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에 종조부댁으로 피난하여 지내는 동안, 도회에 살다 본 시골은 너무 한가로
웠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불과 50여 채가 전부인 집성촌이다. 그러니 저녁
상을 물린 집안 어른들이 사랑에 모이고, 집안 살아가는 얘기 하느라 나중에는 장죽
담배가 다 타도 모르고 볼이 움 퍽 패도록 빨다 지치고 담배가 다 타버리니, 보통은
담뱃대를 입에서 떼어 한옆으로 밀쳐 놓게 마련이다. 얘기하랴 담배 빨랴 얼마나 힘
이 빠지겠는가. 그러나 한번은 늦은 밤, 변소를 들리시고 담배를 털어내고 변소 어느
구석에 장죽을 세워둔 채 사랑으로 다시 들어서시며 미처 못한 얘기를 서두르신 적이
있다.
조그만 어린놈이 할아버지들 얘기가 어떤 때는 알아듣고 말참견도 한다. 할아버지는
손자 말씨가 귀여워 대꾸하다 보면 또 담배 생각이 나시는지라 담배를 태우려고 장죽
은 여느 때처럼 찾으나 변소에 들린 기억은 까맣게 있고 할아버지가 궁둥이만 이리저
리 돌려 앉으시면서 장죽을 찾으시나 장죽과 숨바꼭질이 결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저러나 할아버지들 얘기가 재미있으니 우리도 소변보기를 참고 얘기를 듣다 보면 늦
은 밤에 호롱불이라도 들고 변소를 들린다. 어린 눈에 할아버지가 그토록 찾으시던
장죽이 눈에 띄어 그걸 들고 사랑에 들어섰다. 당시 어린 눈에 할아버지는 바보였다
그 후로 세월이 지나고 자신도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학교에 갈 때 준비물을 잊은
때가 있어도 자신을 심하게 자책할 줄은 모르고 선생님 추궁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
다. 그러나 어떤 때는 선생님도 실수하는 때가 있다. 운동장으로 나가시는 선생님께
서 호루라기를 잊고 서두르시다 보면 때로는 잊는 물건이 한두 번일까마는 어린이의
우상인 선생님께서 무엇을 잊는 일은 어린 학생에게는 큰 충격이다. 우리 선생님은
머리가 나쁘다고 결론 짓는다. 우리끼리 쑥덕거리게 마련이다. 그 후로는 선생님 말
씀이 귀에 들리지 않고 소귀에 경 읽기가 된다. 이런 과정이 치유되기에는 많은 시간
이 걸리거나, 아니면 선생님의 놀라운 면모가 보여야 과거 실수를 용서한다.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세상 물정을 알만한 때가 되니 그래도 사람들의 실수를 이해
할 수 있다. 자신의 실수도 대수롭지 않고, 으레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 도 있다
고 너그럽게 보아 넘기게 된다. 사람이 신이 아닌 한 실수는 당연하다는 결론에 이른
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게 늘 있게 마련이잖은가 하
는 들은풍월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장년에 들어서서도 허리 굽은
노인을 보면, 막연히 대수롭지 않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면 그뿐이었다. 직접 자
신이 겪는 일이 아니기에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어 보니 앉으나 일어서나 통증을 호소하고, 조금만 꿈적거리면
사지가 아프고, 조금만 덧들이면, 앓는 소리가 숨 쉬듯 입에서 튀어나오니, 이거 원,
인생이 이런 것인가 하며, 전에 노인들이 내는 통증 호소가 꾀병이 아님을 뒤늦게 뉘
우친다. 또 잘 잊고, 잃고, 생각도 들락날락하니, 원.조부모가 생존하셔서 이런 꼴을 보
시면, 그래 너도 겪어보니 어떻더냐? 평소 할아버지가 보기에 너희는 그렇지 않을 것
처럼 여기더구먼 서나 하시면서 우리 세대가 웃음거리로 남으렷다. 거울에 비친 자신
은 그런 생각에 벌써 염치없어서 빙그레 웃기 일쑤다. '이제 철이 드는가 보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