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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 국제부장 |
정부서울청사 별관 17층 외교부 장관실은 전망이 좋다. 탁 트인 통유리창으로 서울의 주산인 백악(북악산)이 한눈 가득 들어온다. 그런데 유리창 여기저기에 원통형의 작고 검은 물체가 붙어 있다. 뭘까? 몇년 전 그 방의 주인에게 물었더니, 유리창의 떨림을 감지해 장관실 내부의 대화를 엿듣는 걸 막으려는 장치란다. 누가 도청을? 방 주인은 빙그레 웃을 뿐 답이 없었다. 오랜 탐문 끝에 나름의 답을 얻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생각해보면,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는 ‘코리아게이트’를 특종 보도하며 미 중앙정보국이 청와대를 이런 방식으로 도청하다 알아냈다고 전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 등 38개 우방국의 주미 공관을 도청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에드워드 스노든의 문서를 근거로 폭로하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가진 모든 나라들은… 각국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려고 한다”며 ‘능력 있으면 너네도 해봐’라고 되받았을 때, 외교부 장관실의 그 검은 원통형 물체가 떠올랐다. 국가안보국이 ‘프리즘’이라는 감시프로그램을 활용해 세계 각국의 전화·컴퓨터망을 감시·분석한다는 사실이 폭로됐을 때도, 미국 정부는 ‘합법’과 ‘테러 예방’만을 읊조렸다. 조폭의 ‘배째라’와 다를 게 없다.
이 와중에 국가정보원은 “댓글천국 무플지옥”을 모토로 “홍어·절라디언들 죽여버려야” 따위의 댓글을 달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하는 등 정치공작에 여념이 없다.
미국이 ‘빅브러더’라는 건, 구체적인 증거가 새로 나왔을 뿐, 예상 밖의 일이 아니다. 놀랄 일은 다른 데 있다. ‘윤창중 성추행 사건’과 아시아나 여객기 착륙 사고 직후 미국 사회가 보여준 피해자 보호 조처가 바로 그것이다. 윤창중 사건 때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피해 여성과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세계 언론 어디에도 피해 여성과 신고자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이나 육성이 노출되지 않았다. 아시아나기 사고 직후에도 병원에 입원한 탑승객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기자들이야 답답한 노릇이지만, 그 덕에 피해자의 인권과 사생활이 보호됐다. 미국 법률(DC Code section 22-722 Obstructing Justice 중 Prohibited acts: penalty)에 따르면, 당사자가 원치 않는데 접촉하려다 걸리면 사법방해죄로 3년 이상~30년 이하 징역형 또는 1만달러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한국에서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윤창중 사건의 피해 여성과 신고자는 일부 누리꾼들한테 일찌감치 신상이 털렸을 테고,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들 탓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을 거다. 아시아나기 사고 탑승객이 입원한 병실에도 카메라가 밀고 들어갔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축구 선수 기성용이 가까운 이들만 볼 수 있는 비공개 페이스북 계정에 최강희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팀 운영 과정에서 해외파를 차별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일로 세상이 시끄럽다. 누리꾼들이 들고일어나자 대한축구협회가 징계를 논의했고, 홍명보 새 축구대표팀 감독은 사실상 에스엔에스(SNS)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기성용의 ‘싸가지’를 질책하는 소리는 넘쳐나는데, 비공개 글을 당사자 동의도 받지 않고 까발려 사생활을 침해한 축구평론가를 탓하는 이는 거의 없다.
생각해볼 일이다. ‘빅브러더’에도,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에도, 국정원의 수치스런 행태에도 무감하다면 누가 우리를 지켜줄지. 사람들은 타인한테서 모욕당하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를 모욕한다는 오래된 말도 함께.
이제훈 국제부장
nomad@hani.co.kr
문재인 발언 5가지 문제]
①"정계 은퇴 불사" 논란 불 지피고, 이제와서 "논란 끝내자"
② 회의록 작성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아무런 설명 없어
③ 진상 규명 위한 구체적 해법 제시 없이 與野 합의만 강조
④'국정원本 조작 의혹' 제기하다 불리해지자 "眞本으로 봐"
⑤원본 결국 못 찾았는데… "NLL 포기 발언 없었다" 단정
①원인 제공자가 '논란 끝내자'
문 의원은 지난달 21일 회의록 원본 전면 공개를 주장했고, 29일에는 "NLL 포기 발언이 있었다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도 했다. 문 의원은 국정원의 회의록 공개에 반대했던 민주당을 회의록 원본 공개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 역할을 했다. 회의록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자 민주당 내에서는 "문 의원에게 너무 이끌린 것 같다"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문 의원은 이날 회의록 정국의 문(門)을 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대화록으로 NLL 포기가 아님이 더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했던 우리로선 아쉬움이 있지만, 정상회담 전후 기록만으로도 진실을 규명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NLL 포기 논란 국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자 회의록 공개라는 비정상적 강수(强手)를 던졌다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그로 인해 민주당이 지게 된 부담에 대해서는 아무런 유감 표명도 없었다.
문 의원은 2007년 10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정상회담 대화록이 작성되고 국가기록원에 이관됐을 기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고, 그 전에는 정상회담준비위원장을 겸직했다. 친노(親盧) 측 주장대로라면 국가기록원에 있어야 할 대화록이 사라진 초유의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사람이 문 의원이다. 그러나 문 의원은 이날 "원인이 무엇이든,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든 국민께 민망한 일"이라고만 말했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③진상규명 의지 있나
문 의원은 "대화록이 없는 상황의 규명은 여야가 별도로 논의하면 될 일"이라고 했다. 여야는 현재 말로는 진상 규명을 요구하지만 검찰, 특검, 국정조사 등 구체적 해결책에 대해선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 사정을 아는 문 의원이 진상 규명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여야가 합의해 사실관계를 차분히 규명하라"고 한 것은 회의록 실종 국면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회의록 진상 규명보다는 국정원 국정조사로의 국면 전환만을 노렸다는 지적도 있다.
④국정원 공개본이 眞本인가
문 의원은 "새누리당은 국정원이 공개한 회의록이 진본이라는 입장이었으니 국가기록원에서 회의록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사실 판단에 어려움이 있을 리 없다"고 했다. 이는 국정원 회의록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해왔던 문 의원의 과거 발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문 의원은 "공개된 회의록 내용에 왜곡이나 조작이 있다면 더 엄청난 문제"라며 "그 회의록을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내용의 왜곡이나 조작이 없는지 규명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국정원 공개 회의록의 진위(眞僞) 여부를 의심하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진본으로 보겠다며 말을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⑤"NLL 논란" 자체도 부정
문 의원은 성명에서 "국정원이 공개한 회의록에 의하더라도 NLL 포기가 아니라는 것이 국민의 의견"이라고 했다. 일부 여론조사 기관의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기는 하지만 'NLL 발언 논란'에 대한 여론을 단정할 수 있는 공식 근거는 없다. 다수 국민이 이미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문 의원이 회의록 원본을 공개하자고 제안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지난 6월 30일 "국가기록원에 있는 기록을 열람해 NLL 포기 논란을 둘러싼 혼란을 끝내자"고 했다. 본인 스스로 NLL 발언 관련 혼돈이 있다는 사실을 가정해 원본 공개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수 국민의 판단은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