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젖가슴

by 김원일 posted Jun 20, 2013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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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2 / 부활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어린 아기가 어미 품에 안기듯

시편 131:1-3

 

곽건용 목사

 

젖 떨어진 어린 아기처럼

 

5, 6월 두 달 동안 이어질 시편 설교의 문을 여는 첫 시편은 131편입니다.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시편 131편은 시편들 중에서 가장 짧은 시입니다. 이 시에는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지은 노래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축제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가 되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한 여인이 젖먹이를 품에 안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순례절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무덥고 힘들지만 하나님을 만난다는 설렘을 안고 기대와 희망을 간직한 채 걸어가는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오지만 제가 어렸을 땐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교회에 주차장이란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거의 모두 걷거나 버스를 타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학생 때 다니던 교회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한 15분 정도 걷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회였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교회까지의 길을 걷다보면 같은 교회 교인들을 몇 명 만나곤 했지요. 그 중에 기억에 남는 풍경은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자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저는 시골생활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내 서울에서 살았지만 그땐 서울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습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덜 팍팍했던 거지요.

 

시편 131편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뢰’(trust)라고 하겠습니다. ‘신뢰’가 시편의 주제입니다. 여기에 수식어 한 마디를 더 붙이자면 ‘겸허한 신뢰’ 또는 ‘전적인 신뢰’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겸허한 신뢰’ 또는 ‘전적인 신뢰’를 시편은 엄마 젖을 충분히 빨고 나서 배가 부른 상태에서 엄마 품에 안겨서 잠든 아기로 그리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가 ‘젖 떨어진 어린 아기’라고 번역한 말은 엄마젖 먹을 나이가 지나 이유기에 들어간 아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엄마젖을 넉넉히 먹고 배가 부른 아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아기는 더 이상 젖을 물고 있을 이유가 없겠지요.

 

“야훼여!”라는 부름에 담긴 뜻

이 시는 “야훼여!”라고 야훼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시편을 ‘노래’라고 부르든 ‘기도’라고 부르든 둘을 종합해서 ‘노래로 드리는 가락 있는 기도’라고 부르든 무슨 말로 부르든 좌우간 이 노래는 ‘야훼께’(to Yahweh) 드리는 노래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시인이고 노래를 듣는 분은 야훼 하나님이란 얘기입니다.

 

당연한 얘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중요한 신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성경 가운데 한 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곧 성경은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말씀이요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른 노래들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노래가 아니라 사람 입에서 나온 노래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사람 입에서 나온 노래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는 곧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됐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른 노래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합니까?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감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반드시 하나님 입에서 나와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진실을 시편은 “야훼여!”라는 호격 한 마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교만한 자였을까?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다음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이 부분은 네 개의 부정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고’ 내 눈은 높은 데는 보지 ‘않으며’ 나는 거창한 길을 좇지 ‘않고’ 주제넘은 놀라운 일을 꿈꾸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네 개의 부정문은 한 마디로 ‘교만’을 가리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곧 시인은 ‘교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널리 알려진 대로 성경이 가장 경계하는 부도덕이고 죄입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경계하는 ‘교만’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교만과는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교만은 대체로 건방지고 거들먹거리며 잘난 척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교만은 물론 이것들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교만은 하나님과 같은 반열에 서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의 시도를 성경은 교만이라고 부르며 엄히 경계합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일입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나무를 ‘동산 중앙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래놓고선 그것을 절대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지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날로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이와 달리 말하면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걸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거라고 말입니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면부정이고 둘째 부분은 하나님이 전혀 언급하시지 않았는데 뱀이 지어낸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은 뱀이 한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서(생명나무 열매까지 먹으면 우리처럼 될 것이라고) 그들을 에덴에서 내쫓으셨지요. 곧 뱀이 옳은 말을 했던 것이지요.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왜 하나님은 선악과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갖다 두셨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뜻은 쉽게 눈에 띠는 곳에 두어 아담과 하와의 의지를 시험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곧 선악과를 따먹기 쉽게 만들어놓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셈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지만, 그런 길이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사람으로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었던 겁니다.

 

저는 이 시인이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표제대로 다윗이었을까요? 하지만 학자들은 시편들에 붙어 있는 표제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익명의 시인이 지은 노래인데 후대에 편집자가 내용을 보고 다윗을 저자로 봤다는 것이지요. 어느 편이 됐든 시편을 이해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좌우간 저는 이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합니다. 만일 다윗이라면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았던 그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노래를 불렀는지 궁금합니다.

 

시인은 왜 이렇게 노래했을까요? 그는 왜 교만하지 않겠다고 했을까요? 그것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그랬을까 말입니다. 이 노래는 시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보입니다. 그는 일반적인 현실을 노래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을 노래한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직접 겪은 일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한때 그는 교만했고 높은 데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한때는 거창한 길을 좇았고 주제를 모르고 놀라운 일을 꿈꿨습니다.

