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일
/ 성령강림절 셋째 주일
감사한 후 또 울부짖다
시편 40:1-17
곽건용 목사
탄식과 감사 찬양이 공존하는 시편
오늘 읽은 시편 40편은 얼핏 보면 구약성서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시처럼 보입니다. 이 시는 “야훼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시고 내 부르짖는 소리 들어주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표현은 다른 시편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입니다. 또한 “죽음의 구렁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진흙 수렁에서 나를 꺼내주시어 바위 위에 내 발을 세워주시고
내 걸음 힘차게 해주셨다.”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탄식시를 지은
시인들 대부분이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달라고 간절히 울부짖은 사람들입니다. 또 감사 찬양시를 부른 시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주셨고 든든히 세워주셨기 때문에 탄식을 버리고 감사 찬양으로 돌아선 것이므로 이것 역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린 왜 오늘 이 시편을 읽었을까요? 시편 40편에는 얼핏 보면 눈에 잘 띠지 않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다른 시편들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려는 겁니다.
노래로 따지면 1-10절은 1절에
해당되고 내용은 감사의 노래입니다. 11-17절은 2절로서 탄식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감사의 노래와 탄식의 노래를 함께 부른 것입니다. 이 시편에는 탄식과 감사 찬양이 공존하는 셈입니다. 사실 시편 가운데 이런 형식을 가진 노래는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탄식과 감사가 공존하는 시편들 대부분이 1절은 탄식의 노래이고 2절은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것이
형식으로 보나 감정의 흐름으로 보나 맞습니다. 먼저 탄식을 하고 그 다음에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게 마땅하지요.
그런데 이 시편은 정반대입니다. 1-10절이 감사의 노래이고
11-17절이 탄식의 노래로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사의 노래를 먼저
부른 다음 탄식의 노래를 부른 것인데 이는 형식으로 보나 감정 흐름으로 보나 어색하고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정신이 나갔거나 감정적으로 비정상이어서 이렇게 노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 이유가 뭔지 깨닫는 것이 이 시편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되겠습니다.
‘새 노래’를 부르겠다!
노래는 “야훼께 바라고 바랐더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말이나 영어로는
원어의 어감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표현입니다. 곧 전심을 다해서 바랐다, 온 마음을 다 쏟아서 바랐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시인은 이토록 온 마음으로 바쳐서 야훼를 바라고 바랐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시인은 이토록 목숨을 걸다시피 간절히 야훼를 바랐을까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 야훼를 바라야지 그 외에 누굴 바라란 말인가?’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 모든 신앙인이 그렇게 전심으로 야훼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현대인에겐 하나님 이외에도 기댈 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온 마음으로 야훼만 바랐답니다. 야훼 이외에 다른 데선 기대거나 희망을 둘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훼 이외에 모든 희망의 불빛이 꺼져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그에겐
야훼밖에는 바라볼 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훼의 응답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맘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1-10절은 그것을 표현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 다음에 시인은 “야훼께 바랐더니 굽어보시고 들어주셨고 건져주셨으며 세워주셨고 새 노래가 터져 나오게 하셨다.”라고 노래합니다. 그가 야훼께 바라고 바랐더니 야훼께서 자기를 ‘굽어보셨고’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며’ 자기를 든든히 ‘세워주셨고’ 자기 입에서 새 노래가 터져 나오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새 노래’를 불렀다고 했는데 여기서 새 노래가 뭘까요? 어떤 의미에서 새
노래였을까요? 새 노래는 옛 노래와 뭐가 다를까요?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새 노래는 새로운 생을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과거와는 다른 새 삶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 말입니다. 따라서 그가 새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는
과거의 삶과 단절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픈 과거였든 화려하고 찬란한 과거였든 좌우간 그것과 단절했다는
의미입니다.
