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철 들면 띄울 편지.

by 김재흠 posted Jun 20, 2013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랑하는 손자에게


네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 집 주방에서 거라지로 열리는 문을 열자 신발장 위에 호젓이 놓인 네 신발 한 켤레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색인데 신발 바닥 가까이 옆에 빨간색 고무를 덧붙인 앙증맞고 도톰한 운동화였다. 당시 2살인 너의 신발이 다부지고 튼튼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신발에서 네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반갑게 나에게 덮쳐 안기려는 기세, 어쩌면 그 신발만으로 너의 모든 표정을 나는 끌어내었다. 영리하고, 좋고 나쁨을 명백하게 밝히는 직선적 성격인 너는 할아버지에게는 어린 왕자였다! 더구나 관심이 없으면 눈도 맞추지 않는 너의 결연함에 네가 때로는 매정하기도 했다.


특히 할머니가 네 환심을 사려고 부지런히 몸부림치나 어떤 때는 네 속마음을 잘못 짚어 맥이 풀린 적도 있었다. 우리는 그저 너를 위한답시고 요란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미련할 정도로 다시 사랑의 성을 쌓았지만, 그것이 힘없이 내려앉을 때는 야속할 뿐이었다.


너를 키우는 재미가 네 아비를 키울 때보다 훨씬 좋다고 하니, 주위에서 하는 말이 이제 그걸 아느냐고 농담처럼 할아버지를 놀렸던 기억이 있다. 더구나 내 나이 70 가까워 얻은 첫 손자니, 남들이 가져보지 못한 손자처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주위에서 그랬던가 싶다. 어쨌든 그때 할아버지와 할미에게는 살 맛이 나고 행복을 퍼올리도록 하는 마스코트가 너였다.


너는 어린이집에 매주 3차례 다녀, 저보다 큰 어린이 틈에서 지내다 보니 한 주일이 다르게 말을 더 잘했다. 주 한 번 우리 집에서 만나면 무슨 할 말이 많은지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하여 우리 자신이 듣기 어려우니 네 아비가 통역하곤 했었다.


자그마한 우리 집 뒷마당 저편 내려앉은 평지에 유실수, 채소류가 퍼져 있는 사이를 네가 지나서 알토마토 덩굴에 이르면 알토마토를 재촉하였지. 할미가 그것을 까서 입에 넣어주기 바쁘게 더 달라고 서둘렀지. 그러니 너는 밥은 먹지 않고 멀리하더라. 이것이 할미가 겪는 너의 시집살이 같은 거였다.


너만 그럴 리야 없을 테지만 호기심이 많아 눈 닿는 데마다 손대고 바쁘게 움직이니 할미가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늙어가는 할아버지와 할미 인생에 사랑과 활력의 불꽃을 짚이는 너 때문에 그 때 할미는 네 덕분에 우울증을 떨쳐냈다. 그러니 바로 네가 할미 우울증 치료원()인 셈이었.


나가기 좋아하는 너는 대개 밖에서 뛰기도 하고 두리번거리다 물 호수를 보면 밭에 물을 뿌려준다. 그러다가도 네가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가든, 굿 가든(good garden)' 하고 말하면, 뒷마당에 나무나 채소밭 쪽으로 발길을 옮기거나 탠저린 따먹겠다는 의향이었다. 귀엽고 영리함이 묻어나는 정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날 석류나무 잎 새순이 한창 피어오를 때 이사하는 집에서 주고 간 다 큰 흰 토끼 한 마리를 들여 놓았다. 네가 동물을 좋아하니까 너에게 보여줄 토끼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미는 마음이 들떴었다. 역시 네가 보더니 다짜고짜 토끼 집을 열어 끌어안고 좋아서 얼굴을 비비며 어찌할 줄 모르더라. 이번에는 제대로 네 마음을 짚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토끼도 너에게는 한물갔다. 토끼에 대한 너의 애정이 식어가니 할아버지나 할미는 고민이었다. 하루는 네 어미 말이 네가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이더라고 하여 어떨지 몰라 우선 헌 바이올린을 샀다. 어린이용을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걸 몰랐다. 바이올린 자체가 대체로 작으니까, 보기에는 바이올린이 작았어도 성인용이라니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바이올린 구실을 할 테지 했었다.


하여간 뒷마당에 가거나 토끼가 눈에 보이면 너의 모습이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할아버지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다가 내 눈이 허공에 머물면, '이게 늙는다는 건가?' 하고 가는 세월이 안타까웠다. 다시 네가 벗어 놓았던 그 신발을 이리저리 보고, 너의 이런저런 몸짓, 표정을 떠올리며 할아버지는 미소 짓기도 했던 적을 떠올린다.
 
지금 생각하니 너에 대한 한때 추억이나, 어쨌든 할아버지는 그때나 이때나 네 덕으로 후회 없이 기쁘게 산다. 하지만 이제 너무 지나치게 너와 정들고 하다 보면 어느 날 너와 이별하는 날이 꼭 다가올 텐데, 그 때 네가 입을 상한 마음을 할아버지는 걱정한다. 
 


Articles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