 기업처럼 관리되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은 교회들 대부분이 그렇게 되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정신’ 운운하면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네.......’ 하며 혀를 찹니다. 오늘날 기업형 교회체제를 유지하거나 확장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예수님을 또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작고 소박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꾸려야 합니다. 작지만 자비와 긍휼이라고 하는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공동체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독점하는 사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 우리가 예배 마지막에 서로 손을 잡고 서로를 축복하며 세상으로 내보는 것처럼 모두가 모두를 축복하는 공동체, 사람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선포하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예수의 정신을 오늘날 실천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요즘 사회에서도 협동조합 운동이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대량으로 생산하고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스템을 거부하고 조금 만들고 조금 쓰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운동 말입니다. 저는 교회도 이와 비슷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을 분리하지 말고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온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으로부터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부동산을 사들였다가 이익을 남기고 되팔았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과연 하나님의 어떻게 보실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런 짓을 하는 동안 하루에도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죽어 가는데 말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온 세상은 오로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비롯해서 모든 재화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생명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사랑’이니 모든 생명에 대해 베푸는 사랑 역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공동체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공동체이고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는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오늘날 되살려내는 공동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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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lke 2013.03.25 11:10

    곽목사님,


    제목을 새로 만들어 글을 쓸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목사님 설교 밑에 다는것 같아서 여기에 글을 씁니다.


    먼저, 목사님의 설교는 언제나 읽고 들어도 좋습니다. 항상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셔서, 잠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잘 아는 성경이 "요한복음"입니다. 원래 시를 좋아해서 그런지, 글 뒤에 내포된 다양한 뜻을 찾을수 있어서 요한복음은 좋습니다. 읽고 공부 할때 마다 새로운것을 발견할수 있는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면서 도전입니다.


    빌라도를 생각할때 마다 안타깝고, 나도 혹시 빌라도와 같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특유의 대화체도 너무나 좋습니다. 저는 가끔 복음서 처럼 혼자서 가만히 주님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성령하나님의 음성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항시 저를 깨워주고 새로움을 할게 해줍니다.


    제가 먼저 곽목사님을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저보다는 제 아내가 더 곽목사님 팬입니다. 몇주 전에는 다 못들은 설교를 듣는다고 컴퓨터를 켜길래, 그렇게 길지 않은 설교된 왜 다 듣지 않고 연결해서 듣냐고 했더니, 너무 아까와서 아껴서 듣느라고 그랬답니다. 마치 맛있는 곷감 빼먹듣이 천천히 하나씩 설교를 듣는다고 합니다. 교회갔다온후에 충분히 채워짐을 못느꼈다고, 인터넷으로 목사님 설교를 듣습니다. 그냥 자기에는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불만을 말하는데, 왜 설교가 그렇게 짧냐고 합니다 (총 25 - 27분). 그럴때는 제가 그럽니다. 그런말 하다가는 곽목사님 교인들한테 혼난다고. 거기도 설교끝나고 파트락 점심을 먹을텐데, 설교가 늦게 끝나면 교인들이 좋아하겠냐고. 그래도 가끔씩 조금 긴 설교를 해주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터넷으로 듣는 사람들이 설교가 짧다고 컴플레인을 하더라고.


    참, 데이비드 클라인의 "욥기"서 주석서 3권 (38-42)이 나왔습니다. 혹시나 제가 실수를 할까봐 책이 도착할때까지 기다렸습니다. 2011년에 출판이 되었고요. 저는 반즈앤노블에서 샀습니다 (인터넷으로).


    요즘은 창세기, 욥기, 잠언, 그리고 요한복음을 같이 공부하는데, 재밋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는 태생이 조금은 영지주의적 같습니다. 지혜서를 좋아하는것도 그렇고 요한복음에 매력을 느끼는것도 그렇고, 노장사상을 좋아하는것도 그렇고. 어쩌면, 동양적인 태생과 저의 애매함을 좋아하는 경향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번주에는 저번에 이곳에서 어떤분이 추천한 "John Walton"의 "Genesis one"을 읽었는데,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번주는 "John Lennox"의 "Seven days that divided the world" 와 다른 책들을 보는데, 쟌 레녹스가 월튼의 해석을 비판하는 내용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다음에 질문을 좀 올려서 같이 생각해 보고 뜻을 모으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목사님과 같은 좋은 스승을 알게 되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5학년때 우이동으로 전학을 와서, 백운 1회, 쌍문2회, 그리고 선덕3회를 다녔습니다. 대학초년때는 장미원에서 생활을 했구요. 아직도 동생과 같이 대지극장에서 보았던 "영웅본색"과 성룡의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교회는 신일고 앞에 있었던 조그마한 교회를 다녔었습니다. 방학동, 우이동, 쌍문동, 수유동, 미아동, 삼양동이 저의 나와바리였습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것 만큼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 주는것도 없는것 같습니다.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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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건용 2013.03.26 08:52

    긴 댓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어딜 가도 팬이 별로 없는 편인데 민초스다에 오니까 팬들이 계시네요. ^^


    먼저 Mrs. 릴케 님께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즐겨주시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입니다.


    욥기 주석 셋째 권이 나왔군요.


    2년이나 전에 나왔는데 모르고 지냈네요.


    사실 욥기의 클라이막스는 뭐니뭐니 해도 38장 이후의 야훼 스피취인데


    그 부분 주석이 안 나와서 은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다 지쳤는지


    잠시 잊고 살았습니다. ㅎㅎ


    설교가 짧다는 말, 제가 머리 털나고, 아니 머리털 빠지기 시작한 다음에 첨 들어봅니다.


    맞습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면 큰일 납니다. ^^


    우선 제가 배가 고파서 더는 길게 못 합니다.


    사실 지난 석 주 동안 설교가 좀 길었는데


    제가 설교하다가 다리가 후들거리더군요.


    우린 예배를 12시 30분에 드리는데 전 예배 후 점심식사할 때까지


    아무 것도 안 먹거든요. 뭐, 특별히 신령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뭘 먹고 기운이 나면 말이 너무 많아져서 설교가 길어지니 그렇습니다. ㅎㅎ


    님은 참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창세기에 관한 책들은 제가 모르는 것들이네요.


    글구, 절더러 '스승'이라시면 이제부턴 '절교'입니다.


    선생이라고 불리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런 칭호는 제겐 영..... 아니올시다 거든요.


    백운, 쌍문, 선덕.... 모두 귀에 익지 않은 이름들이네요.


    세대에 약간 차이가 나긴 하나 봅니다 그려. ㅋㅋ


    공통점은 역시 '극장'이네요.


    건강하십시오.

  • ?
    Rilke 2013.03.26 12:52

    목사님의스승님인 다석 유영모선생과 함께 그시대를 이끌었던 김교신선생은 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쳤었는데, 직접 가르친 학교에서 보다도 밖에서 더욱 많이 알려졌었지요.


    아무도 , 목사님도 속해있는 교회와 교단보다는 밖에서 더욱더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아이삭 뉴턴의 말입니다.


    “I was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st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


    뉴턴처럼, 저도 연구를 하다가 또는 책을 읽다가 발견되는 작은 것들로 인해서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많은 것들이 바닷가 모래알만큼 쌓여 있더라 해도, 한 평생 우리가 알고 깨달을수 있는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허하게 될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이쁜 조약돌같이, 저에게는 요한복음이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어둔밤을 비추는 환한 빛과 같고, 요한복은 서론은 창세기를 이해못하는 우리들에게 비추는 또 다른 빛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 민초스다도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도 제 두뇌속에 뉴론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또다른 빛이 아닌가 싶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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