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과연 죽으러 왔는가?

by 김원일 posted Apr 07, 2013 Likes 0 Replies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3 3 31 / 부활주일

 

부활, 새로운 창조

누가 24:1-12

  곽건용 목사

 

부활절의 기원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당연히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점들이 섞여 있습니다. 부활절의 영어이름 ‘easter’는 고대 색슨족이 섬겼던 봄과 창조의 여신 ‘이스트레’(Eastre)에서 비롯됐습니다. 주후 2세기경 그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이 원주민이 믿는 여신 이름을 부활절에 붙였다는 겁니다. 기독교 최대의 축제인 부활절을 가리키는 말이 본래는 기독교적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대개는 부활절이 4월에 오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약간 일찍 왔습니다. 이보다 며칠 더 일찍 오는 해도 있습니다. 부활절 날짜가 매년 달라지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다음의 만월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 날이 양력으로는 3 25일에서 4 21일 사이가 되는데 이는 주후 325년에 열렸던 니케아 종교회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이 날은 로마 태양신의 축제일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부활절 날짜도 기독교가 아닌 이교(異敎)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스터’라는 이름과 부활절 날짜의 기원이 기독교와 무관하다니 이게 웬일인가 싶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사실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흔히 ‘단일민족’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우리 겨레가 한 조상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단일민족이란 것은 신화요 허구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한 명의 조상에서 비롯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란 종교는 초기부터 다양한 이교의 종교 전통들을 받아들이면서 발전되어왔습니다. 비유하자면 기독교는 사방에서 수많은 작은 지류(支流)들이 흘러 들어와서 만들어진 큰 강과 같습니다. ‘이스터’라는 이름과 부활절 날짜도 이 사실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들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이 아닌 ‘죽임’이 문제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합니다. 일단 죽어야 부활을 하든지 말든지 할 테니 말입니다. 살려면 우선 태어나야 하고 죽으려면 우선 살아야 하듯이 부활하려면 우선 죽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지만 죽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죽음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죽음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란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어떻습니까?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부활은 죽음의 궁극적인 목적입니까, 아니면 필연적인 결과입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은 죽으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태어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죽음이었다는 얘긴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죽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 역시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사신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십자가가 섰던 골고다 언덕은 예수님 삶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예수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죽으러’ 오신 게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러 오셨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넉넉하고 풍성하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으로 상징되는 어둠과 죽음의 세력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명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한 살인행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사하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으셨습니다. 사고로 죽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명백하게 살해당하셨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세력이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죽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었다면 부활은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극복한 사건이 됩니다. 부활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자연적인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의한 살인을 넘어서는 사건이란 말씀입니다.

 

죽음과 죽임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 따라서 죽음의 극복과 죽임을 극복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나사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났으니 사람들이 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것도 죽은 지 사흘이 지나 시체 썩은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말입니다.

 

이 사건은 놀랍고 신기한 기적의 사건이지만 한 번 벌어지고 만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나사로가 그렇게 되살아난 후 얼마나 더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는 되살아나 잠시 더 살았을 뿐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 당시는 놀라운 사건이었겠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달랐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죽임’에 대한 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난 사건임을 변증하려고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교회는 온갖 사상과 철학과 심지어 과학까지 동원해서 부활이 가능하다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실제 일어난 사건이냐 아니냐를 두고 아무리 논쟁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로 부활을 ‘입증’해본들 그걸 믿지 않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증명하거나 논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부활의 취지나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부활은 믿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부활은 믿어지니까 믿는 게 아닙니다. 믿을 만하니까 믿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믿으니까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궤변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부활에 대해서 사람이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이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믿어지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니까 믿어지는 것이란 말이 전부란 얘기입니다. 부활은 지식이든 영적 능력이든 사람이 갖고 있는 그 무엇으로 믿어지니까 믿는 게 아니라 믿기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부활은 부활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믿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부활을 믿어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그것이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에 대한 증언이라기보다는 빈 무덤에 대한 증언입니다. 십자가사건이 있고 사흘 후 이른 새벽 몇 명의 여자들이 향료를 가지고 예수님 무덤에 갔습니다. 시신에 바를 향료를 갖고 갔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부활에 대한 기대가 조금도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이 열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덤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웬 남자 둘이 눈부신 옷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더랍니다. 그들이 두려워 얼굴을 숙이고 있었는데 남자들이 “어찌하여 그대들은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모든 일을 얘기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답니다.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고 놀랐다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누군가 시신을 다른 데로 옮겼다면 무덤은 얼마든지 비어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놀란 까닭은 무덤이 비었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들에게서 “어찌하여 그대들은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그 다음으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얘기를 전합니다.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는 마른 뼈가 되살아나는 에스겔 37장을 떠올립니다. 골짜기 가득 버려져 있던 마른 뼈들에게 에스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뼈들에 힘줄이 이어지고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졌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예언자가 야훼의 말씀대로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라!”고 외치자 사방에서 숨이 불어와 마른 뼈들을 스치자 그 뼈들이 우뚝 우뚝 일어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도 부활했습니다! 죽지도 않은 사람들이 무슨 부활이냐고요? 그들의 몸은 살아있었지만 영혼은 죽어 있었습니다. 끌려가는 예수님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졌을 때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게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떨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죽었고 그들의 신앙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죽었고 희망 또한 죽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죽어 있었던 제자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그들이, 두려워 떨며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후회하던 제자들이 문을 열고 박차고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때 그들은 부활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부활했고 사랑과 신앙이 부활했습니다. 희망이 부활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의 식구 여러분! 이와 같은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오늘 여러분 가슴을 힘차게 두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양심이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사랑이, 그리고 희망이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부활 증언을 듣겠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고린도전서15:42-44).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