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끼치게 솔직한 시편

by 김원일 posted Jun 13, 2013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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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5 / 부활 후 다섯 번째 주일

 

시편으로 노래하다!

시편 30:1-12

 

곽건용 목사

 

내 시편을 달라!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기 전, 그러니까 냉전시대에 소련의 한 공항에 많은 TV 카메라와 신문기자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한 대의 자동차가 도착했고 거기서 한 사람이 내리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에 오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자기를 호송한 사람과 뭔가 얘기를 나누더니 갑작스럽게 두껍게 눈이 쌓인 땅바닥에 드러눕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던 TV 카메라와 사진기자들 카메라가 일제히 허공을 향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이런 얘기입니다. 《악을 두려워 말라 Fear No Evil》란 책을 쓴 내탄 쉐랜스키(Natan Sharansky)는 유대인으로서 구소련 비밀경찰(KGB)에 붙잡혀 9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반 소련 운동을 했다는 게 그의 죄목이었습니다. 그의 복역기간 중 1년 이상은 눕지도 못하는 징벌방에서 지내기도 했답니다. 살아서 감옥을 나오기 어려운 조건이었는데 그는 그 어려움을 이기고 석방됐던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내가 넣어준 시편을 내내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편을 내내 지니고 있었다니 그가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답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교인은 아니었던 거지요. 하지만 읽을 게 시편밖에 없어서 그는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편들이 절로 외워지더랍니다. 그렇게 시편을 읽으면서 그는 시편의 노래들이 자기가 처해 있는 처지와 놀랄 정도로 똑같아서 놀랐습니다. 자기가 감옥에서 겪고 있는 극한의 고통과 고난이 시편 시인들의 그것과 너무도 같더란 것이죠. 그래서 시인들의 절절한 고통의 외침과 절규가 자신의 고통과 절규로 다가왔고 시인들이 믿음과 희망의 환호를 터뜨릴 때는 마치 그것이 자기의 믿음과 희망인 것처럼 느껴지더랍니다. 이렇게 그는 시편을 읽고 또 읽으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어 고통스런 감옥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가 석방되던 날, 소련은 이를 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많은 TV 카메라와 사진기자들을 공항에 대기시켰던 겁니다. 자기들에게 저항한 사람도 ‘자비롭게’ 석방시켜준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앞에서 얘기했던 광경이 벌어졌던 겁니다. 그는 호송 관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시편은 어디 있는가? 내 시편을 돌려다오.” 이에 관리는 “당신이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다 줬소. 더 내줄 것이 없소.” 그러자 그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내 시편을 돌려주지 않으면 절대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TV와 사진기자들은 당황해서 카메라를 일제히 허공으로 돌렸던 겁니다. 그가 꼼짝 않고 버티자 결국 소련 당국은 그의 시편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 시편을 펼쳐 들고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시편 30편이었습니다.

 

야훼여, 나를 건져주셨사오니 높이 받들어 올립니다.

원수들이 나를 보고 깔깔대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

야훼, 나의 하느님,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야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자들 중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야훼께 믿음 깊은 자들아, 찬양 노래 불러라.

그의 거룩하신 이름 들어 감사기도 바쳐라.

 

노래가 가진 신비한 힘

 

오늘부터 6월 말까지 시편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전에도 시편으로 설교한 적이 있지만 두 달 동안 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머니주일과 아버지주일에는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할 터이니 온전히 두 달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번에 시편을 설교하게 된 데도 나름 계기가 있습니다. 두 주일 전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 대한 첫 설교를 한 후에 우리 교우 한 분이 제게 메일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목사님은 구약을 전공하셨지만 신약을 설교할 때 더 은혜롭습니다.”였습니다. 설교가 은혜로웠다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약간 상했습니다. 물론 심각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구약을 설교할 때 더 좋은가, 신약을 설교할 때 더 좋은가 하는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구약성서의 하나님도 신약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못지않게 은혜로운 하나님인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지요.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로운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는 하나님,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주라는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이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하는 율법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신약성서의 하나님을 명령은 하지 않고 은총을 베푸시기만 하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도 오해이지만 그보다 더 큰 오해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율법과 명령, 심판과 전쟁의 하나님으로만 믿는 것이 더 큰 오해합니다. 저는 이 오해를 없애고 싶습니다. 구약성서와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습니다. 이번 시편 설교가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두 달간 설교하려고 합니다.

 

노래가 가진 특유의 힘이 있습니다. 노래에는 다른 데 없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말을 나눌 친구가 없을 때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노래입니다. 전에 음악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첨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음악이 가진 힘에 점차 공감하면서 그분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노래는 아무도 희망을 주지 못할 때, 그 어디서도 희망을 찾지 못해서 당장 주저앉고만 싶을 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노래는 용기가 필요할 때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고,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을 때, 곧 신뢰를 잃어버렸을 때 노래는 그 신뢰를 회복시켜줄 수 있습니다. 노래는 그늘진 땅을 비추는 한 줄기 햇살 같은 것입니다. 이런 노래 중에 노래는 시편입니다. 시편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신앙을 불러일으켜준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순례길에 동반자가 되어서 그 길을 동행해준 것도 다름 아닌 시편입니다.

