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탓이요!’라며 하나님에게 삿대질하기--물귀신 작전: 신의 언어, 예수의 가르침이 헛소리인 이유

by 김원일 posted Jul 11, 2013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3 5 19 / 성령강림절

 

나를 영영 잊으시렵니까?

시편 13:1-6

 

곽건용 목사

 

탄식시

 

오늘은 교회절기로는 ‘성령강림절’이고 한국 현대사에서는 ‘5.18 광주민주화 항쟁’ 33주년을 하루 넘긴 날입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당연히 성령강림절 설교를 해야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광주항쟁에 대해서도 직접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시편에 나오는 ‘탄식시’ 한 편을 읽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 시인이 보여주는 정념(pathos)과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열정에 성령의 역사와 광주항쟁 피해자의 마음을 모두 담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야훼, 나의 하나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구약성서 시편 중에는 지난 주일에 읽은 131편처럼 배불리 엄마 젖을 먹고 그 품에서 평화로이 잠든 아기가 엄마에게 갖는 것에 비할 무한한 신뢰를 표현한 감사와 찬양의 시가 있는 반면, 오늘 읽은 13편처럼 무겁고 어두운 시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형식의 시를 ‘탄식시’라고 부릅니다. 탄식시는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또는 방치한) 하나님을 원망하고 고발하며 하나님께 탄원하는 노래입니다. 그 중 13편은 시편 탄식시들 가운데 가장 짧지만 탄식시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고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시입니다. 오늘 이 시편을 골라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야훼여!’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

 

시인은 “야훼여!”라고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 사실은 이것을 노래라고 부르든 기도라고 부르든 뭐라 부르든 이는 야훼에게 말을 거는 행위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나 마음수련 같은 것을 찾습니다. 명상이든 마음수련이든 다 좋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을 갈고 닦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명상이나 마음수련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마음을 갈고 닦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신수양과도 다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말하는 행위입니다. 누군지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우주에 충만한 기운’을 향해서가 말을 거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야훼’라는 이름으로 부르라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해서 말을 거는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명상이나 마음수련이 무의미하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과 기도는 성격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와 관련해서 역설적인 점은, ‘야훼’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정작 그 이름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야훼’라는 당신의 이름을 이스라엘에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르라고 준 이름을 지나치게 거룩하게 여겨서 감히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게 대체 말이 됩니까. 혹시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까 두려워서 이름 부르기를 꺼리다보니 발음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누구의 것이든 부르라고 붙인 것이고 하나님 이름도 예외는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름 불리는 걸 원치 않았다면 왜 이름을 주셨겠습니까. 따라서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불러야 합니다. 그게 이름을 주신 뜻에 맞습니다. 기도드릴 때뿐 아니라 그 밖에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 이름 부르길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다음으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이 짧은 문장에 ‘언제까지’란 말이 무려 네 번 등장합니다. 영어로는 ‘how long?’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시인은 ‘언제까지?’라고 물었지만 구체적으로 몇 년, 몇 월, 며칠까지라는 답을 요구하진 않습니다. 답이 주어지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이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워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워할까요? 무엇이 그를 이토록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망각과 외면’이 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거나, 알면서도 얼굴을 돌려 외면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는 그래서 괴롭답니다. 자기 마음이 쓰리게 아픈 것도, 원수들이 우쭐대는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렸고 외면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고발합니다. ‘내 탓이요!’라고 자기 가슴을 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 탓이요!’라며 하나님에게 삿대질하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적/신학적 고통은 하나님의 망각과 외면이란 말로 표현된 바,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데서 비롯됩니다. 둘째로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표현하고, 셋째로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고통은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의 망각과 외면입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현장에 책임 있게 현존하는 분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부재하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당신 백성과 맺은 언약에도 불충실한 분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편을 여기까지 읽고 나자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쯤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계속 기도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망각하거나 외면하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 있는데, 원수들은 보란 듯이 우쭐대고 있는데, 대체 왜 계속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는가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 노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노래하게 하는가를 아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계속 기도해야 합니까? 응답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말을 걸어야 할까요? 외면하는데도 자꾸 말을 붙여야 하는가 말입니다.

 

말의 힘

 

기도는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을 거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시는 운율이 있는 말이고 노래는 가락이 있는 말입니다. 공통점은 그것들이 ‘말’이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말은 일단 입에서 나오면 효과를 만들어내고 기능을 수행합니다. 말이 입에서 떨어지면 헛되게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당장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아주 먼 곳에서, 또는 먼 훗날에 사건을 만들어내는 수도 있습니다.

 

모호하게 얘기하는 것보다 예를 하나 드는 게 더 낫겠네요. 감리교 이현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한 할머니가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랍니다. 왜 그러시냐고, 뭐가 이해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랍니다. 뭐든 ‘손’으로 만들었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말씀’으로 만들었다니까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그럼 제가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고 물었더니 그렇겠다고 하기에 “그럼 공짜로 보여드릴 수는 없으니 잠깐 일어나 보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할머니가 이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시기에 목사님은 한 바퀴 빙 돌아보시라고 했답니다. 할머니가 그대로 하시자 이 목사님은 “할머니 보셨지요? 이게 말의 힘입니다.”라고 했더니 주변 사람들은 모두 웃었는데 정작 할머니는 얼른 못 알아들으시고 어리둥절하시기에 목사님은 “제가 말로만 했는데 할머니가 행동하시지 않았어요. 이게 바로 말의 힘입니다.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 말도 이렇게 힘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은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더니 그제야 할머니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시더랍니다.

