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 엎드려 땅에 입 맞추기

by 김원일 posted Mar 27, 2013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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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4 / 종려주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의 행진

누가 19:28-40

 

곽건용 목사

 

권력을 탐하는 교회

 

군주, , 황제, , 권력, 지배....... 이런 것들이 대체 뭐라고 사람들은 그토록 이것들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쓸까요? 권력은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힘’이라고도 정의되기도 하고 ‘한 사회관계 안에서 반대와 저항을 무릅쓰고 자기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정의되기도 합니다. 곧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자기의 의지를 관철하게 하는 수단을 권력이라고 부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남을 부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권력입니다. 남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면, 곧 남을 내 맘대로 부리려면 많은 조건을 갖춰야겠지만 다음 세 가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들 합니다. 첫째로 남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며 셋째로 나와 남을 구별해야 합니다.

 

제가 한 40여 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그리고 그 중에서 20여 년간을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기쁨과 보람, 행복을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성취감을 가져본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고 슬펐던 때도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고 그릇된 신앙생활을 하는 걸 보면서, 또 교회가 절대 해선 안 될 일을 하고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서 ‘신앙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교회가 어디로 가려고 이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 떨어본 적도 많았고 조급하게 그걸 고쳐보려다 잘 되지 않아 무력감을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아직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식으로 권력을 소유하려 한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런 권력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교 당국자들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반유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행태를 비판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이 행동합니다. 감언이설과 협박과 사기로 추종자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이비 목사, 사이비 교주들 얘기가 아닙니다. 예배당 안팎에 버젓이 십자가를 걸어놓은 수많은 ‘멀쩡한’ 교회들은 사이비교주보다는 더 세련되고 점잖고 부드럽고 품격 있어 보이지만 결국은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앞에서 권력을 소유하고 유지하려면 통제, 당근과 채찍, 그리고 나와 남의 구별이 필요하다고 말씀했는데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지식을 자기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들이 나눠주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듯이, 자기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또 교인들을 그렇게 가르칩니다.

 

또 이들은 신앙과 신학에 관한 지식도 독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알아도 되는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 그리고 알면 안 되는 것을 자기들 맘대로 구별하고서 신앙이 약한 사람에게는 굳은 음식을 주면 안 된다면서 ‘알아도 되는 것’만 가르칩니다. 알 필요가 없는 것과 알면 안 되는 것들은 교인들의 신앙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 말입니다. 교인들 신앙이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는 말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실 아닌 거짓이 곧 부드러운 음식은 결코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이 교인들 신앙에 도움이 될 리 없습니다. 거짓말은 부드러운 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먹지 못하는 것이고 먹어서는 안 되는, 몸에 해로운 것일 따름입니다. 이들은 신앙에 도움이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아는 걸 다 공개하면 교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늘 곽 목사가 미쳤나? 왜 누워서 침을 뱉나?’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미쳤다고 해도 좋습니다. 저는 목사 이전에 한 기독교 신자로서, 아직까지 해온 신앙생활의 절반 정도를 목사로 살아온 한 기독교 신자로서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당근과 채찍으로 신도들을 때론 어르고 설득하고 때론 뺨을 치기도 합니다. 이러 저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러저런 복을 주시지만 반대로 하면 벌을 주신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축복을 당근으로 심판을 채찍으로 쓰고 있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의견 내는 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교회처럼 말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곳도 드뭅니다. 말은 목사가 다 하고 교인들은 그저 듣기만 하는 데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말 많고 질문 많은 사람을 싫어하고 무조건 ‘아멘!’으로 받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나와 남을 철저하게 구별합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구별하고 내 교회와 네 교회를 구별하며 내 종교와 네 종교를 구별합니다. 그저 구별하는 데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거기 그치지 않고 남을 적으로 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남을 그저 ‘다르다’(different)고 생각하지 않고 ‘틀리다’(wrong)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곳이 교회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추구하시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아프게 돌아보며 오늘 종려주일을 맞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때 길가에 모인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전하는 누가복음 19장을 읽으면서 과연 교회란 무엇인지,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 만일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교회를 보고 뭐라고 말씀하실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었습니다. 복음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서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도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여 하나님나라 운동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나라를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복음은 하나의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라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하고 힘을 행사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셨고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는 공동체라면 운동을 해나가는 방식도 예수님의 방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셨고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세상 권력이 작동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세상과 정반대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실에 주목하는 교회는 극히 일부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앎을 독점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말씀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사용하신 ‘비유’라는 방식은 듣는 사람에게 뭔가를 감추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기 쉽게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함에 이 방식을 택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소수의 ‘깨달은 사람’이나 ‘현자’ 또는 ‘선택된 자들’만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개방된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유를 말씀하실 때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소재를 사용하여 모두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혜나 지식, 학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들을 귀와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설득하려 하신 적도 없습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듣는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통방식은 일방통행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의 대답보다는 진지한 질문을 더 좋아하셨고 그걸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께 와서 뭔가 묻는 사람을 물리치시지 않았고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도,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도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서 물음에 답을 주셨습니다. 병든 아들을 데려온 어머니도, 손가락질 받던 세리도, 죄를 짓고 끌려온 사람도 모두 예수께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차별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앞에선 의회원도 죄인도 모두 똑같은 한 생명이고 인격체였습니다. 율법학자와 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의 저녁초대에도 응하셨지만 바리새인의 초대로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모습에는 예수님의 리더십이 상징적으로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예수께서 앞으로 나아가시자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았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나님께 영광!” 그러자 군중 속에 끼여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누가 19:35-40).