 

시편은 가장 솔직한 노래

 

구약성서 시편에는 다양한 종류의 노래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감사시편과 찬양시편, 그리고 탄원시편 또는 탄식시편입니다. 감사시편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이고 찬양시편는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은 일들, 곧 창조세계의 오묘함과 역사를 통해 이루신 구원사건들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탄식시편은 감사시편이나 찬양시편과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시편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에게 노골적으로 따지고 대드는 노래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고 딴죽을 거는 노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들고 딴죽을 걸다니! 대체 이런 일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경건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인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시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들은 원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대신 원수가 망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해달라고, 그들에게 보복해달라고 청원하는 노래가 구약성서의 시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노래 말입니다.

 

이 몸을 짓밟는 악인들에게서 지켜주소서.

원수들은 미친 듯 달려들어 나를 에워싸고 있사옵니다.

그들의 심장은 기름기로 굳어졌고 그들의 입은 오만불손합니다.

달려들어 이 몸을 에워싸고는 땅에다 메어치려 노려보고 있습니다.

먹이에 굶주린 사자와도 같고 숨어서 노려보는 새끼 사자와도 같습니다.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시편 17:9-13).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칼로 끝장내 달라고 노래합니다. 시편은 이렇듯 소름 돋을 정도로 솔직합니다. 원수가 먹이에 굶주린 사자처럼 달려들어 시인을 땅에 매치려 하는데 시인은 이런 원수를 사랑하고 그의 안위를 돌볼 만큼 여유롭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하긴 누군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 야훼께서 원수를 죽여 달라고 비는 겁니다. 물론 시인은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거나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빕니다. 원수를 죽여 달라고까지 청합니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이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두 달 간의 시편 설교가 끝날 때까지 판단을 미뤄주십시오.

 

시편에는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만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와 구원의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는 노래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노래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통 속에서 내뱉는 절규가 있고, 아무리 외쳐도 대답을 듣지 못해서 더 이상 외칠 기력을 잃어버린 시인의 말없는 탄식이 있습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을 억지로 찬양하지 않습니다. 찬양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또한 시인은 가식으로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감사할 마음이 들지도 않는데 위선적으로 감사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뭔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돌려받을 걸 바라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노래는 솔직하고 진솔합니다. 그의 찬양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진솔한 노래입니다. 그의 감사는 이를테면 태풍이 들판을 쓸고 간 뒤 곡식 대부분을 잃었지만 그래도 거기 남아 있는 곡식 몇 단을 바구니에 담고 들판에 무릎 꿇고 드리는 기도 같은 것입니다. 그의 탄식과 탄원은 그저 멋지게 보이라고 한 번 해보는 탄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듣는 이라곤 자신과 하나님밖에 없다는 듯이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이러고도 당신이 하나님입니까? 이런 짓을 하고도 당신이 하나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절규한 노래입니다. 이런 노래를 부른 시인은 아마 자기 노래가 문자로 기록되어 2-3천년이 지난 후 지금 우리들이 읽고 노래할 줄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이 시인들로 하여금 이런 노래들을 부르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편이 갖고 있는 이 놀라운 힘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시편이 보여주는 깊고 깊은 영감은 어디서 왔을까요? 앞으로 두 달 동안 시편 중 몇 편을 읽으면서 이 힘은 어디서 오는지, 이 영감의 근원은 무엇인지, 무엇이 시인들로 하여금 이런 노래를 부르게 했는지, 특히 가슴 찢는 듯 아픈 탄식과 탄원을 드리다가 감사와 찬양으로 돌변하게 만든 계기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계기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만 미리 얘기하면(나중에 상세히 얘기하겠지만) 그것은 노래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힘입니다. 시편이 갖고 있는 힘의 근원은 노래 그 자체에 있습니다. 시편이 가진 영감의 원천은 시편 이외의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시편 그 자체에 있습니다. 노래의 힘은 그것을 노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곧 노래는 노래하지 않으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말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탄 쉐랜스키로 하여금 9년이란 긴 세월을 지옥 같은 감옥에서 견디게 만들어준 시편 30편 전문을 읽고 오늘 설교는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감사시편 한 편을 읽겠습니다.

 

야훼여, 나를 건져주셨사오니 높이 받들어 올립니다.

원수들이 나를 보고 깔깔대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

야훼, 나의 하느님,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야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자들 중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야훼께 믿음 깊은 자들아, 찬양 노래 불러라.

그의 거룩하신 이름 들어 감사기도 바쳐라.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마음 편히 지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나를 어여삐 여기시고 산 위에 든든히 세워주시던 야훼께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에는 두렵기만 하였사옵니다.

야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었고, 당신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이 몸이 피를 흘린다 해서 이 몸이 땅 속에 묻힌다 해서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사옵니까?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야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야훼여, 부디 도와주소서.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주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 입히셨사옵니다.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를 찬미하라 하심이니

야훼, 나의 하느님,

이 고마우심을 노래에 담아 영원히 부르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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