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 시시한 닭쌈 그만 하고--우리는 시편 23편을 어떻게 읽는가?

by 김원일 posted Aug 06, 2013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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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6 / 성령강림절 여섯 번째 주일

 

야훼는 나의 목자

시편 23:1-6

 

곽건용 목사

 

단순하지만 깊이 있고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시편

 

오늘은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150편의 시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편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내용이 단순하지만 잘 읽어보면 깊이가 있는 시입니다. 형식이 간결하고 수식어도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읽으면 마음이 절로 평안해지는데 이 평안함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촉촉이 적셔왔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와 한 평생 잘 살고 무덤에 몸을 누인 사람에게도 잘 어울리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을 가리켜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리는 노래’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시편은 너무 잘 알기에 그 깊은 맛과 의미가 충분히 감상되지 않기도 합니다.

 

이 시편은 다양한 은유(metaphor)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로 은유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라는 은유도 나왔고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은유도 사용됐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분명히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시인의 ‘원수’가 누군지도 알 수 없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거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거나 ‘잔이 넘친다’는 말들도 모두 은유인데 눈으로 보듯이 생생한 표현입니다. 이 시편은 은유로 시작해서 은유로 끝나는 시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이같이 다양한 은유 가운데서 시편 전체를 컨트롤하는 은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 은유가 시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나머지는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물론 목자 은유는 이스라엘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1절에 시인이 말하려 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는 1절에 대한 설명이고 구체적인 예라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은유인 ‘목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양떼의 안녕과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양떼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들에는 갖가지 맹수들이 있고 이들은 호시탐탐 양떼를 노리고 있습니다. 목자는 맹수들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둘째로 목자는 양떼에 먹을 풀과 마실 물을 공급해줘야 합니다. 목자는 양떼를 푸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겠지만 이 두 가지가 목자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습니다.

 

양들의 생존은 전적으로 목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처럼 어리석은 짐승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지만 양의 운명이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다는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고백입니다. 마치 양이 목자에 의존하듯이 시인도 여호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주입하거나 강요한다고 해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전적으로 체험에서부터 나온 고백입니다.

 

그 다음에 시인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참으로 전원적이고 목가적입니다. 정말 평화롭고 한가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은 목자가 양떼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양떼는 한가롭게 쉬고 있지만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자는 사방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또는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한 곳에 몇 군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라고 말하는 이사야 40 11절이 그 중 하나입니다. 양떼의 평화는 목자의 노고를 필요로 합니다. 목자가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살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키지 않는다면 양떼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러나 목자가 이토록 경계한다 해도 양떼를 위험으로부터 100%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시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시인이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어떤 상황인지, ‘원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우린 모릅니다. 그것은 맹수의 위협이나 천재지변일 수 있겠지요. 이때 양떼를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자가 목자입니다. 목자는 맹수가 나타났을 때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떼를 지킵니다. 천재지변을 만났을 때도 목자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기까지 합니다.

 

목자가 양떼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누가 15:3-6)

 

이 말씀은, 양 아흔아홉 마리와 한 마리를 양적으로 비교하자는 뜻이 아니라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아끼고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양떼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떼를 위해 자기 안전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심지어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자기가 살려고 양떼를 버리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착한 목자’라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15)

 

목자가 양떼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까요?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그렇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 양들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들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곧 친밀성 때문이라는 겁니다. 목자와 양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이 목자와 삯꾼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음으로 시인은 여호와가 자기 목자이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제가 가끔 우리말 성경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말 성경에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은 “I shall not want”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히브리어나 영어로 이 동사는 모두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인데 여기선 목적어가 없이 사용됐습니다. 그 말은 여호와가 목자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족함이 없다’는 우리말이 딱 맞습니다.

 

더 바랄 게 없는 게 어떤 상태일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대체 어떤 상태가 더 바랄 게 없는 상태일까요? 부족함이 없는 상태란 어떤 상태입니까? 갖고 싶은 모든 걸 다 갖고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어질까요?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할까요?

 

저도 어떤 상태가 더 바랄 게 없는 상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광야를 유랑했을 때 겪은 만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먹을 게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바로 그것 말입니다. 출애굽기 16 18절은 이에 대해 “(만나를) 많이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였던 것이다.”라고 서술합니다. 요즘은 부유와 빈곤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 됐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개념도 중요하지만 상대적인 개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요. 남과 비교해서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부와 빈곤을 결정짓는다는 얘기입니다. 만나 사건은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유지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진실과 함께 소유에 관해서 남과 비교함으로써 나의 상태를 측정하지 말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광야 생활 전체를 요약하는 신명기 2 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야훼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이 막막한 광야를 돌아다니는 동안 너희를 보살펴 주었으며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의 하나님 야훼가 함께 있어 너희에게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이 없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더 바랄 게 없는 상태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야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듭니다. 곧 ‘임마누엘’(God with us)이 더 바랄 게 없는 상태의 조건, 아니 그것 자체라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4 11-13절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더 바랄 게 없는 상태는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점은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곧 만족의 조건이 내 밖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만족은 누가(또는 무엇이) 내게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내가 반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현대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부릅니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라는 겁니다. 철저하게 자본 위주의 사고이지요. 자본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소비하라!’고 자극합니다. 그런데 소비에 대한 자본의 전략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자본은 얼마 전까지는 소비할수록 '이익'이라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략을 바꿔서 소비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협박’을 하는 셈입니다. 소비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고 하니 강박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바깥에서는 끊임없이 광고를 통해 소비심리를 불러일으키고 안으로는 욕망을 자극해서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덜 갖고 덜 쓰는 삶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나 혼자서 덜 갖고 덜 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자본이 자극하는 대로, 그리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소비하며 살아가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와 반대 되는 삶의 방식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사람의 소유욕은 채워지지 않고 아무리 많이 소비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더 소비하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시편 23편 시인의 노래대로 ‘부족함이 없는’ 삶, 바울의 말씀대로 ‘자족하는 삶’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삶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시인의 노래를 오늘날의 삶에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영혼의 소생은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 또는 삶의 갱신, 재생,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른 뼈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숨결이 그들을 스쳐가자 되살아나는 것을 봤습니다(에스겔 37).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했을 때 이 광경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23편은 이렇듯 목자인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이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고 살면서 자기 영혼을 새롭게 갱신시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부르는 감사의 노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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