4절은 시인이 끊어낸 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복되어라,
허수아비 우상에 속지 않고 야훼만 믿는 사람이여.” 여기서 시인은 우상을 믿는 사람과
야훼만 믿는 사람을 대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상을 믿는 게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시편뿐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서 우상을 믿는 것은 절대 금지됩니다. 따라서 과연
우상을 믿는 게 뭘 의미하는지, 그것을 왜 그토록 적극적으로 금하는지를 아는 것은 바른 신앙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상 아닌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길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은 섬기기 말아야 할 우상에 뭔가 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상이 뭔지만 알면 그것을 섬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됐든 유형, 무형의 물건이
됐든 세상에 본래부터 우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첨부터 우상이 아니라 사람이 섬기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겁니다. 곧 우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그걸 섬기게 되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사람들이 섬기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돌덩이든 불상이든 십자가든
상관없습니다. 우상숭배에 있어서 대상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형이냐 무형이냐 여부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가 됐든 사람이 그걸 ‘섬긴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상처럼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인이 이제부터 부르겠다는 ‘새 노래’는 바로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부르겠다는 새 노래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지 않겠다는 각오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6절에서 “짐승이나 곡식의 예물은 당신께서 아니 원하시고
오히려 내 귀를 열어주셨사오며 번제와 속죄제를 바치라 아니하셨기에......”라고 노래합니다.
그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을 노래로 표현합니다. 야훼께서는 짐승이나 곡식의 예물을
바치는 걸 원치 않으신답니다. 야훼께서 번제와 속죄제를 바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로 줄곧 해왔던 일이 짐승이나 곡식으로 야훼께 제물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제사장도 있었고 제사에 관한 세세한 규정들이 있습니다. 레위기가 그 대표적인 책이지요.
그런데 그걸 하지 말라니 이게 웬일입니까!
여기서 구약성서의 제사의 의미에 대해서 세세히 말씀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하나만 말씀하겠습니다. 구약성서 제사에서 제물은 뭔가를 바라고 그걸 얻기 위해서 바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바라는 것을 받은 다음에, 혹은 받았다고 믿고 거기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곧 제물을 바칠 터이니 그 대가로 뭔가를 해 달라는 식으로 제물 갖고 거래하는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런 거래는 야훼께서 싫어하는 짓입니다.
우상숭배는 섬기고 제물을 바치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게 야훼든 바알이든
부처든 알라든 뭐든 간에 제물을 바치면서 소원을 비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짓을 요구하는 신이라면 그것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란 얘기입니다. 번제나 속죄제를 바치라고 강요하는 신도 우상입니다.
시편은 야훼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이 부를 ‘새 노래’는
바로 이런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새로운 형식의 노래이거나 전에는 없던 새로운
가락의 노래가 아니라 우상과의 결별을 표현하는 노래라 하겠습니다.
새 노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그 다음으로 시인은 새 노래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말합니다. “엎드려 아뢰었사옵니다. ‘제가 대령하였습니다.’ 나를
들어 두루마리에 적어두신 것, 당신 뜻을 따르라시는 것인 줄 아옵니다.” ‘두루마리’는 야훼 하나님의 가르침, 곧 토라가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두루마리에 적힌 토라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나의 하나님, 당신의 법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기뻐합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의 정의를 알렸사옵니다. 야훼여, 아시다시피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당신의 정의를 내 마음속에 숨겨두지 않고, 당신의
진실하심과 구원을 알렸사옵니다.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그 큰 모임에서 숨길 수가 없었사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야훼의 정의를 노래하겠답니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답니다. 야훼 하나님의 뜻과 정의를 맘속으로만 간직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분의 진실하심과 구원의 은혜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야훼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는 것을 노래의 주제로 삼습니다. 시인은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새 노래의 가사는 야훼의 정의, 구원,
사랑, 은혜입니다. 야훼의 진실하심과 구원이
노래의 주제이고 사랑과 진리가 노랫말입니다. 야훼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것 같은 산술적 평균이나 균형이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봐주시고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본래부터 기울어져 있는 저울추의 균형을 맞추는 일입니다. 시인은 이를 노래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소외된 자와 변방으로 내몰린 자들을 특별히 돌봐주십니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제물이나 받고 흐뭇해하시는 신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정의로 이끄시며 구원하시는 데서 기쁨을 누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삶 속에서도 끝없이
용솟음치는 희망의 샘물이 되어주시는 분임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시인이 부르는 새 노래입니다.