 

그렇게 높은 데로 오르려다가 처절히 실패했을까요? 교만하게 높은 데만 바라보고 거기로 올라가려다가 하나님께 얻어맞아 깊은 구렁텅이에 팽개쳐졌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러니 말입니다. 저도 아직까지는 이 시편을 그렇게만 읽어왔습니다. 시인은 대단한 일을 성취했고 크게 성공해서 남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라갔다가 그만 교만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벌을 받아 급전직하, 깊은 구렁에 빠져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느낍니다. 높이 올라갔다가 자유낙하해서 구렁에 빠져야만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회개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자기가 살아왔던 길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높은 데 올라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데 서 있을 때 사람은 큰 ‘불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회개하는 게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착각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회개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걸 사람의 일로만 보면 회개를 ‘업적’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란 사실을 망각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회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일입이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어떤 자리에서든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의 그림자

 

시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뤄보려고 애썼던 사람이고 또 어느 정도는 자기가 이루려던 것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을 수도 있고 또 아직 자기가 성취한 것을 누리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였다면 당연히 고통을 겪고 있을 터이고 후자였다 해도 시인은 뭔가가 편안치 않습니다. 정점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편안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하지 않겠다고, 높은 데를 쳐다보지 않겠다고, 뭔가 거창한 일을 좇지도, 놀라운 일을 도모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결심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만일 시인이 밑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답은 쉽습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일 터이니 말입니다. 반면 그가 여전히 정점에 서 있다면 그로 하여금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은 ‘불안’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옆도 안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자기는 완전히 혼자임을 느끼는 데서 오는 불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시인은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라고 노래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 노래의 극적인 전환점입니다. 높은 데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인생의 전환점, 그것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바닥에서 고통을 겪고 있든 정점에서 불안해하고 있든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만 하면 된다고? 그게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상이든 수행이든 그 무엇이든 마음수련을 어느 정도 해본 사람이라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음을 잘 압니다. 기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도하려고 자리 잡고 앉아 눈을 감으면 웬 잡생각이 그렇게 많이 떠오릅니까! 기도도 마음이 차분해져야 할 수 있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기도든 묵상이든 QT든 명상이든 마음수련이든, 뭐가 됐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얻은 결론이 좀 의외입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였으니 말입니다.

 

이는 지나치게 소극적이 아닐까요? 너무 나이브하거나 낭만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교만과 실패, 또는 불안 같이 심각한 고질병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혹은 어느 정도 거기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돌아갈 곳에 젖 뗀 어린 아기가 어미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시인의 시대에도 그랬겠지만 이런 모습은 요즘 우리네 상황과는 더욱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즘은 이같이 소극적인 사람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큰 꿈을 꾸는 사람, 비전을 높은 데 두는 사람, 많은 것을 이룬 사람,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 각광받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각광 받기는커녕 ‘마마보이’로 불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현대인의 삶을 특징짓는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불안’입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불안은 비단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도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밑바닥 사람만이 아니라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사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의 불안은 어디서 비롯됐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율’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은 현대인이 기리는 미덕일 뿐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이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현대인은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물론 남의 도움을 받지만 결정은 스스로 내립니다. 현대인은 욕망을 스스로 채우려 합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신화는 그 어떤 의존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성숙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성

 

물론 저는 이런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경향은 필연적으로 자신 이외의 누군가에 대한 신뢰를, 자신보다 더 큰 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들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해서 높은 곳만 바라봤던 그가, 거창한 일을 좇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꿔왔던 그가 어느 날 자기 삶을 돌아보니 뭔가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게 뭘까 하고 차분히 앉아서 신뢰의 상실임을 깨달은 겁니다. 젖 뗀 어린 아기가 어미 품에 안겨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그가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던 겁니다.

 

오늘은 어머니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편 설교를 하지 않고 어머니날 설교를 하려다가 시편 131편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를 노래하고 있어서 그냥 시편 설교를 하게 됐습니다. 시인이 스스로 추구해왔다는 일들, 곧 높은 곳을 바라보고 거창한 일을 도모하고 놀라운 일을 꿈꿔왔던 그 모든 일들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상에 부합하는 것들입니다. 반면 그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얻은 결론을 그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로서의 하나님 상으로 그립니다. 시인의 메타포가 엄하게 다스리는 아버지-(father-God)으로부터 젖을 먹이는 어머니-(mother-God)으로 바뀐 것입니다. 사람이 맺는 다양한 관계들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깊은 신뢰가 반영된 관계는 어미는 젖을 주고 아기는 젖을 빠는 관계입니다. 여기서 아기는 어미와 동등해지려 하지 않습니다. 어미로부터 독립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미를 전적으로 신뢰할 뿐입니다. 이것은 겸손한 신뢰(humble trust)라고 불러도 좋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오랫동안 망각해온 신앙의 중요한 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젖을 물리는 어미와 그 젖을 빨고 있는 아기로 그려지는 전적인 신뢰입니다. 물론 우리는 독립적인 삶의 살고 자율적인 길을 걸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은,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짓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꿈이나 비전으로 포장된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올라타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기의 방식으로 뭔가를 성취하려고 했고 그것을 성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그걸 원하신다고 믿었을 겁니다. 방법에 문제가 있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 믿었을 겁니다. 좌우간 그는 뭔가 이뤄야 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도달한 결론은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분리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서는 삶의 방향과 의미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미젖을 배불리 먹고 그 품에서 잠든 아기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성취보다는 하나님과의 신뢰가 앞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깨달음을 혼자 간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이렇게 권유하며 자기 노래를 마무리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우리도 자율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결단을 스스로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도 져야 하지요. 그러나 진정 우리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율적인 결단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우리 삶을 가장 깊은 곳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신뢰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합시다. 우리가 돌아갈 품이 있음을 망각하지 맙시다. 우리가 집 나간 탕자라 할지라도 언제나 당신 품을 넓게 열어놓고 높은 언덕 위에 서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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