 

‘기도’는 설득이다

 

그 다음으로 3-4절에서 시인은 “야훼, 나의 하나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죽음의 잠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밝힙니다. 그의 소원은 ‘굽어 살펴주소서’(consider), ‘대답해주소서’(answer), 그리고 ‘빛을 주소서’(lighten)라는 세 개의 동사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굽어 살펴달라는 기도는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뜻이고 대답해달라는 기도는 침묵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며 빛을 비춰달라는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소원을 이렇듯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표현했습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셔야 하는지를 말하는데 이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이고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당하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하나님은 뭐가 되겠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이름에도 크게 누를 끼치게 되고 명예가 손상되리라는 얘기입니다. 자기 문제에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이니 속되게 표현하면 ‘물귀신 작전’이므로 ‘치사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문제를 하나님의 문제로 만들어놓고 그걸 해결해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원수들이 뽐낼 것이고 적들이 기뻐 날뛸 텐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치사해 보이는 바로 이 지점에 기도라는 신앙행위의 핵심이 있습니다. 기도란 기도자의 관심과 소원을 하나님께 말로써 알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자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효과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하는 나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문제라고 하나님을 설득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나만의 문제라면, 곧 내 욕심과 내 이기심을 채우려는 것일 따름이라면 하나님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그렇면 기도는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에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자는 자기 문제와 관심사를 아뢰는데 하나님은 거기 관심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기도자는 자기 문제와 소원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도가 무슨 거래냐?’며 흥분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게 기도가 될지 거래가 될지는 기도자의 문제와 소원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지, 설득의 과정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기도란 기도자와 하나님이 말을 통해 맞부딪치는 사건인데 그것이 기도가 될지 거래가 될지는 주고받는 말의 내용에 달려있는 것이지 말이 오고가는 것 자체에 달려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기도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에게 설득당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인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면 하나님이 변할 것이고 기도자가 설득당하면 기도자가 변할 것입니다. 시편 13편에서 벌어진 일은 후자였습니다. 시인은 자기 문제가 곧 하나님의 문제임을 말한 후 잠시 멈춰서 기다립니다. 시에는 이 점이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내용상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설득됐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시인은 응답이 없으니 하나님이 설득됐는지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은 대답하시지 않고 상황은 변하지 않으니까!

 

사정이 이렇다면 하나님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답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언제까지 기다릴 겁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을 떠나 다른 데로 가야지, 왜 굳이 야훼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가 말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기적은 시인이 그토록 고통스런 처지에 놓여 있고 하나님도 외면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기적은 하나님에게 ‘물귀신 작전’까지 썼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라고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인은 왜 여전히 야훼의 이름을 부릅니까? 왜 다른 신에게 가지 않고 야훼 하나님만을 찾습니까? 그는 왜 바알에게로 가지 않았을까요? 왜 바빌론이나 이집트의 신에게 가서 그들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야훼의 이름만 부르리라!

 

왜 시인은 말을 갈아타듯이 다른 신()으로 갈아타지 않았을까요? 그에게는 호소할 데가 야훼밖에 없었을까요? 우리는 왜 그랬는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말을 갈아타듯이 신을 갈아치우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일신 신앙입니다. 유일신 신앙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 문제들은 사실상 올바른 유일신 신앙을 갖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유일신 신앙이란 다른 신들은 모두 엉터리 가짜이고 내가 믿는 신만 진정한 신이라고 믿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유일신 신앙이란 신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내게 도움을 주고 복을 주기만 한다면 어떤 신이든 믿겠다는 식으로 양다리, 세 다리, 네 다리 걸치는 믿음과 정반대의 신앙입니다. 올바른 유일신 신앙은 내게 복을 내려주든지 내려주지 않든지, 응답해주든지 응답해주지 않든지, 내 기도에 설득이 되든지 설득되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 신만을 믿는 것입니다. 속되게 말하면 죽어도 야훼, 살아도 야훼만 믿는 것이 야훼 유일신 신앙이란 말씀입니다. 시편 13편의 시인은 바로 이런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훼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야훼가 자기를 잊었다고, 외면한다고 불평하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 명성에 크게 누가 될 것이라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노래에는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갑자기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라는 찬양의 노래로 바뀝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하나님께 불평하고 호소하던 시인이 무엇 때문에 신뢰 가득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요? 시인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시인이 달라졌습니다. 상황의 변화가 시인의 변화를 이끈 게 아니라 시인의 변화가 상황의 변화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설득됐을까요? 저는 그랬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려던 그가 오히려 하나님에게 설득됐습니다. 설득이 양편 모두에게 일어났을 수 있지만 하나님보다는 시인이 더 많이 설득된 것으로 보입니다. 설득의 내용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시인은 기도했던 내용을 하나님에게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큰 축복을 받았으니 스스로 변한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이 형편없이 불의한 세상은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세상이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수많은 ‘나’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앞에서 말씀한 이현주 목사님의 일화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자기 말이 힘을 갖고 있기에 할머니가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만일 할머니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은 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실질적인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우리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예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예수님 말씀에 힘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힘이란 것도 다 헛된 얘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세계에서 예수님 말씀에 힘을 불어넣어 살아 약동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행동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