감사한 후 또 울부짖다!
그런데 이렇게 밝고 따뜻했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어두워졌습니다. 새 노래를 부르겠다고
소리 높여 외친 다음 곧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무대 위를 환하던 비추던 조명이 일시에 꺼져서 캄캄해졌습니다.
이젠 무대 위에서 실낱같은 빛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환희에 차서 새 노래를
부르던 시인이 느닷없이 설움에 복받쳐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야훼여, 당신의 그 인자하심 나에게서 거두지 마시고,
그 진실한 사랑으로 이 몸을 언제나 지켜주소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이 이 몸을 에워쌌사옵니다.
머리카락보다도 많은 나의 죄에 덜미가 잡혀 낙심천만
눈앞이 캄캄합니다.
야훼여, 너그러이 보시어 건져주소서.
어서 빨리 오시어 나를 도와주소서.
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게 하소서.
고생하는 이 모양을 보고 좋아하는 자들이 창피를
당하고 도망치게 하소서.
깔깔대며 나를 조소하는 자로 하여금 너무나 부끄러워
넋을 잃게 하소서.
이 대목은 한 절씩 풀어가며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내용은 전형적인
탄식시의 그것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다른 탄식시를 읽을 때처럼 가슴이
먹먹해지고 기운이 빠져나갑니다. 시를 읽는 사람도 시인과 교감해서 그의 심정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보다도 많은 나의 죄에 덜미가 잡혀 낙심천만 눈앞이 캄캄합니다. 야훼여,
너그러이 보시어 건져주소서. 어서 빨리 오시어 나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절절한 탄식을 또 어디서 읽겠습니까. 시인은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숨기지
않습니다. “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게 하소서. 고생하는 이 모양을 보고 좋아하는 자들이 창피를 당하고 도망치게 하소서. 깔깔대며 나를 조소하는
자로 하여금 너무나 부끄러워 넋을 잃게 하소서.”
그는 왜 이렇게 노래했을까요? 도대체 왜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이와 같은 절절한 탄식의 노래를 불렀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얻으려면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머리로 하는 논리를 버리고 현실의 삶에서 답을 찾는다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시인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했다는 얘기입니다. 곧 시인은 죽음의
구렁텅이 빠져서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했고 구원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 받은 기쁨을
노래에 실어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야훼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다시는 짐승이나 곡식 예물로써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원치
않으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 그리고 당신의 정의와 사랑, 구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새 노래에 담아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시는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시인을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이와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구원을
받았다가 또 다시 고통스런 일을 겪습니다. 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말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다양한 일들을 겪고 경험하면서 그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신앙이 깊어지는 경험도 합니다.
때론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이겨냄으로써 내 신앙이 한 뼘은 깊어졌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고난이 다시는 오지 않지는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선 고난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수도 있는 고난까지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겪는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을 자초하는 셈이지요. 기독교인에게 이런 일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삶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법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법입니다.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아본 사람은, 그래서 새 노래를 불러본 사람은 그와 비슷한 고난이 다시금 닥쳐왔을 때는 전과 같이 맞이하지 않는 법입니다. 전보다는 덜 어렵게 이겨낼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새 노래’를 불러본 경험에서 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노래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는
새 노래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입을 크게 열고 노래해야 합니다. 기왕 부를 노래라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새 노래를 부릅시다.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높이는 새 노래를 부릅시다. 갈등과 분쟁이 하루도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보여주는 새 노래를 소리 높여 부릅시다. 이와 같은 새 노래를
부를 때 여러분 각자가 안고 사는 크고 작은 아픔들도 넉넉히 치유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