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재미있는 세상이라.

by 김재흠 posted Jun 15, 2013 Likes 0 Replie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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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인터넷이니 뭐니 하면서 세상이 한 지붕 밑이니 앉아서 여기저기 섭렵할 수 있고 언어 재주만 있으면 지구 상 누구와도 의사 교환이 가능하니, 다양한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라 더 말하면 무엇하리. 비행기나 기구를 타고 세상을 다닐 수 있다고 해도 인공위성을 매개로 저런 통화가 불가능하다면, 비행기고 기구고 인터넷만 못하리라.


그러나 원하지 않거나 비호감과 부닥뜨리면 어찌할까 하는 문제가 있을 때는 상대하지 말면 될 일이다. 비호감의 기준은 뭔가? 진리도 아니다. 교리도 아니다. 비호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사항이다. 즉 사회생활 자세나 태도에 관한 문제다. 진리나 교리에 어긋난 행위로 말미암아 이견이 있더라도 서로 설득하려는 자세라면 행위 자체가 비호감일 수 없다는 뜻이다.


진리나 교리라는 무거운 가치관처럼 큰 고충이 아니고 사소한 문제로 다른 사람과 티격태격하는 꼬락서니가 나이가 들어 외고집만 남은 노인 간에 터지면 참으로 딱하다. 나중에는 문제의 본질과 관계없는 말이 오가다 보면 멱살 잡는 일이 흔하다. 마치 몰지각한 어린애들 다툼과 같다. 그러니 인생 경륜이 있는 노년의 좌충우돌은 망령에 가깝다.


어렸을 때 키가 작달막하나 까스러지고 앙칼스런 동네 친구가, 보다 나이가 많은 동네 다른 청소년과 싸움이 붙었으나, 싸움이라기보다는 큰 애가 작은 애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댔다. 그러나 작은 동무가 덩치 큰 애를 끝까지 따라붙으면서 죽여달라고 뺑뺑이 질을 하니 나중에는 큰 애가 도망친 일이 있다. 결국, 끈질긴 놈이 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게 이긴 것인가?


그 작은 동무는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에 어느 자리에서 이죽거리며, 역시 끈질기게 이죽거리다가 상대방이 맥주병으로 머리를 내리쳐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속된 말로 임자를 만나서 끈질기게 노닥거리다 세상을 등진 일이 있었다. 끝까지 버티면 이긴다는 소신이 아까운 나이에 본인과 가족에게 슬픔만 남긴 사건이다. 과연 이긴다는 게 무엇인가? 논란의 초점을 서로 빤히 아는 단순한 문제 예컨대 돈을 갚았는데 안 갚았다는 엇갈린 주장으로 살인에 이른 것이다.


민초스다에도 이런 미련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문제의 원인은 어느 사람의 주장이나 말의 알맹이를 무시하고 파생 사안을 본론으로 싸잡아 물고느러지는 부류가 있다. 젊은 진보 논객의 전법을 흉내 내는 얘기꾼이 있다. 이 사람은 상대의 주장을 듣자마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 주장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여유가 없이 일단 치고 들어서면서 말을 짜깁기한다. '이다.'라는 주장에 다짜고짜 '아니다.'로 공을 띄우고 잽싸게 후속 구를 던진다.


이런 자세는 토론 자세가 아니다. 우선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고 그의 논리 전개에 오류가 있다면, 이를 제시하고 그 오류를 피하면, 마땅히 이러이러한 결론이나 주장이 맞는다고 해야만 토론은 진행된다. 그런데 한 쪽 주장의 근간은 팽개치고 가지를 물고 뜯어서라도 상대를 굴복시켜야지 하니, 이럴 때는 상종하지 말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두고 상대는 개선장군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말귀를 모르는 게 아니고 상대를 꺾기 위해서는 곁가지라도 물고 늘어져야 상대가 물러설 것이라는 전법을 구사하는 사람이 민초스다에 있다.


전에 더러 TV에서 본 진중권이라는 젊은 교수가 대담하는 자리에서 토론하는 자세를 보고 판박은듯한 어법이나 논리 전개를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식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안간힘을 쓰더구먼 서나 그래도 이 사람은 상대의 진의를 미리 간파하고 치고 대드는 형세인데 민초스다에서는 상대의 본론은 접어두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굴복시키려 하는 사람을 보았다. 기가 찰 일이다. 이런 사람이 논객 행세를 하는 꼴에 유유상종하기를 거부하니, 이를 토론의 승리로 착각한다.


그런 사람은 태생적으로 비뚤어졌기도 하거니와 늙은 고집이라 표백제를 뿌려도 색깔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상종하지 않기로 했더니 이 걸 어쩌면 좋을꼬? 결국, 한 편이 상종을 포기하니 자신이 판정승이라고 오판하기 쉽다. 아무렇게 해석해도 좋다. 장로 자리를 은퇴하니 은퇴식을 목사 은퇴식같이 하기 원한다거나, 교회나 교계에 대한 비판이 발전의 계기로 보면서 자기가 속한 교회나 교계를 공개 비판하는 현대판 마르틴 루터도 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 신부로서 당시 교회 부패에 항거하여 개신교를 태동시킨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자기 교회나 교계를 공개 비판하고 루터를 흉내 내려거든 안식일 교회에서 떠나서 큰소리칠 일이다. 그렇지 못한 주제라면 분명히 다른 사람의 조롱거리다. 이래서 교인 노릇 하기도 쉽지 않으나 적어도 사람이란 어떻게 이웃과 관계하는 것이 도리인가를 생각하면, 교회나 교계에서 비웃음은 면할 것이다.


하여간 이런 사람이 있기에 다른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나 일반 사회생활 태도를 한 번쯤 뒤돌아보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혹시 이런 얘기로 또 거품 물고 대들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다른 사람들이 반면교사로 삼는다고 한다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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