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세면대 바로 아래 파이프에서 물이 샌다. 그래서 고장난 부품과 같은
것을 다시 사려고 홈데포(식품상이 아닌)에 들렸으나 그런 부품이 어디에 비
치되었는 지 모르니까 직원에게 물어서 진열 장소를 찿았다. 그러나 관련 부
품이 수십가지가 크기나 용도가 조금씩 달라서 같은 부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부근 진열대에서 무언가 찾는 미국인과 멕시코 사람이 우왕좌왕하기에
닷짜고짜 애로 사항을 말했더니 서슴 없이 내 물건을 찾아주려고 오히려 자기
네 물건 찾는 일은 접어두고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와주려고 하다 안 되니 멕시코 사람이 재빠르게 담당 직원을 안내
하였다. 결국, 직접 직원의 도움으로 부품을 찾았다. 물론 담당 직원에게 인
계하고 그들은 자기 일을 살피려고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자기 일을 젖혀두
고 남을 위해 30-40분을 보냈다. 그러니 그들이 매우 고맙기도 하거니와 어
떻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빈손으로 악수만 하고 헤여졌다.
남을 시켜서 고장 수리를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돈이 아까워 손수 수리하려는
처지에 금전적으로 고마움을 알릴 수가 없어서 집에 와서도 마음 한 구석이
섭섭하였으나 고마운 마음만은 넘쳤다.
전에도 늦은 밤, 높은 산길에서 스노우 체인이 벗겨져 외딴 눈 길 옆에 차를
쳐박아두고 구조를 찾던 중 눈보라 속에 전조등이 덩그러니 솟은 차가 나타
나기에 손을 흔들었다. 바로 앞에 차를 세우기에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곳으
로 안내할 것을 말했더니 자그마한 동네로 안내되어 다행히 택시를 찾아서
집에 이르렀다. 당황하는 나를 위로하면서 늦은 밤 집에 올 수 있게 도와준
그는 내 가계로 찾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며칠이 지난 후 그를 다시 만
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름대로 고마운 성의를 보였다.
그뿐 아니라 또 한 번은 역시 홈데포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고 있었으나 그런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직원이 알려주자, 우연히 옆에서 그런 사정을 듣
던 미국인이 거의 16km 떨어진, 그 부품을 취급하는 곳으로 자기 차를 따
라오게 하여 직접 인도해 준 일이 있다. 또 3천m가 넘는 산봉우리San Ja
cinto Peak를 다 오르고 Peak안내 푯말 주위에 큰 돌덩어리가 얼기설기 놓
여있는데 기념 사진을 남기려고 오락가락하다가 그 돌덩이 틈에 한쪽 허벅
지까지 빠져 다 죽었다 싶게 정신이 아찔한 참에 백인 청년이 내 겨드랑이를
그의 양 팔로 끼워서 몸통을 끌어올려 구해주었다. 10미터 쯤 한국인 몇이
눈에 띈 적이 있어서 그들 보기 민망한 터에 어쩔 줄 몰랐지만 나를 구한 건
백인이었다. 이 때 언뜻 스친 감정은 한국인도 본체만체하는데 백인이 구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외에도 자질구레한 도움도 있었으나 지금도 잊을 수 없이 기억에 남는 추
억을 밝혔다. 아주 커다란 도움만이 귀중한 게 아니다. 생활 주변에서 얻는
도움이 잔잔하게 가슴을 스치며 그런 이들 때문에 미국에 사는 게 고맙고 감
사하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가리지 않고 위험에 빠진 동족을 구한 장한 한
국인도 가끔 언론에서 접하는데, 이런 위대한 도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작
은 도움이라도 나에게 주는 고마움은 위대한 도움에서 얻는 고마움과 달를
바 없다. 서너 차례 한국 방문에서 입은 상처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얻은 도
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지는 모른다.
예컨대 길를 몰라서 묻거나하면 아래 위를 살펴보다가 말대구도 없거나, 저
리가서 물어보라는 식으로 머리를 채올린다. 자기와 관계 없는 일에는 도무
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쁜 생활에 지쳐서 그런가보라고 이해하려고 한
다. 하기는 미국에서도 한국인이 눈에 띄어서 마음 놓고 물어보면 역시 그
모양인지는 몰라도 한번은 가든 그로브 헐리트론 매장 앞에서 아침에 30대
한인 여성이 지나가기에 말을 걸려고 했으나 들은 체 하지 않고 쏜살처럼 사
라진 일이 있다. 바뻐서 말대구할 수 없다던가 무슨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한국인이 외국인에게는 친절하게 대하는가? 한국내 체류하는 동남아 사람을
얕잡아보는 일은 언론에서도 보도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미국인은 나를 멸
시한다고 눈치챈 적 없으며 비록 뒷통수에서는 어떤지 모르나 우선 친절하
다. 도와주려 한다. 그러니 아주 고맙다. 한국인을 만나면, 그들에게도 되도록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