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라는 것이 정말 이렇게 싱거운 거였나? 아멘!

by 김원일 posted Apr 20, 2013 Likes 0 Replies 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3 4 14 / 부활 후 둘째 주일

 

진리가 무엇인가? 2

요한 8:31-38

 

곽건용 목사

 

빌라도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매주 설교전문을 이메일로 보낸 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0년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가장 많은 답신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매주 2백 명이 넘는 분들에게 설교문을 보내는데 답신이 한 통도 없는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땐 설교가 제대로 배달이나 됐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가끔 답신을 보내는 분이 있는데 대개는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라거나 “감사합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신약학을 전공한 학자에게서 온 전문적인 의견과 조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신도들에게서 왔는데 그 중 다수는 “다음 주 설교가 기대됩니다.”였습니다. 지난주일 설교 마지막에 오늘은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반드시 하겠다고 ‘장담’했기 때문에 그런 답신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 한 주간을 저는 적지 않은 부담을 갖고 지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했듯이 제가 하려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기대하고 있다고 하시니까 “더 좋은 답이 있나?”라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에 대해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제가 할 말에 대해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 제게 이 질문을 한 분은 지난주와 오늘 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저도 그에 못지않게 노심초사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던진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말씀했습니다. 질문하는 빌라도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진리가 무엇인지는 제한된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은 이유 못지않게 궁금한 점은 빌라도가 왜 이 질문을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빌라도는 왜 이 질문을 했을까요? 그는 자기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이 좌우될 한 초라한 유대인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엄청난 질문을 왜 했을까요? 정말 그게 궁금했을까요?

 

본디오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만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자료만 갖고도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그걸 추구한 자가 아니란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진리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의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비단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기 때문에 하는 얘기만은 아닙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폭군’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사마리아인들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총독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말입니다. 이런 자가 던진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진지했다고는 보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우린 그가 왜 이런 질문을 예수께 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빌라도는 그랬다 치고 현재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과연 “진리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묻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기독교를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물음은 빌라도의 그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

 

흔히 종교는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컨대 기독교는 열린 종교이고 불교는 닫힌 종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도 기독교를 열린 종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고 닫힌 종교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불교나 유대교, 회교 안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닫힌 종교’는 어떤 절대적인 권위를 상정하고 무조건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반대로 ‘열린 종교’는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는 종교입니다. 열린 종교의 하나님은 한계가 없는 분, 테두리가 없이 한없이 크고 무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시는 분으로 한계가 없는 분입니다. 반면 닫힌 종교에서 하나님은 정해져 있는 원칙 같은 분이고 고정된 체계로 받아들여집니다.

 

요즘 우리는 두 개의 성서학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20년 가까이 해온 것으로서 금요일 저녁에 교회에서 있고 다른 하나는 올해 처음 시작한 것으로서 토요일 오전에 오렌지카운티에서 열립니다. 둘 다 제가 이끌기 때문에 저는 주말이 되면 몸도 마음도 바빠집니다. 금요일 저녁 9시에 첫 번째 시간이 끝나고 다음날인 토요일 오전 9시부터 두 번째 시간을 갖는데 두 성서학당의 주제가 완전히 다르므로 두 강의를 따로 준비해야 합니다. 좀 바쁘고 힘들긴 하지만 그런 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학당 모두에 진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토론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서학당이 좋은 점은 모든 참가자들이 질문하고 또 대답도 한다는 점입니다. 저만 대답하는 게 아니라 모든 참가자들이 대답하는 성경공부는 그리 많지 않을 터인데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뿌듯합니다.

 

저는 성서학당은 진행하면서 기독교를 닫힌 종교로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인 자신이란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기독교를 닫힌 종교로 만드는 당사자는 기독교인들 자신입니다. 물론 목회자의 책임도 없진 않지만 목회자들을 앞뒤가 꼭 막힌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평신도들이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역설적으로 이런 현실에서 희망을 봅니다. 이유는, 사정이 이렇다면 기독교를 열린 종교로 만들 수 있는 당사자 역시 다름 아닌 평신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중에 어느 편이 더 변화하기 쉬울까를 생각해봤습니다. 현재까지의 제 결론은 목회자보다는 평신도가 더 바뀌기 쉽다는 것입니다. 먼저 평신도가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도 따라서 변하고 목회자가 변하면 교회도 변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열린 교회’로 바꾸고 기독교를 ‘열린 종교’로 변화시킬 주역은 평신도들이라고 믿습니다.