 

군중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초라한 왕에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당시가 로마제국 시대였으니 결국 로마황제와 비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황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화려하기 그지없는 행진을 했습니다. 이는 자기만족을 위해서기도 했지만 자기 위세와 권력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황제는 기름이 흐르는 흰말을 타고 붉은 주단이 깔린 길을 보무당당히 행진했습니다. 그 뒤로는 갑옷 입고 투구 쓴 수많은 군인들이 창칼을 들고 따랐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진이 아니라 힘의 시위요 권력의 과시였던 것입니다. 감히 황제에게 덤비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기름이 흐르는 백마도 없었고 붉은 주단도 깔려 있지 않았으며 창칼로 무장한 군인들도 없었습니다. 백마 대신 피곤에 지쳐 뒤뚱거리며 걷는 나귀가 있었고 붉은 주단 대신 군중들이 깔아놓은 누더기 겉옷이 있었으며 창칼로 무장한 군인들 대신 종려가지를 흔드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이것을 왕의 행진이라 부르겠습니까. 비록 군중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 부르며 환성을 올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신 적이 있었습니다(요한 6:15). 왕이 되셨을 때 좌우의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셨던 분입니다(마가 10:35-40). 이런 분이 모슨 왕입니까! 이런 분이 어떻게 왕이란 말입니까! 세상에 이런 왕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아닌 분을 자꾸 왕이라 부르고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으니 우리네 신앙이 잘못 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섬김의 리더십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리더십을 ‘섬김의 리더십’ 또는 ‘종의 리더십’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리더십이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자기들을 고관대작이라고 믿고 있으니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할 리 없습니다. 물론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의 일을 실행하는 교회들도 적지 않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에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입니다. 이 리더십을 잘 보여준 사건으로 저는 몇 년 전에도 얘기했던 오체투지(五體投地) 삼보일배(三步一拜)에 다시 한 번 주목합니다. ‘오체투지’는 부처님께 드리는 큰절로서 몸의 다섯 부분, 곧 두 팔꿈치와 두 무릎과 이마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을 가리키고 ‘삼보일배’는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에 새만금 개발을 반대하는 뜻으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전북 부안에서 서울까지 305km 57일에 걸쳐서 오체투지 삼보일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6년 후인 용산사태 때도 문 신부님을 비롯해서 여러 분들이 오체투지 삼보일배 행진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몸을 바닥에 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땅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땅의 숨소리를 들어야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교회와 우리 모두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삼보일배 하는 심정으로 조급해 하지 말고 느리지만 한결같은 걸음으로 골고다로 향하는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몸을 높이 쳐들면 권력의 달콤한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면 실망하고 좌절하기 십상입니다.

 

혹여 ‘우리 같이 작은 교회가 무슨 권력의 유혹씩이나.......’라고 생각하지는 맙시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세상에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갖고 순진한 신자들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당근과 채찍으로 겁박하거나 조롱하지 말며 하나님도 하시지 않는 차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맙시다. 저는 이게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가 잘못된 환경에서 옳지 않은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익숙한 옷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쉽지 않아도 우린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섬김의 리더십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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