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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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한 사람 자신의 편이 되어 힘이 돼줄 수 있는 대상이 없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적막강산이고 기댈 곳이 하나도 없다는 느낌으로 최후의 선택을 하는 것이 자살이다. 자신의 힘겨움을 털어놓는 것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까봐, 자신도 누군가가 힘들게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 부담을 느꼈으니까라고 조용히 혼자 삼킨다. 그런 세상이다. 그런 인심이다. 불행은 전염된다고 생각하고 빨리 잊고 싶어하고 털어버리고 싶어한다. 양희은의 <그대가 있음에> 노래에 …슬픔이 슬픔을, 눈물이 눈물을, 아픔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지요…라는 가사가 있다.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진정으로 경험하고 같이 울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절창이다. 지인의 자살 앞에 사람들이 오열하는 것은 그가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손을 잡고 통곡하고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상대가 왜 내가 될 수 없었을까, 과연 그가 찾아왔을 때 손 잡고 울어 주고 더 많은 아픔을 슬픔으로 안아주고 힘을 보태줄 수 있었을까라는 후회와 자책 때문이다. 참 많이 죽는 세상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오이시디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과 노인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경제적 원인과 외로움으로 인한 노인의 자살은 어찌보면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핵가족이 급격히 진행된 우리 사회가 닥친 필연적인 문제다. 그러나 청소년들과 젊은층, 한창 기운이 좋은 중장년까지 자살이 느는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받아주고 위로하고 안아줄 영역이 없을 만큼 각박하다는 증거다. 사회안전망을 거론하기에 앞서 개인적·가족적 영역에서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같은 운명, 그리고 그중에 나도 하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고 다른 사람의 자살도 나의 자살로 바꾸어 놓고 볼 수 있다. 각 개인마다 저마다 짊어지고 있는 고통들을 들여다 보면 그 사정이 내 사정이고 내 사정이 그 사정일 수 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지럽게 돌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힐끗 바라보고 안됐다 하는 순간 다시 롤러코스터의 손잡이를 꼭 붙잡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아닌가 싶다. 매일 죽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사는 후배 하나에게 말했다.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아도 죽게 되어 있다, 뭔 안달이냐’ 했더니 ‘맞아요.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한 오늘인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젊은 사람들의 자살은 나이 든 사람들을 주눅들게 한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가해자가 된 느낌이어서…. 그들의 살려달라는 비명과 절규를 외면한 것 같아서…. 김선주 언론인
하늘나라가 그렇게 좋다면서요
어느 누구는 향숫병이 났다면서요
그러면서 80을 넘겨 사시다가 넘어져서 후유증으로 돌아가셧다면서요
그렇게 좋은 하늘나라 왜들 빨리가고 싶어 안달을 하지않을까?
이 땅보다는 이 세상보다는 너무 좋아서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들어본 적이 없고
생각으로도 추측을 못해 본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빨리빨리 자살해서 어서 하늘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