 

진리를 알면 너희가 자유하게 되리라!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진리’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진리에 대해 하신 말씀,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진리를 알지니......”라고만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진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하지만,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으신 채 그 진리를 알게 되면 우리가 자유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진리는 ‘자유’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진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왜 진리를 알면 구원을 얻는다, 영생을 누린다고 말씀하지 않고 자유로워질 거라 말씀하셨을까요? 혹시 진리는 자유를 누릴 조건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란 뜻이 아닐까요?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게 되면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얼핏 보면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예수께서 이전에 진리가 뭔지를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물론이고 다른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진리가 뭔지 정의하셨다는 얘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예수님이 착각하신 걸까요? 아니면 복음서 기자가 착각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진리가 뭔지 정의하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서 기자의 의도였다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의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데 있겠지요.

 

결론부터 미리 말씀하자면 예수님에게는 그것만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의 ‘진리’ 또는 절대자인 하나님께 직접 도달할 수 있는 ‘진리’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들에서 했던 부흥회의 주제는 하나같이 ‘복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고 기억합니다. 여기서 부흥사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복 받는 비결을 자기가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유치한 얘기 같지만 ‘진리’에 대해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 그것만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만병통치약 같은 그 무엇을 기독교의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진리는 아예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가 자유로워지려면 그런 진리를 얻거나 갖겠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럼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비유해봅니다. 불교에서 수도승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길고 길 세월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겨울에는 동안거, 여름에는 하안거, 그뿐 아니라 몇 년을 작정하고 바깥출입도 안 하고 수행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는 분들이 수도승들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수행의 결론인 셈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 좀 다릅니다. 기독교는 말하자면 깨달음에 해당하는 강렬한 원초적인 체험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을 흔히 거듭남(born-again)의 체험, 중생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체험을 매우 강렬하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좌우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멈추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이런 원초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한 후 그것을 삶의 과정에서 풀어내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지난 주일에도 얘기했던 부자 청년의 경우를 예로 풀어보겠습니다.

 

진리는 없다!

 

한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는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됐는지는 모릅니다. 스스로 일해서 부자가 됐을 수도 있고 부모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겠지요. 좌우간 그는 많은 걸 가졌지만 뭔지 모를 공허감이나 신앙적 갈증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예수께 와서 뭔가를 구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예수께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영생’이랍니다. 그는 ‘영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겁니다. 이런 그를 물질적 부를 가진 자가 종교적 재산까지 가지려 욕심을 부린다는 식으로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태도가 매우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의 서술에서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예수님도 그가 얼마나 진실한지 아셨으므로 계명을 지키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이 청년에게는 실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하긴 이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계명들이었을 뿐 아니라 웬만한 유대인은 다 지키려고 노력하는 계명들이었으니 만일 그가 비범한 대답을 기다렸다면 실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청년은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을 오해합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계명 또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청년이 그 동안 해온 일은 ‘진리’를 모르고 행한 잘못된 일이었고 이제부터는 그렇게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지 말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크게 오해한 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은 십계명 같은 계명 지키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명의 근본정신을 무시하고 외형적으로만 지키려는 태도를 비판하신 적은 있지만 계명 준수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무효화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제자가 되는 것과 대립시키는 일은 예수님 뜻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청년이 영생을 얻는 길과 계명을 지키는 일을 별개로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영생을 얻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아니면 계명을 지키는 것만 갖고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말씀하시고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계명 지키는 일을 보조하는 그 무엇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계명 지키는 일과 영생을 관련시키지 못한 청년의 몰이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계명을 지키는 일과 무관하지도 반대되지도 않습니다. 이 둘은 연장선상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일 따름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십계명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젠 말씀을 마칠 시간입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던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얘기가 시작됐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을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빌라도는 왜 이 질문을 했을까 라는 문제를 거쳐서 “진리를 알 것인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관심을 옮겼습니다. 이를 다 살펴본 지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것만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걸 알게 되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리는 애초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에게 진리란 매순간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일상에서 나를 비우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매순간 체험하는 바로 그것이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진리이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다, 매순간 나를 변화하게 해주는 그것이 진리이고 그것 이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만일 그런 게 있다고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렇게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빌라도의 물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는 진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Articles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